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9-03 14:20:00)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조르주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역사적인 한국영화회고전
- 임안자 영화평론가
퐁피두센터의 한국영화회고전
개막식은 한국과 프랑스 대표들의 간단한 인사로 진행됐고, 그 자리에서 박 문체부차관은“영화의 본고장이자 문화핵심부인 퐁피두센터에서 해외 최대 규모의 한국영화회고전이 열리게 된 것은 무척 고무적”이라고 말하면서 퐁피두행사의 역사적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유명인사들의 인사가 끝난 다음에는 개막식의 영화로 선정된 임권택 감독의1993년 작품 <서편제>가 상영관 가랑스(350석)와 소극장(150석)에서 동시에 상영되었다.<서편제>에 대한 현지 관객들의 반응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양쪽 상영실의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은 임권택 감독은“<서편제>는 서양인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없는 한국인의 정서가 기둥을 이루기 때문에 관객들이 중간에 빠져 나갈까 봐 은근히 걱정했는데 끝까지 진지한 태도로 감상하여 자신감을 갖게 됐다”면서 청중을 향해 고마움을 나타내 보였다.개막식의 끝 행사로 한복연구가 이영희의 한복패션쇼가퐁피두센터의 본관 입구의 공간에서 한 시간 정도 화려하게열렸었는데, 막 <서편제>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에게는 또하나의 멋진 볼거리가 됐었다. 옛날 궁정의 고급스러운 예복에서 현대 서민들의 일상적인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한복의 오랜 전통과 다채로운 모양새의 미학적 다양성을 한눈에볼 수 있게 해줬던 아주 독특한 전시였다. 전시의 마네킹은지난 달 8월호의 글에서 잠깐 말했듯이 대규모의 한국영화회고전이파리의 중심지 보부르 지역에 있는 조르주 퐁피두센터(이하 퐁피두센터)에서 1993년 10월 19일 성대히 막을 올렸다. 이날 오후 8시 30분에 시작된 개막식에는 한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6백 명에 달하는문화와 정치계의 인사들과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 그리고 TV·라디오등의 기자들이 참여했다.한국에서는 당시의 박태권 문화체육부차관과 영화진흥공사의 윤탁 사장, 한국영상자료원의 사업담당차장 박진석 그리고 연합통신의 기자와 한국의 주요 일간지들의 파리특파원들이 참가했다. 그와 더불어영화계에서는 임권택 감독과 오정해 배우(서편제), 김수용 감독(만추)이장호 감독(바보선언), 이명세 감독(나의 사랑 나의 신부)이 초청됐었다. 그리고 프랑스 쪽에서는 프레드릭 미테랑 영화감독(전 미테랑 대통령의 조카)과 프랑소와 기에 프랑스 국립박물관장 등 문화계와 정부 인사들에다 프랑스의 한국문화원 조성장 원장과 윤정희 배우를 비롯한 현지의 많은 교민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주로 파리의 젊은 학생들로 이뤄졌었는데 한복에 익숙지 않는 이들의 서투른 몸짓과 표정 때문에 관중 사이에서 계속웃음이 터졌고, 새로운 한복이 소개될 때마다“오!”라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한복의 아름다움은 <서편제>의 상영 때에도 충분이 감지됐었다. <서편제>의 여주인공 오정해 배우가 그날 입은 옷은 초록색의 두루마기에 찬란한 색깔의한복이었고 쪽진 머리에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비녀가 꽂혀있었는데 그날의 한복패션쇼와 썩 어울렸다.조르주 퐁피두센터(Centre Georges Pompidou)는1969년부터 1974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을 따 지은 것으로, 1971년에서 1977년까지 6년에 걸쳐 지어진 상부구조(superstructure)의 복합 문화기관이다. 이탈리아의 렌조 피아노와 잔프랑코 프란키니그리고 영국의 리처드 로저스 등 세계적 권위의 건축가들이설계한 이 육중한 철제 건물 안에는 대형의 공공 정보 도서관과 20세기의 주요 미술품들이 들어있는 국립 현대예술박물관 그리고 음향, 음악 연구소가 있다. 그리고 1978년에 가서는 문학, 춤, 연극, 사진, 영화부가 생겼고 각 분야마다 담당위원장이 임명되면서 각각 위원장 체제로 움직이고 있다.영화부는 지난 8월호에서 언급했듯이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장-루 파ㅆㅔㄱ이 처음부터 위원장직을 맡았다. 사실 가랑스는 1984년에 문을 열었으며 그 옆에는 소극장과 갤러리 가랑스가 딸려있다. 여기서 영화상영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퐁피두센터는 아주 빠른 속도로 영화예술의 전당이 되어 개관 이후 10개월 동안에 12만 관객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현재 퐁피두센터의 하루 관람객 수는 2만 5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퐁피두센터는“뉴욕에 맞먹는 예술. 