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10-04 18:38:10)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토리노영화제의 젊음과 함께 하라
- 임안자 영화평론가
1993년 10월 말쯤에 토리노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코디네이터 안젤라 사볼디로부터 전화가 왔다. 낯이 설은 사볼디는 이명세 감독의영화 <첫사랑>이 토리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는 말을 꺼내면서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이라 도움이 필요한데 영화제에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끝에 가서 <첫사랑>은 페사로영화제의 아푸라 집행위원장이 추천했으며 내 전화번호도 그가 알려줬다는 말을덧붙였다. 전화가 올 무렵 나는 파리 퐁피두센터의 한국영화회고전개막식에 참가했다가 막 집에 돌아와 쉬고 있을 때였는지라 솔직히또다시 어디를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한국영화 해외증진에 남달리 애쓰는 아푸라 집행위원장의 부탁이었는데 거절하기가 힘들어 영화제에 가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토리노에서 만난 이명세 감독
그리고 11월 중순, 나는 바젤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밀라노를 거쳐 오후 늦게 토리노의 역에 도착했다. 영화제서 정해준 호텔은 다행히 역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어서 먼저 호텔에 들려 짐을 풀고는 주최자 측에 인사도 할 겸 영화제 본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름난 영화제였음에도 전용사무실 하나 없이 시내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는 지방문화단체의 건물 한 층을 영화제 기간 동안만 빌려 쓰고 있었다.백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큼직한 건물의 2층에 있는 비좁은 사무실 안은 영화제의 스태프와 국내외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그런 속에서 어렵게 사볼디를 만난 뒤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출구의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큼직한 포스터에서 <첫사랑>의 여주인공 김혜수가 휘둥그런 눈을 한 채나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그 모습이 아주귀여웠고 살가웠다.그날 저녁 나는 이명세 감독과 <첫사랑>을 만든 삼호제작사의 곽경희 해외담당자 그리고 그 밑의 여자조수를 만나 같이 저녁을 하는 동안 마치 오랜 친지처럼 한 패가 되어 <첫사랑>에 관한 홍보와 언론작업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눴다. 그 때까지 해외영화제에 한국의 영화제작사가 참가하는 걸 보지 못했다가 삼호제작사의 실무자들이 현지까지 와서 이 감독의 일정에 발맞추며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게 아주 신선했다.
토리노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의 영화제
토리노는 과거 사보이 왕가의 거주지였고 19세기 중반이탈리아의 국가통합운동 시기에는 한동안 이탈리아의 첫수도로 작용했었던 옛 도시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정치적 중요성을 잃었으나 그 대신 경제면에서 밀라노, 제노바와 함께 토리노는 이탈리아의 소위 3대 경제지대로 새롭게성장했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산업을 상징하는 피아트, 알파 로메오, 란차 등이 모두 토리노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피에몬트 지방은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의 북쪽에 자리한 토리노는 피에몬트 행정구의 수도로서 현재 약 2백만 인구가 살고 있다.문화면에서도 토리노는 전통적으로 문화, 교육, 예술의중심지였으며 그와 더불어 20세기 초에서 30년대 중반까지 이탈리아의 영화산업이 이곳에서 시작하여 꽃을 피웠다. 그러다 1937년에 무쏠리니의 결정에 따라 로마에 영화생산의 종합 스튜디오 시네시타(영화도시)를 지은 뒤부터는대부분 영화는 시네시타에서 만들어졌고 토리노는 영화도시로서의 명성을 로마에 빼앗겼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영화사적 초기 유물인 국립영화박물관은 오늘까지 여전히 토리노에 남아있다. 