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 |
[명인명장] 완제 시조창명인 - 박인수
관리자(2010-10-04 18:37:46)
완제 시조창명인 - 박인수
춘광(春光)이 90일인디 내가 꽃 볼 날은 얼매며…
이번 호‘명인명장’에서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4호 완제 시조창 명인 박인수(91) 선생님을 만나봅니다. 시조는 지역적 특징에따라 구분을 하는데요. 서울·경기 지역을 경제(京制), 전라도를완제(完制), 경상도를 영제(嶺制), 충청도를 내포제(內浦制)라고 부릅니다. 완제 시조창 보유자는 임산본, 오종수, 박인수 선생을 손꼽는데요. 다들 연로하셔서 인터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9월 10일 제자발표회를 가진 박인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긴 인터뷰를 힘들어하시는 관계로 이번 호 명인명장 인터뷰는 분량이짧습니다. 그러나 살아온 연륜마저 짧은 것은 아니지요.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인생의 맛과 시조창의 멋, 편안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보십시오.
박인수 명인 걸어온 길
1920년 부안군 상서면 용서리 출생
20살 무렵 정경태 선생께 시조창 사사
1951년 전주로 이사하여 설명규 선생께 사사
전주 동초등학교 앞에서 시조창 시작
1967년 ‘시우회’모임 발족
1973년 제1회 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 개최
1984년 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 을부 금상 수상
1987년 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 갑부 금상 수상
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 특부 금상 수상
1988년 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 명인부 금상 수상
1993년 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 국창부 금상 수상
노송시우회 사범으로 활동하며 제자 배출
1997년 노송시우회 회장 취임
2000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4호 보유자 지정
2003년 시조해설집『청산은 어찌하여』발간
2006년 시조창 주민교육 실시
현재 45명의 문하생과 함께 노송시우회 회관에서
시조창 전수에 전념
고향이 부안이여. 부안군 상서면 용서리. 거그서 한 오리 거리에 정경태(*시조창 명인) 선생이 살었어. 아침에거그를 다녀오면 조반 먹기 좋을 만큼 딱 그 거리였어. 정경태 선생이 가찹게 사니까 늘 댕기면서 왔다갔다 함서부르시는 것을 봤제. 그것이 참 그렇게 좋아 뵈더라고.그 분한테 찾아가서 혼차 배운 것은 아니고 그 분이 부안읍에 가서 사람들 모아놓고 지도를 했어. 거그서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고 그랬지. 주서 배왔죠. 그때가 한 이십대는 되었을 거여.본격적으로 시조를 배운 것은 내가 전주로 이사를 와서배웠지. 그때는 어깨 너머로 듣기만 허고 그 모습이 불거만 뵈었지. 나는 그냥 농사짓고 살었어.글다가 인공 때 부안 변산 밑이 하도 위험해서 전주로이사 왔어. 그때가 나이 사십대 때요. 그 후론 지금까지전주에 살고 있지.
논두렁에 걸터앙거서 시조 한 자락씩 허고
원래는 악보가 없었는디 그 정경태 선생님이 보를 맨들았어. 맨 처음에 헐 때는 악보가 세로로 내려가 있고 박도3·5박으로 했어. 처음에는 3박, 그 담엔 5박, 글했는디, 정경태 씨가 전부 새로 재정리를 해가지고 악보를 내놨습니다.그러고 인자 5·8박으로 보가 나왔어요. 그 뒤부텀은누가 쌈을 못허죠. 그 보가 안 나왔을 때는 한마디로 명주실맹이로 빼고 나가는 사람이 자기가 잘 헌다 그러고, 또어떤 사람은 그것을 못 헌다고 그러고 그런 쌈을 했는데…. 정경태 선생 보가 나온 뒤부텀은 쌈이 막어져버렸어. 보가 전국적으로 통일이 되어버렸지.긍게 그 정경태 선생이 참 대단허신 분이요. 대단허고 말고. 원래 부안 주산면이라고 거그 살었어.그때만 허드라도, 우리가 부안 살 때만 허드라도, 농부들이 논을 호미로 지심 매는 것 있잖아요? 그럴때 새참만 되면 논두렁에 다들 걸터 앙거서 시조 한 자락씩 허고 새꺼리 먹고 또 논에 들어가서 일허고그랬어요. 그러케 흥성허든 것이 사실은 이리케 인자 펜이 되아베렸죠.
