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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 | 인터뷰
[명인명장] 대목장 김정락 명인
관리자(2011-02-14 11:24:09)

“비루를 먹어도 내 일 헐랑게” - 대목장 김정락 명인 


한옥은 몇 달간을 깊이 생각해 구상하고설계한 다음 그에 맞춰 부재를 다 만들어 놓은 후에 한 번에 짜 맞추는건축물입니다. 그래서 한옥은‘짓는다’하지 않고‘짠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고정교하지 않으면 집이 될 수없는, 허투루 생각하고 만만히 여기는 마음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한옥입니다.이런 이유로 철근과 시멘트로 지은 건물의 수명은 대략30년에 불과하지만 나무와흙으로‘짠’한옥은 100년,200년의 시간을 견뎌낼 수있습니다.부안군 매요리 역귀마을에서 만난 대목장 김정락 명인(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 30호)은 집 짓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이러한‘예의’와‘진정성’을 반백년의 시간동안 한옥에 담아냈습니다. 


한옥이 가진 아름다움의 마무리이며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처마곡선의 명인으로 인정받게 된 것도 장인정신을 놓지 않는 대목장으로서의 진심을 지켜온 까닭입니다. 글공부 권하는 세상, 공쟁이는‘야차운’사람이었다 우리가 어려서 크면서 공부하고 살아나올 때는 어떻게 사람 취급을 했냐하면 사농공상(士農工商) 그렇게. 잉, 그렇게 했죠. 사농공상으로 취급을 혀, 장사라는 것은 제일 하빠리 취급을 해. 왜냐면 저 사람을 둘려먹는다. 그런 것이고. 공쟁이는 말하자면 뭔 말을 하는고하니, 교자는 옹졸한 사람의 종이 된다. 그런 말이 있어요. 그래서 공장을 맨들고 이런 사람을 좀 야찹게 취급을 했어. 그때 우리 클 때는내 공장일, 목수일을 잘해도 후계자, 자식들은 안 가킬라고 해, 내가아무리 좋은 기술을 취급을 했어도. 내가 글을 한문을 배우면서도 부모님을 잘 만나서 그렇지.


내가 35년생, 해방 되던 해에는 열 살인가열한 살인가 먹었을 거여, 열한 살. 인자, 뒤에 6.25 낫을 때는 내가열일곱 살. 해방되고 나서 학교를 우리나라에서 댕기라고 했는데. 옹진이라고 동네 뒤에 부자사람이 사립핵교를 맹글어서 댕기라고 해서댕기는데 내 맘이 핵교는 다니기 싫어요. 1년 동안인가 대니는디 고달프게 댕겼죠. 그때는 동네에서 사숙이라 해서 사사로 서당을 맹글어서 글을 익히고 그러는데, 해방되었으니 학자들이 자꾸 일어나죠.공부 시킬라고, 부자집 사랑방, 개인집에서도 가르치고. 동시에 나도거기 뛰어들어서 한문을 읽기 시작했거든요.


한문을 읽어도 그때는먹고살기가 복잡하니 1년 열 두 달 죽-허니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는 먹고 살기가 힘드니 늦가을에 주로 공부를 하지 시앙 석달을 익히고, 설 쇠고 3-4월까지 익히고, 그때는 어릴 적에도 집안일에 다 협조를 하고 그렸지.돈 많고 부자라고 해서 돈 잘 쓰고, 옷 잘 입고 하 덜 못해, 곳간에쌀이 많고 해도, 없는 사람들이 허기에 까딱허믄 죽을 수도 있고 허니 도적도 많아 다들 검소하게 살았지. 검소하게 조금 낫게 근근이먹고 살제. 


