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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 |
[저널초점] 공공미술Ⅰ- 1
관리자(2010-09-03 14:17:11)
공공미술Ⅰ 미술의 공공성 소통으로 본분찾기 - 이선영 미술평론가 우리가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공공미술은 각종 기념물들이다. 공공미술은 공공영역이 담론화 되고, 민족국가의 역사화 작업이 활발했던 근대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공의 기억 속에 간직할만한 기념비적 사건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기념물들은 불가피하게 시대착오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것들로 비춰지곤한다. ‘모든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다’라고 말한 발터 벤야민은 파리의 콩고드 광장에 있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두고, 수천 년 전에 이집트인의 지배의 상징이던 기념물이 현재에는 프랑스 식민지의 증거물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역사적 기념물은 불가피하게 의미가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수행하는 역사의 신화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패배의, 평화는 전쟁의 기념물로 전락한다. 한때 위용을 자랑했던 기념비들은과거의 잔해들이 되고, 잔해들이 채 치워지기도 전에 또 다른 역사(신화)화 작업이 아무런 공공의 합의도 없이시행된다. 공공성과 이질성 빌딩 앞의 조형물들로 가시화되고 있는 현재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공공미술은 그저 강제된 법규에 의해 형식적 절차를 거쳤을 뿐이며, 특정 부동산에 소속된 사적인 표지들에 불과하여 진정한의미의 공공적 선택에서 벗어나 있다. 공공적 기념비의 낙후성에 대한 시각은 미술계 내부로부터이의제기가 관철된 것이라기보다는, 도시의 시공간이 급격하게 재편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정보혁명의 산실인 대도시의 구조물들은 고정된 물리적 표면을 넘어, 끝없이 흘러가는 정보의 흐름에의해 시간을 공간화 시킨다. 더 이상 환상도 현실도 아닌 극실재(hyperreality)가 명멸하는 표면들의 화려한 운동 속에서, 무엇인가를 기념하기위해 비좁은 도시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자그마한 물리적 실체는 단 몇 초간의 관심도 끌기 힘들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공영역에서의 유의미한미술은 곧 낡아질 기념비나 맥 빠진 장식일 수는없다. 그것은 유혹과 자극으로 점철된 기호의 지배 속에서 더 지루해진 일상과 더 가혹해진 삶의조건과 그 이면을 직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작은 사건들과 관련되어야 한다.사람들을 온통 유혹하는 기호의 범람은 엄청나게 넓어진 소비 공간의 확대를 예시하는 동시에공적 공간의 사라짐을 반증하기 때문에, 공공영역에서의 미술, 즉 공공미술의 필요성은 여전하다. 공공영역의 축소와 그 영역에서의 소통 주체인 공동체의 사라짐은 그것의 복구를 요구하는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미 그 존재가 당연시된선험적 공동체성에 호소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전통과 근대사회가 지나가면서 그와 더불어사라지고 있는 공동체는, 그것이 부재하는 만큼남발되곤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는 현대사회에서 확실한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집단은 커다008란 유혹이다. 오늘날‘공동체’는 나날이 벌어지고 있는 계층간의 차이 속에서 호출되고 있다. 경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몸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상류층의 안전에 대한 욕구, 그리고삶의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중산층 이하의 사회적안전망에 대한 욕구가 각 계층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공동체를 요구한다.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 속에서 공동체는 혼돈과 해체 속에 놓여진 사람들의 자기방어적인 욕망과 관련된다. 불안정성이 급증할수록 자기방어적인 몸짓은 안과 밖의 경계를 확실시하려는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공공미술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영역은 내부의 동질성을 보증하는 확고한경계가 아니라, 불안정성 속에서 유동하는 경계선 상에 놓인다. 공동체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몸과 일치되는 경향이있다. 이질성을 동화하거나 뱉어내려는 몸의 움직임은 공동체의 경계를 설정하려는 사회적 태도와 교차된다. 