이 영화박물관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귀중한 영화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1993년 11회 때만도 레알레 궁정안의 치아물레세 궁에 들어있었으나2007년부터 토리노 시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유명한 건물몰레 안토넬리아나에로 옮겨졌다.토리노에서 영화제가 생긴 시기는 1982년이었으며 <젊은이의 국제영화제(Festival Internationale del CinemaGiovani)> 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영화제의 창설자는 토리노 대학의 영화학 교수이자 평론가인 쟈니 론돌리와 그의몇몇 친구들이었다. 한편 론돌리노는 대학 뿐 아니라 시의회의 청소년문제 상담실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젊은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상담소의 경험을바탕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조그만 영화제를 열었다. 설립목적은 국내의 젊은이들이 만든 순수 아마추어 정신의 독립영화와 비디오를 청소년 관객들에게 정기적으로 보여주자는 것, 즉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행사의 한 가능성으로 영화제를 착안한 것이며, 페사로국제영화제의 모토인‘새로운영화’(Cinema Nuova)를 본보기로 삼았다.그렇게 시작된 <젊은이의 국제영화제>는 1회 때 20편의 극영화와 100편의 단편 비디오를 가지고 막을 올렸다.그럼에도 결과는 상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다. 토리노지역 뿐 아니라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그런 추세는 해가 갈수록 더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이름난 영화평론가들이 토리노의 행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는 토리노에서 퐁피듀센터의 장-루 파ㅆㅔㄱ 관장을 다시 만나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평론계에대해 말을 하면서“오래 잠자던 프랑스 영화는 다시 부활의 조짐을 보이나 평론가들은 잠에 빠져있다. 그 반면에이탈리아 영화는 사실 죽어가고 있는데 이곳의 평론가들은아주 활동적이다. 이탈리아의 영화전문지『시네크리티카』와『시네마 포럼』을 프랑스의『카이에 듀 시네마』와 비교해보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평론 수준에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탄을 했다.아무튼 성공을 거듭하던 <젊은이의 국제영화제>는 설립4년 뒤에 감독의 첫 작품과 젊은이 주제의 장편영화를 위한 경쟁부문을 처음 열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주제와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는‘열린 공간’과 이탈리아 단편과 중편을 중점으로 한 경쟁부문의‘이탈리아 공간’이 따로 문을열었다. 그 밖에도 지역영화 중심의‘토리노의 공간’과 피에몬트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비디오 작품의‘열린 공간’들이 만들어졌고, 열리는 부문마다 성공을 하는 바람에 90년초에 가서 토리노국제영화제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정상의수준에 이르렀다.그런 사이에 1989년 창설자 론돌리노 뒤로 물러나고 알베르토 바베라가 집행위원장으로 뽑혔다. 바베라는 토리노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이탈리아의 이름난 영화평론가로서 론돌리노 집행장 밑에서 총무직을 거쳐 나중에 영화선정위원으로 있다가 집행위원장이 됐으며, 그가 취임하고 얼마 가지 않아 <젊은이의 국제영화제>는 이탈리아 영화계로부터 베니스 다음의 두 번째 우수 영화제로 공식 인정을받게 됐다. 알다시피 베니스국제영화제는 1932년 베니스의 유명한‘예술전시 비엔날레(1985년에 설립)’를 모태로태어난 세계 영화제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대규모의 영화제다. 그런데 베니스 보다 50년 뒤에 태어난 조그만 토리노국제영화제가 10여 년 만에 베니스 다음이 되다니, 영화사적인 기록이었다. 그것도 영화제가 많기로 이름난 이탈리아에서. 급성장의 결과로 <젊은이의 국제영화제>는 1997년부터 <토리노국제영화제(Torino FilmFestival)>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제위기 속에서 치러진 영화제
