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 |
장미영·전흥남의‘꿈꾸는 노년’
관리자(2010-09-03 14:20:08)
장미영·전흥남의‘꿈꾸는 노년’
노년의 삶과 사랑 - 박완서의『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경우 -
- 전흥남 한려대학교 교수
노년기에 접어든 작가 스스로‘노년’의 삶을 소재로 삼아 좋은 작품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완서 역시 진즉부터 어느 작가보다도 노년의 삶을 다양한 울림과 폭으로 확산하고, 또 노년이 안고 있는 문제의식을 노년의 삶이 녹아든 형태로 자연스럽게 부각시켜 놓은 대표적인 경우다.박완서의 소설집『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수록된 소설의 면면을 보면 오늘날 노년의 삶과 노인의 당면문제를 갈피갈피 오롯하게 잘 부각시키고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그의 소설은 넉넉한 웃음과 폭넓은 일상성에 대한 여유로움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박완서는 한걸음 나아가 칠순에도 첫사랑은 시작된다는 노년의 오롯한 사랑의 맛에도 담금질하고 있다. 자유, 그리고 무한한 삶의 바탕에 그 누구도 항변하지 못하는 노년의 사랑을 형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표제작「너무도 쓸쓸한 당신」, 「마른 꽃」을 통해 노년의 삶과 사랑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박완서 소설 속 노년의 사랑
두 작품의 살펴보는 과정에서도 드러나겠지만, 박완서의 소설은 노년의 삶이 젊은이와 똑같이 온갖 감정이 고스란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나이와 체면이라는 허위적의식에 의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추어야 하는 인생에 대한 재발견을 시도하면서 인생의 황혼기에 맛보는 삶의 숨겨진 진실을 다루고 있다. 이런점에서 박완서의 연륜은 늙음에 대한 막연하고도 그릇된 공식을 깨뜨린다는 점에서 OPAL족1) 과도 상통하는 측면을 지닌다.「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소설집『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표제작으로 바람직한 노년의 부부상을 역설적으로 암시받을수 있는 작품이다. 결코 단란하거나 의좋은 부부가 아니었던아내와 소학교 교장으로 명예 퇴직한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아이를 핑계 대며 사실상의 별거생활을 한 사이이다. 자연히남편과 아내는 본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몸을원하거나 그리워하는 일을 안 하게 되었고, 하다못해 스킨십조차 없는 완전히 남남인 사이다. 아내는 아들의 졸업식 날사돈 앞에서 모멸감을 느끼고 충동적으로 교외에 나갔다가쉬기 위해 들른 모텔에서 속옷만 입고 자는 남편의 하체를보며‘혐오스러움’을 느낀다.욕실에서 나오는 남편을 돌아보다가 그녀는 에구머니, 소리를 지를 뻔하게 놀라면서 얼굴을 돌렸다. 팬티만 입은 남편의 하체가보기 흉했다. 넓적다리에 약간 남은 살은 물주머니처럼 축 처져 있고, 툭 불거진 무릎 아래 털이 듬성듬성한 정강이는 몽둥이처럼 깡말라 보였다. 순간적으로 닭살이 돋을 것처럼 혐오스러웠다. 징그러운 것하고는 달랐다. 징그럽다는 느낌에는 그래도 약간의 윤기가 있게 마련인데, 이건 군더더기 없는 혐오 그 자체였다. 살을 대고 산 적이 있는 부부 사이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딕표시-인용자, 172-173쪽)주인공은 남편이 시골학교 교장인 탓에 떨어져 살다가 아들의 대학졸업식에서 오랜만에 만난 초로의 부부다. 아내는 졸업식에서 안사돈에게 은근한 모욕을 당하고, 매사 멋대가리라고는 없이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남편에게 괜한 경멸감마저 가진다. 심지어 남편의 말라빠진 정강이를 그저 냉담한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인용문에도 드러나고 있듯이, 가까이에서 본 정강이에는 무수하게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 있었고, 거기서 드러나는 지나치게 초라하고고달픈 살림살이 속에서 그녀는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마냥 얽매여 있으려는 남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슴 깊이이해하게 된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몸’의 만남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 때 몸의 만남이란구체적인 욕망이라거나 욕정이 아니라 신체적 접촉을 통한사람과 사람사이의 또 다른 만남을 의미한다.2)‘몸’은 때로정신이 알아차리거나 미처 숨기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삶의흔적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기도 하고, 열 마디 말이 전해주지 못하는 따스함과 애정을 전해주기도 한다. 아내는 남편의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게 되고, 그 몸에 대한 생경함을 통해 그들 사이에 완전히 부재했고, 앞으로도 가능할것 같지 않은 둘 사이의 소통을 확인한다.그런 의미에서 남편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행위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의 정서적 화해라기보다는 아내가 여지껏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외로움, ‘이물스러운’늙음이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곧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를 테면, 성적 욕망이 피어나는 젊은‘육체’가 아니라 삶의 흔적들이 그대로 묻어 있는 노년의‘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남편을 무시한 세월이 나이 들어 후회스럽거나허전함을 느끼지 않도록‘몸의 만남’을 단절시키지 않아야한다는 아내의 자각에서 노년을 위한 삶의 한 자세를 읽을수 있다.
