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0.12 |
얘기보따리의 소리로 엮는 전주이야기
관리자(2010-12-02 17:35:50)
전주 한지가 천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도 넉넉하구나 (아니리) 젊어 청춘 호시절에 조선팔도 유람으로 술 깨나 축내던 사내 하나가 있었는디, 어찌어찌 일찌감치 철이 들어서 저 흑석골 오두막에 들어 앉아 한평생 종이만 만들고 살었것다. 일흔 훌 쩍 넘긴 어간 종이쟁이 노인은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살아 온 게 그저 한 바탕 꿈만 같더라. 사내 하는 짓 부끄럽고 배곯 는다고, 전주 나가 방물장수를 혀도 이것보다는 낫다고 석 달 열흘을 달달 볶던 마누라는 어느 눈 오는 저녁판에 약 먹은 개처럼 길길이 날뛰다 그만 집 나가불고, 소식 끊긴지 아득한 그 마누라 생각이, 어느 날 눈오는디, 해 다 넘어가불고 으슬 으슬 추운디, 멋헐라고 쓸데없이 생각이 났겄다. 그것이 왜정 땐가 인공 땐가 암도 몰르는 그런 시절 그 어디 폭폭헌 한 때 이야기쯤이라 치고 말이지. (진양조) 달 뜬다 저 달 떠 눈꽃 마당 환하다 둥실 뜬 호롱불빛 서럽게 배어나오는 장지문 저 너머 졸고 있는 노인 하나 문풍지만 달싹여도 검둥개는 짖는다마는 행여나 돌아올까 먼 길 떠난 마누라 지친 어깨 달빛 지고 사리문 성큼 들어설까 궁금한 쪽유리창 창호지도 귀 기울이는 밤 (자진모리) 문풍지 달싹이며 눈 밟는 소리 귀 기울이는 저 노인 저 손 봐라 저 굵은 손가락 봐라 한평생 물에 불어 퉁퉁 부은 저 손가락 마디마디 옹이 지고 잔주름은 덤불 같아 허리는 주춤 어깨는 구부정 앙상한 모가지로 슬렁슬렁 발틀 쥐고 허위허위 물 일어서 에헤라 한 평생 어린 자식 같은 종이만 떴다 (엇모리) 이 종이가 무슨 종이 전라도라 전주 한지 전주땅 기름진 속살 그 기운 쑥 쑥 받아 곧게 자란 한 해 살이 닥나무라 옹골지다 단단하다 겉껍질 벗겨내니 검은 속 거친 흑피 고루 벗겨 고운 백피 거둔다 잿물에 풍덩 담가 갖은 정성 불을 때서 말랑말랑 삶은 닥을 흐르는 물에 씻는다 (아니리) 하루 가고 이틀 가고 순한 볕에 몸 뒤채니 희구나 빛나는구나 고르고도 평평하다 티끌 한 올 먼지 한 톨 행여 부정한 마음까지 걸러낸다 털어낸다 흰 속살만 고이 불려 펑 펑 두드린다 네 것 내 것 다 뭉개고 마침내 살도 뼈도 핏줄까지 짓물러서 흐물흐물 덧없구나 닥나무 짧은 한평생 (자진모리) 저어라 섞어라 이 살 저 물 고루 두루 퍼지도록 지통이 곧 물통이라 종이인지 물인지 지통 그득 물이 반절 부옇게 떴다 종이살 반절 발틀 쥐고 슬렁슬렁 흔들흔들 물을 뜬다 덧없는 닥나무의 짧은 한평생이로다. 앞 물 퍼서 뒤로 붓고 왼 물 떠서 오른쪽 부셔 물 버리고 종이는 건진다 물 보내고 종이만 살린다. 떴다 보아라 어린 종이다 가는 숨결 저 얇은 목숨 차곡차곡 떠서 쌓아 덩어리를 만든다 널빤지로 위를 덮어 무거운 돌 눌러놓고 낮이 가고 밤이 가고 꼬박 하루 물을 빼니 마침내 종이로구나 싸라락 싸락 베일 듯한 전주라 한지로다 짱짱하고 부드럽고 고른 결에 고운 흰 빛 냄새조차 향기로워 올커니 이것이 바로 시퍼런 내 청춘 흔적이라 올커니 이것이 바로 시퍼런 내 청춘 흔적이라 (아니리) 나무 물 햇빛 바람 돌멩이에 사람까지 온갖 기운 다 모여서 종이 한 장 내었으니 이 속이 곧 우주 속이요, 한 세상이 종잇장이라 추사, 창암, 석전, 강암, 평생의 벗이었고 산수, 화조, 영모, 어해, 이 자리가 제 자리라 경기전 실록이며 완판본 소설책까지 아서라 한지 곧 아니면 오간데 없을 노릇 (자진모리) 여름날 삼복더위 한 겨울 칼바람도 창호지로 문살 메우고 풍지 달아 막았나니 도리 없는 패륜자식은 눈물로‘도무지’하고 먼저 가신 조상님들 지방 써서 제 올리고 정월이라 대보름날 소원 써서 불사르니 원망이야 그리움이야 이 종이로 달랬구나 그런즉 허투루 마라 천년 종이 전주 한지라 (아니리) 구시렁구시렁 종이쟁이 저 노인, 술 한 잔 길게 들고 취한 눈 으로 내다보니, 마당 가 늙은 감나무가 구불구불 구부러져서 쏟아지는 함박눈을 맨몸으로 맞는구나. (중중모리) 얼씨구나 절씨구 절씨구나 좋을씨구, 한 평생 종이 뜨다 다 갔다만 후회도 그리움도 무슨 소용이랴. 집 나간 마누라 종적이 없다 한들 그 또한 그저 그뿐이라. 허튼 목숨이야 갈 때 갈망정 내 손으로 만든 종이 천지 사방 잘 쓰일 터 마누라도 종이장도 미련 두어 부질없고, 한 잔 길게 들이키니 눈발 더욱 어지럽다. (진양조) 홀로 길게 취한 저 사내, 그 날 밤 뒷일이야 더 알아 무엇하리 더질더질-. 창작배경 울면 풀어지고 바짝 마르면 더없이 견고한 것이 한지(韓紙)다. 견고하다고 하나 오히려 여린 숨결에 고스란히 제 가슴을 열어 보이는 것도 한지의매력이다. 이러한 한지의 성정(性情)이 꼭 인정(人情)을 닮은 듯하여, 옛 선비들은 문방사우의 하나로 곁에 두고 보살폈다. 