1993년 제11회 토리노국제영화제(11월 13~20일)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문을 닫을 뻔했다. 원인은정부의 지원 삭감 때문이었다. 경제의 침체와 정치계의 부정부패의 스캔들로 위기에 몰린 지방과 중앙정부는 영화제지원비의 상당 부분을 일방적으로 줄여버렸고 그 때문에 한동안 영화제를 하느냐 마느냐는 소문이 떠돌아 다녔으나 영화제를 살리려는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가까스로 11회를 끝마칠 수 있었다.11월 13일, 저녁 여덟시 반에 열린 개막식은 위기감에 쌓인 영화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나타내보였다. 으레 있을법한 전야제의 격식을 완전히 거른 채 마씨모 상영관 세 곳의 동시 상영으로 영화제는 시작됐다. 이날의 스타는 젊은이들이었다. 행사장은 이십대의 젊은이들로 꽉 찼었고 이들의 솟아오르는 열기와 발랄함으로 흥겨운 축제분위기를띄웠다. 머리를 펑크식으로 뾰족하게 위로 빗어 올린 젊은이가 태양처럼 노란 색의 눈으로 어둠을 응시하는 모습을담은 영화제의 포스터가 분위기에 아주 잘 어울렸다.11회 영화제에 참가한 나라는 34개국이었으며 모두 270편이 초대됐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외국영화는 90편 정도였을 뿐 나머지는 이탈리아 영화였다. 경비 삭감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부문은 1984년 프랑스의 뉴벨바그로 시작하여 크게 주목을 받아온 대규모의 회고전이었다. 1993년에 기획된 브라질의 뉴벨바그는 그래서 실현되지 못했다.한편 경쟁부문에서는 14편, 그 가운데서 네 편이 동양영화였다. 한국과 일본이 각각 1편 그리고 중국과 대만이 각각1편으로 경쟁에 참여했다. 비경쟁 부문에는 일본의 1편과중국의 3편이 들어있었는데 심사위원 다섯 명 가운데 1명이 중국출신이어서 동양에서도 중국의 참여가 상대적으로높았다. 90년대로 들면서 중국의 개방정치에 힘입어 서구영화제에 갑자기 중국영화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토리노국제영화제서도 그런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중국정부의 억압적인 영화정책 때문에 한동안영화제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띄웠다. 문제는 중국의 젊은스타 감독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던 장 유엔의 <베이징의 불량아이들>이 정부의 허락 없이 영화제에 초대되었다하여 중국정부가 장 감독에게 출국금지령을 내렸고 그것도모자라서 이미 촬영에 들어간 그의 새 영화를 중단시켜버렸다. 물론 영화제가 발깍 뒤집혔고 중국정부에 항의하는 관객측의 공동성명이 뒤따랐다. 그리고 금지영화가 된 <베이징의 불량아이들>은 관객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보란 듯이공개됐다. 언뜻 1992년 페사로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때 한국정부가 상영 프로그램에 오른 <파업전야>를 중단시키려다 영화제 쪽의 항의로 끝에 가서 뒤로 물러났던 사건이 생각났다.토리노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은 한국영화로서는 첫 영화로서 일본과 중국에 비해 좀늦은 편이었다. 늦어진 이유에 대해 바베라 집행위원장의설명은“페사로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 주간은 나도 참석했었다. 솔직히 그 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알려진 한국영화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번한국영화가 참여한 걸 정말 환영한다. 나는 직무상 여러 국제영화제를 다니면서 한국영화를 여러 번 봤기 때문에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한국영화진흥공사에 영화를보내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을 했어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매번 침묵 아니면 부정적 대답만 받았다. 다행히 한국영화계를 잘 아는 페사로국제영화제의 아드리아노 아푸라의 도움으로 그나마 <첫사랑>을 경쟁부문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늦지 않았다. 앞으로는 내가 직접 한국에 갈 생각이며 토리노에서 한국영화를 보여줄 생각이다.”실제로 바베라의 약속은 빈 말이 아니었다. 그는 1998년민병훈 감독의 <벌이 나른다>를 경쟁부분에 초청했고 이영화로 민 감독은 대상, 비평가상, 관객상을 모두 휩쓸어영화제의 화젯거리가 됐었다. <벌이 나른다>는 민 감독이러시아 유학중에 타지키스탄 출신인 동료 잠셋 우스마노프와 1억원을 가지고 타지키스탄의 조그만 마을을 배경으로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아름다운 영화다. 여하튼 민 감독 다음에도 <세상 밖으로>(여균동), <눈물>(임상수), <친구>(곽경택), <살인의 추억>(봉준호), <해안선>(김기덕), <경의선>(박흥식), <지구를 지켜라>(장준한), <코끼리와 바다>(민진우) 등 한국의 유명 감독들의 영화들이2009년까지 꾸준히 토리노영화제의 경쟁과 비경쟁부문에초대됐다.