그때의 신조가 뭐인가 하니, 집채를 말고 전답 치기를 해라. 왜 그러냐하면 집이라는 것은 돈을 들여 맨들어 놓으면 돈이 없어져. 전답은 뭐시든지 심어놓으면 먹고 살 수 있는 거여. 부재(부자)사람들도 좋은 집을 안 지어요, 절대 안 지어. 차라리 남이 다 지어놓은 집, 옛날 지어놓은 집을 사서 살고. 그렇게 혔기 때문에 사가에서는 목수들이 큰 목수들이 없지. 궁궐 짓고 절 짓고 요런 집 지을만한사람도 없고요. 그때 집은 박집이라고, 엷을 박자 박집이라고 오두막집 마냥으로, 가마구 오烏자하고 머리 두頭자, 가마구 머리 하나 가릴만한 집. 그래가지고, 오두막 짓고 잘하면 사계집이라고, 사계집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댐이 시방 우리 이 집 같은 익공집. 재실도 문중에서 돈을 뫼가지고서 짓는디 익공집을 못 져요.목수들이 보통은 사람들이 큰 집을 짓 덜 안 해. 그런디 그 집을 잘짓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내가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디, 스님들이 깊은 산속에 절을 맹글어. 절 맹그는 깊은산중은 참으로 주인이 없죠. 산중에서 나무가 총총 배겨있는 거기를 택혀, 그 자리서 나무를 비가지고 그 자리에서 집을 맹글고. 근데 스님들이 나무도 비고 목수일도 하고 기와도 굽고, 연장도 전부 맨들아요. 


그때는 세월 가는 것을 상관치 않고싸드락 싸드락 날마다. 그렇게 진 그 사람들이 스님이여. 사회생활 험선 배가 고프면 큰 절에 가서 도와주고 밥 얻어먹고그렇게 하면서 일도 배우고 그런 사램들이 연구해서 중국 같은데서 뽄도 따고. 그것저것 보고 연구하고 맨들어진 것이 오늘과 같이 대웅전 같은 폿집이에요. 우리 서민층의 목수는 큰 집을 지을 줄 몰랐다 그거지. 해방 후로 박정희 대통령 뒤에 배가 부르기 시작헌께 집도 좋게 지어갖고 살아야 헌다, 가치있어야 헌다. 요근래 와서는 농사는 밑으로 봐불고 물건을 선호한단 말이여.그러다보니 무형, 유형 문화재 이런 것이 다 생긴다 말이야.진즉부터 그런 것을 챙겼으면 소실되지 않고 그랬을턴디 배가 부르니 챙겨, 배 고팠을 때는 우선 먹어야 헌게. 호롱불 아래서 도장을 파다 우리가 인자 서당공부 헐 때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에...해방 후에 양민증이라고 증명을 맨들 때가 있었어요. 


왜그냐믄 그 해방 막 된게 북으서는 공산당, 여그서는 민주주의 자유 있는 당이고 그런 것을 놓고서는 여그 사람들도 공산당이좋다는 사람이 많아 그 때에. 그리갖고는 인자 양민증이란증명을 내게 됐어. 양민증이 나중으 도민증 됐다가 도민증이주민증 되야. 근디 양민증을 낼라믄 그 때는 여자들은 도장같은 것이 읍써. 근게 양민증을 낼라믄 문서다가 기록허고도장을 찍으야는디 그것이 없응게 도장을 파얀단 말이여. 근디 파고 잡어, 내가. 서당 대니면서 글자를 알고 헌게 그것을허고 싶은 생각이 있단 말여. 그 때 내가 글씨를 잘 썼다고봤어 손재주가 있어서 긍가 교술 그런 것을 타고 났는가. 그서 그 도장을 서당으 대니믄서 파는디 그 쇠 끊는 톱 그것이강히요.


그놈을 인자 숫돌으다가 갈어가지고서 대쪽을 붙여서 실로 창창 감어 갖고 그걸로 놓고 팠어요. 그 서당 아들들이 많이 있어도 다 못혔지요. 그때는 호롱불 밑으서 혔지. 가격두 읍지 뭐. 도장집 가서 파믄 돈이 얼마란 것이 있고 근디나는 기양 도장만 되믄 된게 많이 파주고 그랬었어요.또 그러다 저러다 인자 조금썩 나이도 더 먹고 그렁게로동네서 박집이라도 진다고 똥딱똥딱 허믄 거그를 가고 싶어요. 글 읽다가도 거그 가서 구경도 허고 늘 그냥 말들 안 혔지요. 그 때는 길쌈이라고 베를 짜는디 베 짜는 기구가 물레도 있고 베틀도 있고. 그 베틀 기구 같은 것 요런 것을 아무연장두 읍씨 칼이네 낫이네 이런 것 갖고 맨들라고 뜯고 또맨들기도 허고. 막 연구히서 먼야치 보고 맨들기도 허고. 그런 것을 연구를 자꾸 했었다고요. 그게 인자 소질이 있응게그리 자꾸 가는 것이지. 


