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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 |
[문화시평] 군산 아트레지던시 < 군산이 말하는 것은?>
관리자(2010-12-02 17:38:09)
군산 아트레지던시 < 군산이 말하는 것은?>전 구 군산수협공판장(10월 22일~11월 9 일) 근·현대의 아픔 안고 새로운 삶의 미래를 보다 - 정주하 사진가,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지난 10월 30일 군산에 있는 옛 수협 건물에서 <군산이 말하는 것은?>이라는 전시가열렸다. 이 건물을 빌어 여러 예술가가 모여 레지던스를 시도하고, 그‘합숙의 결과물’을 전시와 포럼의 형태로 보이는 자리였다. 군산이라는 도시의 복합성과 특수성 전주에서 간 나는 군산 지리를 잘 몰라 전시장 주변을 한참 동안 배회하는행운을 얻었다. 늘 반듯하고 잘 차려진건물의 어귀에서 예술의 기운(?) 을 확인하던 터라 허름한 건물과 여전히 일상의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전시장 주변은참으로‘생경/신선’했다. 어렵게 입구를확인한 후 하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한 바퀴 동네를 더 돌았다. 저녁, 사람이거의 나다니지 않는 조용한 포구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흐린 듯, 북쪽을 향한 나의 시선에 노을은 없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다. 뒤를 돌아 건물 옥상을 보니 전시를 알리는 현수막(참여작품이다, 아카이브 팀)이 보인다. ‘안아줘!’라고.다시, 입구에 서서 그 앞을 모두 메우고 있는‘쌓여 있는 생선 상자’를 보았다. 생동하는 푸른 생선의 등 모습과 부패를 방지하는 굵은 소금과 얼음 그리고비늘과 비릿한 냄새와 굵은 어부의 팔뚝이 떠오른다. 높게 쌓인 생선 상자는 그래서 대형 마트에 쌓여있는 상자와 사뭇다른 모습이었다. 켜켜이 쌓여 있는 상자에는 이미 생선냄새가 다 빠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생생한 삶의 현장을 뚫고 나온 당당한 모습이 단지 물건을 담는‘빡쓰’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생선 상자다.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이미 예술품들이걸려있다.‘ 군산에서’습득한괘종시계를 걸어 놓고 그 안에‘여보’라고 쓰인 글자를 그대로 방치해 놓았다. 물론시계는 자고 있다. 멈추어선 시간은 벽에걸려 더 이상 진행을 하지 않고, 시간을담은 그릇의 모습은 비루(鄙陋)하다. 그래! 시간이 비루한 것일까? 아니다! 시간 앞에서만이 인간은모두가 비루한 것임을 다행스런 마음으로 확인한다.계단의 여기저기에는 이전하기 전에 쓰였던 어구들이 그때그 모습으로 처연히 있고, ‘그/ 것/ 또/ 한’예술품일 것이라는 참여 예술가들의 암묵적인 인정이 고스란히 함께하고 있다. 군산을 말하려는 예술가들의 전시가 대상/군산을 발화자(發話者)로 전치(轉置)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층의 너른방은 예술과 일상이 날(生) 모습 그대로 있다. 언 듯은, 중딩들의 고백 같은 설치 작품과 그 표면에 글들이 있다(고보연,랜덤 마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감상인 모양이다. 이 또한재미있는 역설이다. 전시의 표제처럼 대상을 설정해 작품화하면서 다시 대상 스스로 발언하도록 구성하고 있다. ‘자기반영성’이 가득하다.중앙 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몇 개의 방들이 있고 그 방들에도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사진과 설치가 혼합되어있다. 국내 작가들만이 아니라 필리핀(Mark salvatus)과 리투아니아(Emilija skarnulyte)에서 참여한 작가도 있다. 이들은 그러나 다 함께 군산을 매우 애정 어리게 바라본 듯하다. 전시된 작업에서는 군산의 구(舊) 도심과 일제 강점기 때의 수탈이 겹쳐 보이기도 하고(고승욱), 새만금과 개발지상주의가 함께 등지고 있기도 하다(Emilija skarnulyte). 탑의모습을 통해 지금,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 제시도 있다. 텅/빈/듯 보이는하늘을 주시함으로써 지난한 역사의 부침(浮沈)을 지우려는듯 보이는 작업도 있다(양지영). 이 같은 태도는 애정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는 불가능할 터이다. 고개를 숙인다. 바닥의거친 콘크리트와 아직 제대로 철거되지 않는 시간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동쪽 끝 방은 전체가 검은 어둠에 쌓여있다(김상돈). 과거 이곳 군산을 지배했던 일제의 수탈을 앞서 자행하던‘나가사키 18 은행’의 흔적이 벽에 걸려있다. 