국창만 일곱 사람을 배출을 했응게
나는 설명규 씨헌테 사실 많이 배운 사람이요. 여그 전주 와서 본격적으로 배울 때 설명규 씨헌테 많이배왔죠. 우선 먹고 살랑게 농사도 몇 마지기 지었지만은 주로 시조대회 나가고 설명규 씨헌테 배움서 살았죠.그 선생님 밑에서 사범 노릇험서 제자들을 많이 배출을 했습니다. 국창만 일곱 사람을 배출을 했응게.나는 근 오십 다 되아서 전국대회에 나갔지.내가 첨에 전주에 들왔을 때 저~짝 인후동에 살었는디 현관문을 열고 보면은 앞산이 유씨네들 선산이여. 그 선산에 소나무가 이런 놈들이 있었는디 날이 더운 때는 시내에서 사람들이 전부 그리 다 들어와.들어와서 솔그늘 밑에 앙거서 시조 같은 것을 허고 글드라고요.근디 인자 그때 쌈질을 해. 어떤 쌈이냐? 서로 모야서 실가락겉이 빼는 사람을 잘헌다 허고, 청이 좋은사람은 못 헌다 허고, 그런다고 서로 니가 잘했냐 내가 잘했냐 싸우는 거요. 입씨름이지. 그런디그 쌈이 정경태 선생 보가 나오면서 정리가 돼버렸지. 정경태 선생 보에 나온 율려 대로 혀야 잘한다고 허는 것이지. 긍게 목청이 좀 나뻐도 율려를 맞춰서 하면 그 사람이 잘헌 사람이여. 엿가락겉이 빼면서 그렇게 허면 더 잘헌 사람이고…. 명주실 겉이 잘 빼나가는 사람이 받기도 사실잘 받아요. 갈쳐보면은. 민요 같은 거 잘 빼고 허는 사람이 시조도 잘 받습니다.
시조를 했기 때문에 오래 살지 않능가
그래도 내가 시조를 허면 사람들이 잘 헌다고 그랬어. 사실 내 소리가 좋았고…. 그때만 허드라도 지금 겉이 소리가 탁헌 것이 아니라 청아헌 소리를 냈죠. 판소리는 통목으로 소리를 질러야는디 시조는 한마디로 엿가락 겉이 길게 빼서 허는 소리가 잘 허는 소리라고 해. 그러면 폐도좋아지고 호흡도 좋아지고 단전호흡도 되고 그러죠.시조창을 히보니까 첫채 호흡이 좋아지고 폐활량이 좋아지고…. 아매 내가 오래 살은 것이 사실은 시조를 했기 때믄에 이렇게 오래 살지 않능가. 머 성질 낼 일 없고 그런 것이 좋은 것이요.판소리도 있지마는 판소리는 계급이 낮츤 사람들, 하인들, 그런 사람들이 허는 것이고 그땟 당시만 해도 시조는 좀 선비계급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허는 것으로 알았단 말이요. 그런디 지금은 거꿀로 되았습니다. 판소리 허는 사람들이 돈도 잘 벌고…. 시조는 돈을 벌 수가 없어요. 제자들도 다 공으로 갈쳐요. 우린 돈 못 벌어.
죽는 사람 수를 채얄 텐디 채들 못허고
나가 1977년도에 노송시우회가 맨들어져서 지금까지 회관에 나가고 있는디 첨에 만원 내고 입회를 헙니다. 근디 연회비라고 허는 것이 5만 원이여. 긍게 6만원만 내면 회원이 되는 것이여.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도하고 밥도 먹고 그런 돈으로 쓰는 것이지. 사실은 아침부터 나가야 허는데 점심 먹기가 그래서 일단 점심 먹고 회관에 나가. 내가 나가서 문 열면 할매들이 나와. 선생이 먼저 문 열면 제자들이 나와. 허허 거꿀로 되았어. 다 무료로갈쳐. 배울 사람은 얼매든지 배와라. 플랑카드도 붙여놨어요. 그래도 안 와.그 회관 구하느라고 고생도 참 많이 했어요. 시에도 서류도많이 내고…. 그래도 아무 소용없어요. 시조허는 데 그르케돈을 안 쓰죠. 그래 결국 내가 회장을 허면서 그 집을 하나 샀어요. 2층집인디 회원들이 돈을 다 모아서 그때 돈으로 5천만 원 주고 집을 샀지.요새는 회원들이 많이들 나이가 자싱게 세상을 배리고 떠나. 그 배리고 떠난 수만큼 사람들이 들와야는디 사람은 안 오고 죽는 사람 수를 채얄 텐디 채들 못허고. 그다봉게 수가 많이 줄었어요. 그 전에 내가 첨에 시조 밸 때만 허드라도 한 사오십 명 그렇게 지도를했고 그랬는디 지금은 그렇게 못 되네요. 어저께 발표회 헐 때도 숫자가 적은 편이요. 발표회는 도에서 자본을 주는 게 허는 것이지 내돈 갖고 허는 것은 아니요.
