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 |
내인생의멘토 - 스승 박종수
관리자(2010-10-04 18:38:41)
스승 박종수
그는 내 마음의 등불이다
- 엄혁용 조각가
간밤에 쏟아진 장맛비가 그치고 햇볕을 머금은 아침의 풍경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푸르다. 늙으면 어김없이 찾아온다는‘나이’에 대한 뻔한 감상과 상념에 나도 역시 빠지게 되나 보다.오늘도 역시 어제의 폭음은 머릿속과 위장을 한바탕 뒤집어놓고『문화저널』의 숙제는(?) 더욱더 나를 급격히 초조하게 만든다. 과음그리고 절주, 흡연의 변덕스런 내 나이 오십의 익숙한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뒤돌아본다.
스승과의 인연, 그 오래된 발자취를 찾아서
삶을 질문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지나간 세월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간 속에는 여러 형태의 기억과 인생의 거친 수풀을 헤집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한 자락의 자긍심일 것이다. 그 자긍심의 뿌리는 바람 같았던 그리고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었던 모호한 고교시절, 그런 나에게는 스승님이신 박종수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에이, 싸가지 없는 자식들!”가끔 아니면 자주 박종수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떠오른다(선생님은 삼십대 초반에 전북 사대부고에 부임하셨다. 어찌 보면 나와 전북 사대부고 동기라 할 수 있다. 선생님은 부임을, 나는입학을).유독 의리를 강조하시고 미술인답지 않게 건강한 체격과 호탕하고 추진력 강하신 선생님께서는 또 다른 무언의 교육을 우리들 가슴에 남기셨다. 항상 나에게 아니 우리 미술부원들에게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얼마나 의식하면서 살아왔을까? 때로는 생각의 짧음과 표현의 부족으로 경쾌함이 무례함으로 비친 적도 있었으리라.또한 선생님의 작업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열정적이셨다. 전북대학교 앞에 원 화실이라는 삼십여 평의 공간에서 우리들을 레슨하셨는데 화실 한켠에서 작업과 레슨을 같이 하셨다.이런 일도 있었다. 쌀쌀한 초겨울이었을 것이다. 약주를 거나하게 드시고 오시다가 시궁창에 빠지셨다면서 지독한 냄새와 함께 화실에 들어오셨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며 그때의 그 모습이 멋지게 보였다(아마도 질풍노도의 시기에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과도한 음주습관을 지금껏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스승님
고등학교 1학년 말 경이었다. 선생님께서 내 수채화를 보시더니 미술부를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중학교 1, 2학년 때 미술부를하다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미술을 잊고 있었던 때였다. 그 당시 썩 모범생이 아니었던 나는 미술부보다는 선생님께서 학생부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약간의 탈선과 잘못을 용서해 주시리라 생각했던 것이다.역시나 선생님께서는 약간의 잘못을 해도 모른 체 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술실에 있는 선생님의 작업실이 당시에치외법권 지역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나에게무언의 암시로 그 공간에서 약간의 탈선(끽연과약간의 알콜 등)은 눈감아주셨다.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1년이라는 시간을 선생님 화실에서 재수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서양화보다는 조각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지만 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시험결과는 서양화 1차 지망 실패. 2차 조소과 합격. 그 당시만 해도 조소과를 포기하고 다시 공부를 하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완강한 권유로 조소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었다. 지금껏 조각으로 먹고 살고 있으니까말이다. 내가 그 때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너는 서양화보다는 모든 면에서 볼 때 조각이 훨씬 잘 맞을 수있다’고 하시면서‘아마 당신도 다시 공부를 하면 조각을 선택할 것이다’하시면서 나의 진로결정에 중요한 삶의 조언자가 되어 주셨다.세상은 나와 그 이외의 것으로 철저히 나뉘어져 있었던 시기였다. 난 나름 외로웠으며 세상은 참 즐거웠다. 즉흥과 유치함이 반복되는 전쟁터 같았던 그 시절, 나는 내 자신에게 어떤 질문과 결정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나 너무나 무서웠던 선생님의 모습은 내의 다양한 버팀목으로 내 가슴 한 쪽에 자리하고 있다.
봄날이 가득 인생은 덧없다
선생님이 전북 사대부고에 부임하신 때가 삼십대 초반이셨는데 지금 내나이가 벌써 오십이다. 내가 지금 선생님의 자리에 있다면 과연 제자들에게 어떤 확신을 갖고 어떤 결정을 내려줄지 의문이다.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도 두렵다.봄날이 가듯 인생은 덧없다 했는데 우리의 선생님은 더 늙어가고 나는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고된 시간이 있었고 찬란한 행복도 있었다. 지금도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수천 번 되묻던 불안과 자유의 즐거움으로양분된 혼란 속에서 머뭇거린다. 늙어가는 제자는 다시 또 선생님께 묻고싶다. 예술가의 길을, 우리가 사는 인간사를….벌써 삼십년이 흘렀고 예전보다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산다. 항상 마음속에 고마움으로 자리하고 계신 선생님은 정년을 하시고 서울에 계신다. 막걸리 한 잔 대접하면서 묵은 가슴을 내려놓고 싶다.
엄혁용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13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국제 NETWORK 21세기전, Italy-한국 현대 도예전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1990년에는 중앙미술대전과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으며, 1991년에는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종합대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현재전북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와 홍익 조각회, 한국조각가 협회에서 이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