그러나 검다. 전혀 흔적을 따라갈 수 없도록 검다. 작가는 몇 개의 알전구를 통해 낮은 시선의 빛을 허용했을 뿐이다. 왜일까? 문득 입구 쪽 벽에 조그마한 조합의 구호가 포스터처럼 붙어있다. 조합의‘기강확립’과‘헌신적 협력/복종’이 주된 내용이다. 이 군산의 부두가 수산협동조합에서 어떤 조-합(粗-合)관계가 필요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화예술로 끌어안은 과거와 현재 군산은 개항한 지 이제 100년이 넘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잘 드러내 놓은 것처럼, 식민시절 이 군산을 통해 김제와 전주를 근거로 하는 내륙의 수확물들이 일본으로 수탈되어가기도 한 곳이다. 이 노선에 전군도로(전주와 군산 잇는)라는 압축어가 생겼으며, 그 길에‘피묻은’역사의‘사쿠라’는 이유를 가진다. 바로 이 군산에서 이번 전시의 기획자 신석호는 두 개의 시선을 기억해 냈다. 하나는 식민지 시절 얻게 된 근대화 과정에서 기축(基築) 된 근대역사 거리와 건축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 이루려 하는 대규모 산단(産業團地)과 새만금으로부터 얻게 되는‘새로운 산업도시의 전망’이그것이다. 그는 이 두 개의 축이 지금의 군산에 혼재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있으며, 동시에 군산의 미래가 이 두 개의 축으로만 진행될 경우‘시민의 메마른 상실감’이 반드시 동반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예단(豫斷)을 근거로 그가 시도하는 것이 바로‘문화적 재생(再生)이다. 그러니까 그 두 개의 축 사이에문화와 예술이 개입하여 성찰과 정체성 구축을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단지 새로운 도심의 건설만이 아닌, 단지 거대한 산업 단지와 신기술의 증진만이 아닌 높은 삶의 질과 공유, 그리하여 지난(至難)한 역사로부터 얻은 상처가 치유되는 재/생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경계하며 보이고자 하는 것은 도심(都心)의 도배(塗褙)와 도색(塗色)이 아니다. 증여(贈與)다. 문화의 시선과 예술의 포용으로 경계를 좀 낮추고, 너머와 사이에 있는 것들을 넉넉하게 나누자는 것이다. 이 원대한 계획에 아홉 명의 레지던시 작가와 여러 시민이 함께 하였다. 그것이 이번 전시다.당연히 지역은 서울을 꿈꾼다. 크기와 속도가 여실히 작고 느리기에 안과 밖으로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는 동시에 큰 것을 향해 팽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이 서울을 향해 구애의 손짓을 요란하게 할수록 구토는 심해질 터이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러했다.오히려 절대 도달할 수없는 꿈은 거꾸로만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 이곳으로부터(vonhier aus)’를 확신하는 순간이다. 과거 식민(植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그러했다. 또한, 세계를 향해 평등을 외칠 때도 그랬다. 지금 이곳 군산에서 작가들이 수협을빌어 <몸으로, 몸으로>(이건용, 고승욱) 보여주고자 하는 것 또한‘지금 이곳’을 자각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들의 작업에 동의하는 것도 그럴 것이다.전시장을 나와 바다에 연해 있는 선창으로 갔다. 몇 개의 배와 멀리 뚝방이 보인다. 이미 어두워진 주변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냄새와 더불어 내 몸을 압박한다. 다시 안쪽으로 짧게 걸으며 보니 여기저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 육중한 건물들이 눈에 띈다. 녹슬고 험해진 기둥과 벽들이 가슴을 후빈다. 긴 골목길이 과거의 번창(繁昌)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모퉁이 작은 식당에서는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들과 마중 나온 동인들이 어께를 부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창대(昌大)함이란 번듯한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나를 깨우친다. 정주하 독일 퀼른대학교 자유예술대학 사진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현재 백제예술대학 사진과의교수로 재임 중이다. 저서로는 1999년에 발간한『땅의 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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