지그문트바우만은『액체 근대』에서 공동체주의를, 액체처럼 불안정한근대적 삶에서 개인의 자유와 안전 사이에 깊어가는 부조화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부조화는 자유와 평등,개인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궤를 같이한다. 자유로운 개인은 공공의 선이나 정의에 미온적이거나 무관심하기마련이다. 이 틈을 관료주의와 상업주의의 연합세력이 차지한다. 세계화로 인해 민족이나 국가의 위상이 급락함으로서공공영역은 더욱 축소된다.근대에는 국가와 민족 공동체를 일치시키려는 역사의 자연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대개 다른 공동체들을 억압한 결과이다.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이익사회(Gesellscaft)로 변모함에 따라 민족과 국가를 공동체라는 틀로 일치시키려는 경향도 쇠퇴해간다. 세계화는 각 지역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무한경쟁과 투쟁의 장을 열었으며, 국가는 다국적 기업 하위범주로 재배치된다. 세계는 물론 한 사회를 이루는 건강한 복수성이 사라지고 플라톤 식의‘유일한진리’가 군림하게 되었는데, 이‘만물을 통일하는 유일한 정의의 기준’은 다름 아닌 시장이 되고 말았다. 동질화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차이만을 가질 뿐 동일한 문화시장에 지배된다. 선험적으로 가정되거나 당위론적으로 어떠해야 한다는식의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시장이라는 단일한 판에 복속되기 쉬운 또 하나의 코드가 되고 만다. 이 단일한 판이 점차 문화의 외피를 걸치게 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공공영역의 미술은 동질성의 몸체를 교란하는 이질성의 산포자라는 역할을맡게 될 것이다. 공공미술은 예술의 근본적 요구다 이질성은 그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바람직한 미지의 공동체 문화를 낳기 위한 도발이자 문제제기이다. 공공미술이 공동체를 요구하는 것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소통은 더 이상밋밋한 이성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체는 전통적 이상주의자들이 가정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융합된 하나이거나 생산이나 효용의 면에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블랑쇼는『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역설하지만, 전체주의적 공동체나 개체를 강조하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과 희생에 기초한 무위와 부재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는 바타유를 따라서‘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를 역설한다. 이 부정의 공동체는 닫힌 전체성이아니라, 지속되지 않는 한 순간에 존재한다. 어떤 가치로 한묶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다수들, 동일성에 근거를 두지 않는 이 공동체는 타자와 차이의 발견으로 지속되는 역설적인 공동체이다. 이 역설적 공동체는 인간들 사이에단수적 관계, 즉 복수적 단수의 존재를 강하게 긍정한다.이러한 공동체에는 특정한 목적과 이념과 사물화를 거부하고, 한계 없는 비움에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가 존재한다. 거기에는 공동체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세우는 희생이있다. 아무 줄 것도 없고 아무 희생할 것도 없기에 서로 선물을 주고(상징적 교환)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다. 공공미술은더 이상 과거의 의미에서의 집단이나 개인에 기초를 둘 필요가 없다. 소통은 자유주의에서 비롯된 추상화된 개인이 아닌나눔을 향한 자신의 넘어섬, 스스로에게 갇혀 있을 뿐인 내재성이 아니라 내밀성의 공유, 허울만이 남아있는 개인의 자율성이 아니라 타자에게 열려있음에 의해 가능하다. 경험은 그본질에 있어‘바깥으로의 열림 그리고 타인에게로의 열림이기에 나와 타자 사이의 급진적 반대칭성의 관계를 유도하는움직임(블랑쇼)’이기에 소통 가능하다. 열림을 향한 움직임,다시 말해 찢김과 소통이 예술의 기반이다. 그러한 소통에서는 굳이 예술 앞에 따로 공공이란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말하자면 공공미술이란 동어반복적인 표현이다. 본래예술이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사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공공미술은 예술의 근본적 요구에 대한 당연하고도 원론적인대답이다. 이선영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미술과 담론>의 편집위원과 <미술평단>의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2005년 제1회 정관 김복진 미술이론상과 2009년 제1회한국미술평론가 협회 비평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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