문화센터를 세워 장래에 파리가 국제 예술 분야의 중심지가 되기를 바랐던”퐁피두 대통령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파ㅆㅔㄱ 위원장의비전은 할리우드 영화의 독주를 막고 대신 세계 영화가 공존할 수 있는 대안의 영화문화를 키우는 것이었다. 퐁피두센터와 라 로셀국제영화제가 국제적 시네필의 중심지가 된것도 그의 영화예술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장-루 파ㅆㅔㄱ의 영화철학에 대해선 <문화저널>의 8월호에실린 필자의 파ㅆㅔㄱ과의 인터뷰 기사 참조).파ㅆㅔㄱ은 78년부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3개국, 쿠바 등 40여 개국의 영화를 회고전으로보여줬고, 동양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 다음 네 번째로 한국영화가 초청됐다. 한국영화회고전에 대해 파ㅆㅔㄱ 위원장은“한국영화의 파노라마는 우리가 지난 15년간 계속한 영화의 세계일주 가운데 특별히 기다렸던 단계다. 그건 몇 개의영화제를 통해 한국영화를 볼 수 있었던 특권자들을 뺀다면우리나라에서 오늘날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영화의 예외적인 발굴을 뜻한다. 이번 한국영화의 오마주는 정확히 말해 한국의 문화 전체에 바치는 평행의 오마주다”라는 말로 한국영화회고전을 기획한 동기를 밝혔다(퐁피두센터의 인터넷홈페이지 글 인용).더불어 파ㅆㅔㄱ이 왜 <서편제>를 개막식 영화로 초청했는지를 여기서 잠깐 얘기하겠다. <서편제>는 잘 알려지다시피 2백 20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그 당시 한국영화 사상 최대의 흥행작이었다. 그 뿐 아니라 <서편제>는‘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후 해외, 특히 할리우드 영화 수입의자유화로 심한 경제적 침체기에 처해있던 한국영화계에 힘을 북돋아주었고, 대중음악에 눌려 시들어가는‘판소리’를다시 살려낸‘우리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국민의 영화’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편제>는 장인으로서의 임권택 감독의 창작 실력이 빛나는 수작이었다. 그럼에도 <서편제>는 93년 칸의 경쟁부문 선정에서 예상을 빗나가 탈락됐다. 물론 탈락 소식은 한국영화계에 심한 허탈감을 줬고 이들의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남겼다.그런데 <서편제>를 아주 잘 본 파ㅆㅔㄱ도 칸의 심사위원들결정에 실망했다. 파ㅆㅔㄱ한테서들은말인데,“ 칸선정위원들대부분은 서구 밖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영화를 판단하기 때문에 그 같은 큰 실수가 나오는데, 나는 임권택 감독을 위한 연대의식에서 그리고 칸심사위원들의 무지를 들춰내기 위해서 <서편제>를 개막영화로 결정했다”고 하면서 칸 영화제의 문화적 편견을 신랄히 비평했다. 파ㅆㅔㄱ은 한때‘자유의 라디오’에서 세계음악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한국의 전통음악과 가까워졌다. 그가 <서편제>를 잘 본 것도 그의 한국 전통음악과의 오랜인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주목 받는 한국영화회고전
미테랑 대통령의 1993년 한국방문을 계기로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관계가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회고전(La Re、trospective du Cine、ma Core、en)은 두 나라의 본격적인문화교류를 상징하는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행사였다. 행사는 준비기간만도 3년이 걸렸다. 퐁피두센터 측에서는1992년 르 몽드, 리버라시옹 등의 일간지와 TV, 텔레라마의 기자들을 미리 한국에 보내 한국영화계에 대한 취재를하게 했고 퐁피두센터의 영화부의 실비 푸라, 푸른느 앙글레어 두 프로그래머들도 1992년 한국에 파견하여 진흥공사와 영상자료원의 실무자들과 영상자료 준비에 대한 협상을 마무리했다.그리고 파ㅆㅔㄱ 위원장은 1992년 페사로국제영화제서의 한국영화회고전을 성공시킨 페사로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아드리아노 아프라에게 영화선정을 완전히 맡겼다. 파ㅆㅔㄱ은 귀의 질환으로 의학상 먼 거리의 비행기 여행은 할 수 없는 처지여서 스스로 한국에 갈 수 없었다.아무튼 아프라는 페사로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회고전의준비로 1991년 필자와 함께 한국에 들어가 5주 동안 영화진흥공사와 영상자료원에 머물면서 50여 편의 영화를 볼수 있었다. 그 가운데 30편이 페사로국제영화제에서 보여졌는데, 모두 60년대 이후부터의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파ㅆㅔㄱ 위원장의 부탁을 받고 다시 한국에 가서40~50년대의 고전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두 번에 걸쳐 그가 영화진흥공사와 영상자료원에서 본 영화는 150편으로, 그 가운데서 85편이 퐁피두센터의 회고전 작품으로선택됐다. 페사로국제영화제 보다 55편이 늘어난 셈인데,그리하여 퐁피두센터의 한국영화회고전은 그때까지 해외에서 있었던 회고전 가운데 가장 큰 행사였으며 그와 더불어아프라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영화의 전문가로 떠올랐다.