춘광이 90일인디 내가 꽃 볼 날은 얼매며…
내가좋아하는시조?“ 청산은어찌하여만고에푸르르며유수는어찌하여주야에그치지 아니한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하리라”는 그 시조는 계절을 안 타. 한마디로시조에도 다 계절이 있어. 봄에 부르는 노래 있고 여름에 부르는 노래 있고 그러는데 이노래는 계절을 안 타니까 내가 많이 갈쳐. 그 시조가 꼭 좋아서가 아니라 그런 뜻이 있어.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조는“춘광이 90일인디 내가 꽃 볼 날은 얼매며… 인생이 백년인디 소년행락은 멧날인고… 두어라 공화세계니 아니 놀고 어떠리”허는 시조요. 시조 속에인생 이야기가 다 담겨 있어요.
첨에는 민요가 산뜩헌디 난중 지픈 맛은 시조가 더 있거등
제자는…. 내가 명인부가 되면서 젤 첨에 5년 동안 전수를 허게 되어 있어요. 5년 동안한 달에 10만 원씩 주고 전수를 허면 이수자가 돼. 그렇게 마친 사람이 둘 있어요. 젤 첨에 이수를 헌 사람이 김영희요. 목도 좋고 활동도 많이 해요.이수자들은 행사에 많이 나가요. 한옥마을에서도 관광객들이 차로 와서 공연와 달라그래요. 근데 그 사람들은 민요 겉은 거를 바래는디 이수자들은 민요보담도 시조창을 허고싶응께 민요 몇 곡 허고 난중에는 시조창을 해요. 그러면 인자 그 사람들이 들을적으 첨에는 민요가 산뜩헌디 난중 지픈 맛은 시조가 더 있거등. 긍게 난중에는 시조창을 더 좋아한다고.한번은 부안에서 교편을 잡는 사람들이 삼사십 명이 왔는디 부안에 정경태 씨가 살았는지도 모르고 매창이라는 분이 시조헌 것도 모르고, 그러니 그걸 교편 잡고 있는 사람들이라 허겄어요? 난중에 그 사람들이 겁나게 좋아하면서 반가워하면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얘기를 허드라고요.
목도 좋고 잘허는디, 지금은 못 갈쳐요
옛날에는 경기전 겉은 디서 시조를 많이 했어요. 경기전이 젤 시원헝게 나무 밑에 가면서로서로 모닥모닥 장기 두는 사람은 장기 두고 바둑 두는 사람은 바둑 두고 시조허는 사람은 시조허고 다들 그렇게 뫼아서 했죠. 지금은 그런 멋이 없어졌지. 나도 인자 나이 먹어서 걸음도 못 걷고 그렁게 안 나가봐서 몰르겄지만 우리가 배울 때 한창 적에는 선생님 모시고 나가서 시조도 허고 그랬어요. 시조창 무형문화재는 오종수 씨라고 나허고 동갑이요.그 분은 정읍 출생이고…. 나가 주민등록상으로는 22년으로 돼 있제만 실제로는 20년생이요. 글고 임산본이라고…. 그 분은 지금 요양원에 가 있어요. 목도 좋고 잘허는디, 지금은 못 갈쳐요. 정신이 왔다 갔다 허는 판이라. 그 이는 목도 좋고 그러는디 워낙 술을 많이자셨고 그런 탓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댐배는 안 허지만 술을 좀 합니다.
시조라도 했응게 이 정도라도 대우받고 살지
시조라고 허는 것은 선비들이 부르는 것인디, 나이가 젊어서는 돈 벌어서 가족들 멕여살려야지요. 그러나 사오십 뒤에는 정년해가지고 시조 배우면서 그렇게 히줬으면 고맙겄어요. 우리 회관에도 보면 교장으로 정년허신 분들이 많습니다.시조는 소질이 없어도 아무라도 배울 수 있어요. 잘 접기만 허면 배울 수 있어요. 소리를딱딱 내리는 것을 접는다고 허는디, 그걸 못 허고 마는 사람도 있긴 있어요. 존 녹음기 갖다 놓고 아조 배울라고 작정을 하고 달라들었는디 결국 꺽들 못 해서 못 배우고 말었어요.그런 분들도 있지만 주로 남자들이 그렇고 여자들은 다 잘해요. 자기가 잘만 받으면 한 달만에도 부를 수 있어요. 열흘 안에도 배와서 부를 수 있어요. 본인이 얼마만큼 노력허느냐에 달려 있지.우리 부회장으로 있는 양옥선 씨는 일흔 몇 살에 시조 배우겄다고 왔는디 어뜨케 노력을허든지 아침마다 도시락 싸가지고 와서 낮에 한 구절 숙제를 내주면 밤에 얼매나 연습을허는지 다음날 곧잘 허드라고. 그래가지고 국무총리상까지 받었습니다. 내가 시조라도 했응게 이 정도라도 대우받고 살지, 평생 농사짓고 살은 사람 누가 대우나 해 주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