그리고는 때로는 연모의 심사를 한지 위에 새겨놓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담대한 꿈을 한지에 꾹꾹 눌러놓기도 했다. 그러니 한지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상이자사람의 마음을 비쳐내는 거울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천 년을 흘러도 변치 않는 마음이 또한 한지의 마음인 것이다.한지는 우리 고유의 전통 종이로, 닥나무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수초지(手抄紙: Hand-made-paper)를 일컫는다. 수초지는 결과 결이 견고하게결합해 있어 어지간한 힘으로는 쉽게 찢을 수 없는 생명력을 가졌다. 현존하는 최고의 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전해오는 것은 결을 찾지 않고서는 찢을 수 없을 만큼 질긴 한지의 생명력 때문이다.이러한 한지의 제작기법에는 우리 문화의 자연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서양의 경우 종이 제작과정에서 인위적인 압착을 가하기 때문에 섬유의 물성(物性)이 인위적 힘에 의해 상실되고 있다. 이를 통해 서양인들의 자연정복주의적인 사고를 볼 수가 있다. 반면, 우리의 한지는 통기성(通氣性:공기가 통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을 갖고 있다. 이는 종이 제작 시 사용되는 원료의 물성을 최대한 살려 자연스러운 섬유구조로 섬유조직들이배열되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조화하고자 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적 자연관이 한지 제작에 반영된 것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담백한 느낌을주는 한지에서 순천(順天)적인 자연관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전주 한지는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왕실의 진상물(進上物)로서 그 생산량과 품질 면에서 높이 평가되어 조선시대 때는 외교문서로사용되었다. 종류 또한 서예지, 공예지, 창호지, 장판지, 기타 영구 보전지로서 다양하여 옛날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질기고 아름다운 윤이 나며보존성과 흡수성이 뛰어난 전주의 한지는 질 좋은 닥나무를 재료로 사용하였는데, 전주지역의 물이 깨끗하고 철분 함유량이 적어 전주 인근에서생산되는 닥나무는 그 품질이 우수하다. 지금도 전주 근교인 구이(九耳), 임실(任實) 지역의 산야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데, 전주에서 탈색이나 변색이 되지 않고 산화가 일어나지 않는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때문이다.이 좋은 원료가 전주 한지 장인들의 날렵한 손끝에서 고운 결을 가지런히 하고, 씨결과 날결이 다정하게 서로를 잡아당기니 그 이치가 마치 우리네 사는 세상의 이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물과 햇빛과 닥나무의 섬유질과 한지 장인의 손끝이 이심전심의 마음처럼 상생하는 가운데 비로소대동(大同)의 정신으로 피어난다. 그 한지를 하늘에 비추면 하늘빛이 드러나고, 물에 비추면 물빛이 드러나고, 바람에 비추면 바람의 빛깔이 드러나고, 사람에게 비추면 온전한 마음이 드러날 듯하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그 수를 다하고 돌아갈 때, 한지로 몸을 감싸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의하늘과 물과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품고 가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천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도 넉넉한 한지의 생명력과, 한지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한지 장인들의 오로지 한 삶 앞에 다만 스스로 겸손해질 뿐이다. 얘기보따리 문신, 신귀백, 이병천, 최기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