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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 |
[내인생의멘토] 황병근 선생과의 인연
관리자(2010-09-03 14:20:33)
내인생의멘토  황병근 선생과의 인연 세월 잊은 열정, 세상을 배웠다 - 류장영 전북도립국악 관현악단 단장 황병근 선생님. 나는 이 분을 이런 호칭으로 불러본 적이 없다. 1988년 처음 그 분을 만난 이후로 늘 직함을 뒤에 붙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립국악원 생활 23년 동안 내가 나아가야할 큰 지침을 정해주셨고, 또 언제나 본분을 다하도록 한결같이 채찍질과 격려를 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 그리고 사람을 뽑고 조직을 운용하는 법과 세상살이의 이치와 묘미에 이르기까지참으로 많은 것을 깨우쳐 주셨다. 지금의 내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나은 구석이 있다면 이는 오직 그 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니,당연히 내 인생의 멘토로서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분이며, 이제 여기 이 지면에서나마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불같은 추진력 황병근 선생은 고창 태생으로, 조선 후기 호남실학의 거목 이재 황윤석의 7대손으로 당대의석학이자 서예가였던 석전(石田) 황욱(黃旭,1898~1993)의 셋째 자제로 태어났다. 사상과이념의 충돌이 빚은 불우한 청년시절을 지나면서도 학문(書)에 정진하였으며, 예(醴)를 숭상하고, 음악과 더불어 즐거움(樂)을 누릴 줄 알았다.1984년 국악협회를 통해 처음 국악계와 인연을 맺은 후, 불과 2년 만인 1986년 7월 1일,전북도립국악원을 개원시키고 초대 원장으로취임하였다. 그 산고의 고통을 어찌 다 말할 수있으리요. 이를 통해, 천대와 배고픔에 시달려왔던 전통예술가들에게 떳떳한 지위를 주고 나아가 그들이 당당한 직장인으로 생활할 수 있게하였다. 당시 무형문화재 분들도있었지만, 대부분 이곳을 거쳐가는 동안 문화재가 됐다. 개원 이듬해인 1987년 연구단을 발족하고, 또그 이듬해인 1988년에 창극단, 관현악단, 무용단을 발족시킴으로써, 개원2년 만에 교육-연구-공연의 삼위일체식 종합전당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그 어떤 지역에서도 해내지 못한 커다란 업적인데, 이러한 일이 가만히 앉아있어도 누군가 차려줄 밥상일리 만무하잖은가. 꺼지지 않은 열정 1995년 6월 5일 국악원 퇴임 후에는 제 5, 6대 도의회 의원, 그리고(사)우리문화진흥회 이사장, 전북예총회장, 에버그린밴드 단장, 성균관 유도회 전북본부장 등을 맡았는데, 선생의 일에 대한 열정은 꺼지지 않는 용광로와 같아서 그저 감투나 쓰고 가만히 앉아 자리만 보전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1997년에는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자료들과 석전 황욱 선생의서예작품 등 도합 5,200점을 국립전주박물관에 기증했다.생사사생(生事事生) 성사사성(省事事省)이라, 일을 만들면 또 일이 생긴다는 말과 같이 선생은 늘 새로운 일을 만들어냈고, 또 그 새로운 일들을통해 삶의 활력을 얻었다. 그는 결코 좌절한 적이 없으며, 일을 하다가 만나는 저항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다. 그래서 간혹 너무 강하다는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이는 선생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해 생긴 오해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어려워 하지만, 그만큼 순백한 영혼을찾기도 어렵다. 나는 선생에게서 어린애와 같은 천진난만한 모습을 많이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순수한 영혼과 오로지 일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이해하고 나서야 선생과의 만남이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현재 선생이 거주하고 있는 한옥마을을 찾아막걸리판을 벌인 적이 있다. 그날 무려 4차에 걸친 막걸리집 순회에서 뿜어져 나온 선생의 열정과 격조 높은 이야기들은 사뭇 감동적이었으며, 그날 회동처럼 즐겁고 유쾌한 자리는 없었던 듯하다. 순수하고 꺼지지 않은열정으로 일관된 선생의 삶은 이리 저리 눈치만보며 애늙은이처럼 살아가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다. 적재적소의 인사 ‘인사가 만사’라고 한다. 크게는 나랏일을 하는 사람부터 아주 작은 단체의 소소한 자리에이르기까지 사람을 쓰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선생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인사를참으로 공명정대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투명한인사, 능력위주의 인사, 적재적소의 인사, 미래에 투자하는 인사 등이 그의 큰 장점이었다. 