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0.9 |
[저널초점] 공공미술Ⅰ- 3
관리자(2010-09-03 14:17:58)
공공미술Ⅰ 새로운 예술공론의 장 시대를 열다 - 김준기 미술평론가 예술은 사적인 것일 수도 공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예술작품의 생산은 사적인 체험을 바탕하며, 작품 감상 또한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아가 그것은 개인과개인의 사사성을 바탕으로 한 공론장을 생성한다. 그러나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 이후의 예술은 공공적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근대사회가 태동하는 데 있어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회변동의 한 요인이자 축선으로작동했기 때문이다. 예술 메커니즘으로 인해서 작동하기시작한 근대적 공론의 장은 근대사회의 이상과 가치를생성하고 구현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그것이 예술가 개인의 사적인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라도 예술작품은 공론의 장에서의 소통을 전제로 태어난다. 근대적의미의 예술은 한 개인의 만들어서 공표하지 않는 메모나 편지, 낙서, 그림, 또는 혼자 부르는 노래나 연주 등을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출판이나 전람회, 콘서트 등의 형태로 공적인 공간에서 공표되는 것을 전제로 한 메커니즘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술적 소통으로 인해서 생성되는 공공영역, 즉 예술공론장이다. 예술공론장의 변화 문인이나 학자들이 사군자나 산수풍경을 그리고 화평회를 가진다거나 궁중의 화원이 왕가의 행사나 임금의 초상을 남겼다고 해서 그것을 예술공론장이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물론 거기에도 약간의 공론장 성격이 있다. 하버마스에따르자면 그런 경우‘과시적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있다. 근대사회는 특정소수의 과시적 공론장을 시민사회의공론장으로 바꾸어 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설읽는 사람,전람회의 관람객, 콘서트의 청중 등을 르 퍼블릭끄(lepublique)로 불렀던 19세기 프랑스 사람들에게 공중의 의미는 문학과 예술이 매개한 공론장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예술적 공론장의 참여자들에 의해 생성된 근대사회의 정신은 공공영역을 통한 사회적 합의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이었다. 정치적 공화제, 경제적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사회적 분화(分化), 그리고 예술적 공공영역은 근대체제를 완성한 주요 요소들이었다. 요컨대 근대적 의미의 예술은 태생적으로공공적이었다.공론장의 형상이라는 근대초기의 시대정신은 예술가들로하여금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는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감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나면서 근대사회는자본주의체제를 훌쩍 넘어서 후기자본주의체제로 접어들었다. 그 사이 예술가들이 접한 시대적인은 고도로 발달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에 관한 이데올로기였다. 상업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예술가들이 팔리는 작품에 천착하는 현상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상업주의와 미술의 결탁은 자본주의체제의 산물이다. 미술작품의생산이 시장체제와 결합하면서 주문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주문 없이 생산하고 이후에 그것을 전람회를 거쳐 발표한 후 유통하는 미술시장 메커니즘이 생성된 것이다. 미술시장은 점점 미술체제 전반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의 성공을 염두에 둔미술, 팔리는 작품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메커니즘의미술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예술공론장은 와해의 위기를 맞이했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공론장의붕괴는 새로운 예술체제를 매개한다. 그것이 완벽한 시장 지향의 미술로 귀결할지, 아니면 새로운 예술공론장으로 전환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공미술이예술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의 지위와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미술 변천사 공공미술은 근대적 이념을 상실한 예술의 사유화 과정에대한 총체적인 반성으로부터 나왔다. 예술을 공론의 장에서소통 가능한 메커니즘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목적의식적인운동의 일환으로 공공미술을 제기하고 나온 것이 68혁명 당시의 유럽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사 이래 예술은 공공적인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굳이 공공미술이라고 명명했을 때의 그 공공미술은 다른 것이었다.그것은 근대초기의 예술공론장이 가치 전도된 상황에서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전근대시기의 기념비적인 예술프로젝트, 가령 광장의 기념비 조각이나 궁정회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공적자금으로 공공장소에서 공공의 의제를 다루는 공공예술작품이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관한 새로운 담론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공공미술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서구의 경우 모뉴먼트나 건축물미술장식품 같은 낮은 단계의 공공미술개념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한국의 공공미술 한계와 가능성 한국의 공공미술은 70년대 기념비적 초상화 민족기록화를 대대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기원한다. 86년부터 시작된 건축물미술장식품제도는 지난 20여 년 동안 수천 점에 달하는 작품을 양상했다. 그러나 그것이 미학적 결여와 제도적 파산에 도달했다는 비판에 직면했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새로운 공공미술 논의가벌어지기 시작한 지 10년 남짓이다. 2006년의 <아트 인 시티 프로젝트> 이후의 관주도 공공미술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결과했다. 작업실과전시장만 알고 살아왔던 예술가들이 거리와 마을에서 새로운 예술생산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년 미만의 기획과 실행 절차를 가지는 단발성 프로젝트가 양산되면서 그 진정성과 효과에 대한 의문이 증폭하고 있다. 현재의 양상을 기준으로 공공미술의 가치를 재단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제도화된 공공미술보다 더 역동적인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험과 도전의 에너지로 가득 찬 예술가의 자율성에서나온다. 주문생산으로부터 이탈해서 자발적인 창의력으로 예술생산에 뛰어든 근대적 예술 개념의 이상이 지금의 난맥상을 넘어설 가치이다. 공공미술의 미래 공공미술은 거리나 마을에 자리 잡는 미술작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미술을 공공영역의 생산과 매개, 향유 등을 총칭하는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적 자율성이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시장미술에 잠식당한 동시대의 예술체제를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재구조화하는 과정에 있어 공공미술은 매우 유의미한 논의이자 실천이다. 중장기 계획을 가지고 공동체와 동행하는 커뮤니티 아트의 사례들이 지속가능한 예술체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예술에 대한 개념과 절차,방법, 결과 등의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예술이 사회 변동을 반영하고 추인하는 게 아니라, 역동적인 사회변동을 추동하고 견인하는 행위자 주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액티비스트 아트도 있다. 주류와 비주류, 문화권력과 아방가르드의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미술이 세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미술은 세상 속에 뛰어들어 시대정신과 공동체성을 획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공공미술의 이상 아래 함께놓여있다. 바야흐로 새로운 예술체제를 향한 역동적인 흐름이 저변으로부터 꿈틀거리고 있는 새로운 예술공론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김준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예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 공공미술팀장, 사비나미술관에서 학예연구실장, 2006년 부산비엔날레 조각프로젝트 전시팀장, 공공미술추진위원회 팀장으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석남미술상 젊은 이론가상을 받았으며, 경희대 겸임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