<첫사랑>에 대한 해외평론가들의 반응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은 관객의 박수도 많이 받았지만 그보다 영화평론가들과 감독들로부터 평이 아주 좋았다. 영화제 중에『시네포럼』과『시네크리티카』의 세 평론가들은 이 감독을 인터뷰 하는 자리에서“이 감독은 아주 독특한 표현양식을 통해 새로운 영화언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며 축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주요 일간지『스탐파』(11월 17일)에 실린 리에타 토로나부나 여평론가의 글에는“<첫사랑>은 수줍고 감수성이 예민한 한 젊은 여대생이 남선생을 사랑하는 고전적인 서술체 형식이지만 그러나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꿈같은 표현의 테크닉이 아주 뛰어났다. 애니메이션, 값싼 장난감, 달빛의 출현, 갑자기 시드는 꽃들, 페루지나의 키스를 생각게 하는 별들이 반짝이는밤하늘, 한마디로 청춘기에 든 젊은 여인의 꿈과 장난을 감독은 열정을 갖고 아주 우아하게 가시화했다.”이제 이탈리아 밖의 평론을 말하자면, 독일 평론가 페터얀센은 스위스 바젤의 일간지『바즐러 자이퉁』(11월 29일)에 토리노국제영화제에 대한 글을 쓰면서 큰 지면을 이 감독에게내줬는데,“ <첫사랑>은한연극과의여학생이연극선생에 대한 사랑을 그린 영화로, 영신이는 영화의 끝에 가서야 그가 결혼한 남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줄거리는별로 중요하지 않다. 35세의 한국에서 온 이 감독은 마치오즈, 이오셀리니, 그리고 적어도 구로자바의 <도데스칸>을 모두 다 소화한 사람처럼 오스카 와일드의 <우리들의 조그만 마을>과 슈베르트의 노래를 다루었는데 그만큼가벼우면서도 간결하고, 다채로우면서 번쩍이는 작품을그는 만들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베를린 영포럼의 영화선정위원의 하나인 러시아의 영화평론가 안드레 풀라코프는 나를 만나자“드물게 보는 수작이다”라고 했고 그와 동행하던 키르기스스탄 감독 아브디칼라코프는 나와 말이 통하지 않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좋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텔레비전 기자이며 월간지(Iskusstvo Kino, 영화예술)의 평론가인 피외트르 세포티니크는 모스코바 텔레비전의 저녁 프로그램을 위해 이 감독과 인터뷰를 하면서“러시아 시청자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이명세 감독의 작품세계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해외영화제에 나타난 한국영화들은 군사정권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리얼리즘의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뤘다. 외국의 영화평론가들은 이들을“한국의 누벨바그”로 불렀다. 그러나 이명세 감독은 처음부터 동시대 감독들의 작품경향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그는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오히려 현실과 환상 또는 꿈과 현실이 뒤엉키는 심리적 현실을 영화의 언어로 시각화하는 데 더 중점을 두는 감독이다. 그러기에 그의 영화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양면성을 보여주며 그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때로는 혼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영화의 줄거리에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주인공에 생동감을 주는 색깔과 빛 그리고 카메라의움직임과 움직임의 속도, 음악과 음향 등 반내러티브의 순수한 영상적 언어를 양념으로 영화를 만들어 가는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외돌토리 감독이다. 이 감독의 새 영화는나올 때마다 상반된 반응을 일으키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첫사랑>에 대해 몇몇의 평론가는“이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천재적 재질의 감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런 반면에“키치하다, 애들의 장난”이라고 불만을 터트리는 관객들도 많았으며, 심지어는 이감독을“한국의 정치현실을 외면한 배반자다. 그러려면 차라리 한국에서 없어져 버려라”는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새 영화를 만들 때마다 논쟁의 표적이 되는 이명세 감독,그는 어떤 감독이며 그의 작품은 한국영화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국영화의 제일인자인 아드리아노 아푸라는퐁피듀센터 한국영화회고전의 카탈로그에서 이명세 감독에대해 쓰기를“… 이명세는 젊은 감독들 가운데 가장 열린스타일과 노골적인 리얼리즘의 배척자이다. 