아프라는 퐁피두센터의 회고전 책자(Le Cine、ma duCore、en)의 입문에 한국영화의 연구결과에 대한 그의 소감을 썼는데 일부를 여기에 인용하자면“서구는 생산력이 풍부한 한국영화를 너무 오랫동안 소홀히 해왔다. 나는 영화생산국 가운데 아마 마지막 보루로 간주될 수 있는 미개척의 영역을 발굴했다. 나에게 주워진 특권을 즐기면서도 내가 성취한 작업은 필수적인 첫 걸음에 불과하다는 인상을지울 수가 없다. (…) 한국영화의 역사는 한국인들에게조차잘 알려지지 않았다. 기성세대의 평론가나 영화사가 남긴글들은 검증되지 않은 채 전해지고 있는데 이 면에서 젊은영화사 학자들의 노력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페사로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회고전과 아프라 집행위원장에 대해 관심 있는 독자는 <문화저널>의 4월호에 자세히 쓰여 있는필자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이제부터 회고전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85편을 제작연대기에 따라 쓰자면 40년대 작품 2편, 50년대 5편, 60년대16편, 70년대 7편, 80년대 35편, 90년대 20편이었는데,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은 40년대의 <자유만세>(최인규 감독 1946)와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이었다. 그리고 50년대는 <양산도>(김기영 1955), <피아골>(이강천1955), <자유부인 2>(한형모 1956), <지옥화>(신상옥1958)이다.한국영화사의 전문가들은 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말까지를 한국영화의‘황금시대’라 부른다. 아프라는 이 시기에제작된 142편 가운데 29편을 골라보고 그 가운데서 21편을 뽑았다. 지면상 21편을 다 쓸 수는 없고, 그 중에서 주요작품을 말하자면 <하녀>(김기영 1960), <오발탄>(유현목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마부>(강대진 1961), <갯마을>(김수용 1965), <남과 북>(김기덕1965) 등이다.그리고 70~80년대는 군정부의 심한 영화검열과 1986년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실현된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문제 등으로 한국영화는 영화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맞았었다. 그 결과 섹스 테마의‘호스티스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김호선 감독의 1975년 작 <영자의 전성시대>와1977년의 <겨울여자>가 그 예다. 그런 반면에 기성세대의유명감독과 새로 영화계에 들어온 젊은 세대 감독들의 역작이 어려운 제작 조건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영화제에서 크게 주목을 받으며 한국영화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았다. 예를 들어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 <장마>(유현목 1979), <만다라>(임권택1981), <장남>(이두용 1985)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장호 1987), <칠수와 만수>(박광수 1988),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1989)들이다. 다만 60년대이후부터 52편의 영화를 만든 한국영화의 대표작가 이만희감독이 1975년 <삼포 가는 길>의 후반 녹음작업 도중에45세의 나이로 갑자기 타계하여 영화계의 전체에 큰 충격을 줬고, 그의 프린트마저 많이 사라져 영화사 연구에 큰구멍을 냈다.90년대는 민주화의 진보에 힘입어 검열제가 없어지고 아시아의 위기로 수입영화가 뜻밖에 줄어들자 국내영화 제작에 투자를 하는 기업들이 나타나 제작활동과 조건이 전에비해 훨씬 나아졌고 자질 높은 젊은 감독들의 출현으로 영화계는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남부군>(정지영1990),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첫사랑>(이명세 1993) 등인데, 임권택 감독의 1992년작 <서편제>로 퐁피두센터의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참고로,‘ 93 한국영화회고전’은퐁피두센터, 프랑스한국문화원, 한국영화진흥공사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이 주관했으며 후원처로는 한국의공보처, 문화체육부 그리고 국제교류재단이었다. 퐁피두센터에서 상영되는 85편 영화는모두 프랑스어로 자막이 돼 있었고, 회고전의 프로그램은93년 10월 20일부터 94년 2월 21일까지 4개월에 걸쳐진행됐다. 그리고 상영은 1주일에 18회를 기준으로 총 340회 유료 상영됐었다. 회고전을 위해 특별히 발간된 책자는‘LE CINEMA COREEAN(191장)’,‘ 한국영화70년사’등이었다. 전자는 90년대 초의 대표적 평론가들의 글이 포함된 단행본이다.참고서 얘기가 나와 하는 소린데, 파ㅆㅔㄱ 위원장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백과사전『라 루쓰』의 영화사전(La Rousse,Dictionaire du Cine、ma) 편집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사전에는 임권택, 이두용, 배창호 감독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한국의 감독 숫자를 생각하면 너무 적지만 그것도 파ㅆㅔㄱ이 라 로셀국제영화제에서 감독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얻어낸 정보를 가지고 쓴 것이다. 물론 파ㅆㅔㄱ은 더 많은 한국감독들을 소개하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영화계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