달콤한 노년의 연애 그러나 잔인한 육체의 진실
한편, 「마른 꽃」(1995)과 같은 작품에서 노인들의 연애심리를 그리는 박완서는 칠순을 바라보는 현역으로서홀로된 60살 어머니의 연애사건 이야기를 한다. 대구에서 치러진 조카 결혼식에 고모라고 한복 벋쳐 입고 갔던 내가 환갑 나이에 늙은이 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스산하게 움직이는 이야기다. 부모가 안계신지라 폐백을 생략했다는 바람에 입고 간 한복도 무색해지고, 먼 데서 온 고모에게 자고 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거의쫓겨나는 기분으로 기차역에 온 나는 표가 없어서 고속버스터미널로 가 거기서 겨우 표 한 장을 구해 서울로 오게 된다.이때 버스 옆자리에 앉은 멋진 신사와의 로맨스가 시작되는것이다.그는 멋쟁이일 뿐 아니라 체중 관리도 잘한 것 같아 배도 안나오고 다리고 길고 거름걸이는 여유 있고도 늠름했다. 고속버스 안에서 남들 자는 동안 이들은 젊은이들처럼 재잘대는그 모든 짓거리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사는 곳도 같은 방향이라 그들의 만남은 이어지게 된다.그와 만나면서 세상의 곳곳이 새로워 탄생을 지르기도 하고열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깡총거리며 스스로 자신이 경박하면서도 예민한 탄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자신 속에서 느끼는 경박한 즐거움은 유희의 기쁨 같은것이었다. 해가 바뀌자 회갑기념으로 미국지사에 있는 큰 아들이 여행하자는 전화가 오고 나는 모든 제의를 거절한다.회갑이란 본인에게만 고약한 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더 고약하게 돼있나보다. 순순히 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 않자 그럼 잔치를 하고싶은가 알고 싶어 했고 그도저도 아니란 걸 알자 속마음을 알고 싶어 안달을 했다. 나도 모르는 속마음을 저희들이 무슨 수로 알겠다는 건지, 속으로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기분이 좋기도 했다.(36쪽)“친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가 모르고 있는 걸 못 참아”하는딸이 엄마의 사건을 알게 되고, 딸애의 입에서‘그 늙은이’가‘조박사님’으로 변하면서 그의 며느리와 딸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재혼 말이 오가게 된다. 그 며느리는 홀시아버지를 모시는 게 힘들 때마다‘자원봉사 하는 셈친다’고 해서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지만, 순간적인 분노와 연민으로 중요한 (재혼)문제를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재혼 말이 커지면서“이 에미는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에는“엄마가재혼해도 돌아가시면 아버지하고 합장해드릴게 염려마세요”라는 식의 반응이 올 정도다. 딸의 반응을 통해서 마음의 행적을 돌이켜 보니 남편을 좋아할 때에는 정열이라 해도 좋고정욕이라 해도 좋은 그 어떤 것이 있었으나 지금 조박사를좋아하는 마음에는 그게 없었다. 연애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 있었다.나는 그와 그럴듯한 겉멋을 부려본데 지나지 않았나보다. 정욕이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빠안히 모든 것이 보였다. 아무리멋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닥칠 늙음의 속성들이 그렇게 투명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데나 터는 담뱃재, 카악 기를쓰듯이 목을 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 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댔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제 입 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된 끝없는 잔소리, 백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너무도 뻔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은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 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재고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고딕표시-인용자, 43-44)앞에서 살펴본「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결말부분과도 여러면에서 연관된다. 노인의 연애감정 역시 애틋하고 절절함은젊은이들 못지않건만 불쑥불쑥‘짐승스러운 시간’을 함께해 남편에 대한 생각과 회한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나의 거절에 그의 며느리는 더 이상 수발을 들 수 없어서 배고픈 할머니나 한 분 모셔올지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그를 마지막으로 만나 아들에게 갈 거라며 작별을 고한다.여기서 노인의 결혼이라도 단지‘함께’라는 의미 이상의 어떤 것, 욕망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3) 동시에 작품에서주인공이 먼저 죽은 남편의 무덤 옆자리로 들어갈 생각을할 때면, 현실의 그 어떤 기쁨과 슬픔도 침범하지 못할 깊은평화를 느낀다고 토로하는 데에서도 죽음에 대한 긍정도 엿볼 수 있다.
노년은 참으로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온다
「마른 꽃」의 할머니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앙큼한 소녀취향이 주책스러우면서도 밉지 않았고, 「너무도 쓸쓸한당신」은 사돈집에 뒤지지 않으려는 반발심이 엉뚱한 곳으로 튀는 것도 전혀 흉물스럽지 않고 오히려 속 빤히 들여다보이는 장난을 천연덕스럽게 치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다. 노년의 사랑을 적나라하게그리면서 노년의 심리와 젊은이들의 이기주의가 일상의 삶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란 서정적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노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짐승 같은 정욕의 세월을 함께 나누어진 노년의정 같은 사랑이 우선임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노년의 남녀관계를 더욱 따사롭게, 그리고 차원 높게 심화시키고 있는 소설이다.노후는 세상에서 비껴 난 한가로움이 아니라 그때도 무엇을시작할 수 있는 설렘과 사랑에 대한 두근거림이 남아 있을수 있다. 노년은 참으로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온다.
chn00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