예를 들어, 예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기능을 지닌 사람이라도 가르치는데(교수실) 적합하지 않으면 본인과 주변에서 아무리 원해도 발탁하지않았다. 선생의 퇴임 이후, 그런 부류의 인사가교수실로 옮겨 근무하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은 직장을 그만두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또한 <춘향전>과 같은 큰 공연을 하면서, 비록지명도가 높지 않더라도 장래성 있는 내부인을발탁하여 스타급 예술가로 키워내기도 하였다.선생은 문화전문 CEO이다. 그는 휘하의 인적자원에 대한 완벽한 정보와 뛰어난 판단력으로 상대가 어느 곳에 있어야만 자신의 능력을십분 발휘할 것인지 단번에 구분해 냈다. 나의경우, 처음에는 창극단에서 근무하였으나, 어느날 집무실로 불러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산조와 재즈와의 상관성을어떻게 보는가?’, ‘전라북도 향토음악의 미래를 위해 무슨 일이 필요한가?’와 같은 주제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새롭게 복구된 연구실의 연구원으로 발령이 났다. 나는 사령장을받을 때까지도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이 일로 그 흔한 저녁 한번 제대로 대접 못했으나 지금껏 그 일로 서운해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참 잘한 인사였다며 두고두고 흐뭇해 하셨다. 당시 나는, 평소 시간 나는 대로 판소리를 오선보로 채보하고, 관심 있는 분야의 이론책을 읽고, 또 나아가 서툴지만 편곡도 조금씩 시도하곤 했는데, 이런 일들을 어느새 꼼꼼히 눈여겨보셨던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도모르게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는데, 이러한 결단은 앞으로도 아마 선생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 또한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 인사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공정하며 조직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원칙을 정해 해나왔다고 자부한다.흥어시(興於詩) 입어예(立於禮) 성어락(成於樂). 말 그대로 시로 흥하고,예로서 서고, 즐거움으로 이룬다는 것이나, 이는 공부하고, 예를 갖추며,그런 연후에 음악과 같은 미학적 세계를 통해 비로소 인간이 완성된다는것이리라. 도립국악원 예술단 초기의 생활은 선생에 의해 이 세 가지를 모두 하나씩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제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품성에 문제가 있으면 중용하지 않았으며, 비록 초라한 대우에 힘든 생활이었지만, 누구든 직분을 다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도 모르게 인정받고 대우받던시절이었다. 대범함과 큰일하기 가끔 선생이 거목처럼 크고 태산처럼 높게 느껴진다. 요즘도 지역과 중앙언론에 선생의 글이 실리는데,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물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놀랍기만 하다. 선생은 깊은 지식뿐만 아니라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어느 자리든 당당하다. 이런 면에서, 경행록의‘좌밀실(坐密室) 여통구(如通衢)하고 어촌심(馭寸心) 여육마(如六馬)하면 가면과(可免過)니라’는 말이 바로 선생이 추구해온 삶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밀실에 앉아 있더라도 큰 거리를 통하듯이 하고, 작은마음을 다스리기를 여섯 말이 끄는 수레와 같이 하기 때문에, 많은 일을만들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딪히지만 결국은 허물을 면하게 되는 게아닌가 말이다. 벌써 내일모레면 여든 살인 연세지만 선생은 아직도 건재하며 순수하며 일에 대한 열정과 번뜩이는 안광도 여전하시다. 다만 바라기는, 오래도록 건강하셔서 후배들에게 변함없는 삶의 지표가 되어주시고, 훌륭하신 사모님과 더불어 늘 평안하고 행복한 여생을 즐기시길 빌 뿐이다. 류장영 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전북도립국악관현악단 단장과 지휘자로 활동 중이며, 국악실내악단‘소리고을’의 음악감독이기도 하다.전통음악극 <그리운 논개> 등 여러 곡을 작곡했으며, 저서로는『전북의 민요마을』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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