한국에 영화매체가 소개된 건 1919년이다. 단성사의 연속극인 <정의의 복수>의 무대 배경으로 떠오르는 10분짜리 영화장면이 한국영화의 첫 모습이었다. 그러나 엄격히말해 한국에서 나온 첫 영화는 1926년 나운규 감독이 만든<아리랑>이다. 한국의 불행한 근대사처럼 한국영화사 또한 일제의 식민주의와, 해방 후의 혼란기, 6.25 동란, 군정권의 독재정치 등으로 정상적인 발전이 어려웠고 어렵게 만든 영화들마저 숫한 격변기를 거치면서 수 없는 영상자료들이 파괴되고 사라져버렸다. 거기에다 영화제작과 배급사들의 프린트 중요성에 대한 무책임과 인식부족으로 사태는 더욱나빠졌다. 노장감독들의경험담을들어보면,“ 60~70년대까지도 일단 상영기간이 끝난 영화는 아무렇게나 넣어두었고 심지어는 헌 필름을 뚝뚝 끊어 밀집모자의 끈으로쓰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아무튼, 페사로국제영화제와퐁피두센터의 한국영화회고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풀기 어려운 문제로 떠오른 것은 프린트 부재였다. 특히 한국영화사의 컬트 감독으로 대접을 받던 이만희와 김기영 감독들의 숫한 영화들이 사라진 건 한국영화사의 큰 불행이다. 그런 와중에서 조성장 한국문화원장은 퐁피두센터의행사에 출품됐던 영상자료원의 새 프린트 57편을 빌려 쓴다는 조건으로 문화원에 남게 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흐지부지 됐고 프린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밝혀지지 않고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90년대부터 정부와 영진위원회그리고 영상자료원에서 공동으로 잃어버린 한국영화를 찾기 위하여 계속 노력을 해왔다. 퐁피두센터의 회고전을 앞두고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을 찾기 위하여 한국과 프랑스 정부가 같이 노력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다. 한때는“한 일본인이 원형을 가지고 있으나 어느 협상도 거절한다”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가 죽은 뒤 헛소문이었다는 게밝혀졌다.그러나 발굴작업은 헛되지 않았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는 발굴영화는 모두 16편이다. 1993년에서 2003년까지 러시아 국립 아카이브 고스필모폰드에서 찾은 6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총후의 조선>(조선총독 1937), <조선 우리의 후방>(조선총독부 1940), <조선의 애국일>(조선총독부 1940), <조선실록>(조선총독부 1943), <조선시보제11보>(조선영화주식회사 1945년경), <한 성심의 힘>(조선영화주식회사 1935년 경)이다.또 2004년에 발굴한 4편의 극영화는 <집없는 천사>(1941년 최인규 감독), <지원병>(안석영 1941), <군용열차>(서광제 1938), <어화>(안철영 1939)이다. 그리고2005년의 발굴영화 3편은 <반도의 봄>(이병일 1941), <조선해엽>(박기채 1943), <미몽>(양주남 1936)이다. 그리고 영화장면에 속하는 두 편은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이익·오카노 신이치 1939 8분)와 <심청>(안석영 193713분)이다. 2006년에는 <병정님>(방한준 1944) 한 편이있다.끝으로 퐁피두센터의 회고전에 올랐던 40년대의 두 편도 발굴영화에 속하는데, 최인규 감독의 1946년 작 <자유만세>는 1985년에, 윤용규 감독의 1949년 작 <마음의 고향>은 해방 이후의 초기 작품들이다. 후자는 파리에 살고있는 교민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16mm인데 2005년에35mm 프린트를 다른 데서 또 찾았다. 앞으로 프린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1996년부터‘법정납본’의 규율에 따라 제작자들은 새 영화의 초판을 영상자료원에 보관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이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퐁피두센터 회고전의행사일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신 영상자료원의박진석 기획부장님 그리고 발굴영화에 대해 정확한 작품명과 발굴연도를 알려주신 영상자료원의 영화사연구소 연구부의 연구원 정종화 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