그의 영화들(개그맨,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은 대체적으로 색채를통해 변형된 이미지와 스튜디오 소도구의 재구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의 작업은 포스모더니즘에 가깝지만 개념적으로 한국에서 내 말을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감독은 스타일과 장르를 마음 내키는 대로 섞어 쓸 줄 알며,동시대의 상당수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내레이션과 스타일을 끊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첫사랑>이 그러한데, 내가 볼때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원형(original)이며국제적 차원에서도 그렇다. 그의 영화에서 한국의 뉴벨바그의 싹이 트고 있음을 본다….”1957년생인 이명세 감독은 1988년 <개그맨>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여 2007년의 <M>까지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관객모집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나머지 여섯 편은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성공 뒤 2000년 그는 할리우드에 초청되어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편집권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는 걸 거절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일방적으로 영화감독에게 편집권을 절대 주지 않는다는 걸 그는 몰랐었는지, 아무튼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감독으로서의 편집권을 끝까지 주장한 건 진정 그다운 외고집이었다. 그는 미국생활 4년 동안 영화사를 빛낸 대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영화공부에 몰두했다.이제 2010년도 끝나가는 시기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이명세 감독과 전화를 했다. 그는 <M>이 실패한 뒤 심한정신적 몸살을 했었던 것 같았으나 요즘은 새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나는 17년 전 토리노에서 마른 오징어를 뜯으며 같이 맥주를 마시던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끄집어내면서 그때의 <첫사랑>에 대한 창조자로서의 자신의해설을『문화저널』의 독자들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했다. 바쁜 중에도 내 부탁을 들어준 감독에게 감사하며 그의 대답을여기에인용한다.“ 영화학교에들어가는순간, 제게찾아온 질문은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화란 무엇인가?동시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의당 영화학도로서 영화에 대한 질문은 당연한 건데, 따라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온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막연하게 생각한 것인데, 영화예술이라는 것과 사랑이라는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동시에 질문을 했던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후 어쨌거나 저는 영화와 사랑을화두처럼 머리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첫사랑이란 것은 당연 그에 따른 질문의 결과이겠지요.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한 번은 겪게 되는 첫사랑. 그러나 누구에게나 질문을 던지면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첫사랑이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도, 만나는 사람들마다첫사랑이 무엇인가 물어봤습니다. 첫사랑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모양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인가? 구체적으로도 물어봤습니다. 답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빨강,어떤 사람은 동그라미, 어떤 사람은 보라, 어떤 사람은 네모 식으로…. <첫사랑>이란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6개월 정도 새벽기도에 나갔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물어봤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매일매일 물어봤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하게 10개월이되던 날, 아기가 탄생하듯이 누군가 제 꿈속에서 칠판에다‘시간의 비밀’을 써주었습니다. 꿈에서 깬 순간, 나는 첫사랑이 시간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사랑이란 한남자가, 한 여자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름이 아니라, 첫사랑이란 시간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는 것을.”이명세 감독님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며 이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