음양오행이 있잖여. 천생 목수였던것이지. 목수인생 50년의 첫 집 인자 동네가 그 때 인자 거시기 저 목수 한 분이 있었어요, 김형오씨라고 영리헌 양반이지, 아조 영리헌 양반여. 그 냥반도 뭐 옛날에는 신파라고 가설극장 같은 거 이런 것을 그이가 그이 머리로서 사람들 여럿이 뫼아 놓고서 너는 뭐 해라 너는 뭐 해라 해갖고 연극도 허고 그런 양반여.그 양반이 목수 일을 헌다고. 내가 가서 늘 보기도 허고 맨들을 것도 늘 보고 근게“너 목수 한 번 히볼래”근게 양 반가워요 마음으로.그래서 히볼란다고 그리가지고서 인자 그 양반 따라서 허고 그랬었지요. 그런디 인자 그 때도 서당으 대니면서 또 집안일도 인자 부모들 허란대로 도우면서 시간이 있으믄 거그 가서 허고 그러고 그이가내가 필요허믄 우리 부모들보고 와서“야를 내가 데리다가 일을 좀시길랑게 허락허쇼”글고 나를 데리다가 시키믄 고마워요. 그 때는밥만 먹지 품삯 이런 거 없고. 내가 헐 만한 것을 시기지. 그러다 인자 집짓는 것을 배웠지요.배워갖고 있는디, 내가 처음으 일허러 들어갈 적으는 그 중방 재는것부터 시작혔어요. 그 때는 전부 하나하나를 다 깎으야요. 깎고 대패로 밀고. 이런 대패가 있으믄 여그다 막대그 치고 저그다 막대그치고 글케히서 둘이 밀고. 근디 나중으 인자 그 양반 따라서 어떤 집을 진다 허믄 가서 기둥도 맨들고 연방 그런 식으로 일을 시작을 히였지요. 허고 지내는 동안에 이 앞으 부신핵교허고 저 가서 있든 옹중 사립핵교를 합히서 저 지금 현재 있는 부남초등핵교라고 거그다가 합쳐서 짓자 고 허는디 교장 사택을 옮겨야거든. 한옥인디. 그 양반을 따러서 그걸 옮길라고 계획을 했는디.


만약으 양옥이믄 안되지.양옥은 부시거나 짓거나 둘 중 하나지. 부서버리믄 끝나지. 근디 이것은 그대로 번호 멕여가지고 여놈은 몇 번이다 이 놈은 가 줄의 몇번이다 나 줄으 몇번이다. 번호 멕이는 것도 잘 히야혀.그대로 히야 그대로 가서 맞춰놓지. 요만헌 쪼각 하나라도 안 없시고 다 따러가야요. 그려서 그 옮긴다고 혀요. 옮긴다는 게 집을 뜯고맞추고 허는 디서 머리가 터져요. 그믄 이것은 뜯을 적으 보믄 이것이 잘 못 맞었다 잘 맞었다 대충 짐작이 가거든. 그것도 대번에는 모리고. 근디 인자 그것을 옮긴다고 싹 뜯었거든. 그랬는디 이 양반이갑자기 재판 헌다고 히갖고서는 그 집을 못허게 됐어. 그렁게로 거그이사쟁이“그럼 니가 이거 같이 뜯고 했응게 맞출 수 있냐”아, 그 욕심이 나드라고요. 알었다고 내가 히볼란다고 그서 그 집을 맞췄어요.젤 첨으로 집을 한 번 맞춰봤어요. 그 기회가 잘 된 것이지. 집을 뜯었다가 맞춘 것이 차라리 내가 직접 히갖고 올라가기는 어려운 일인지 넘이 히 논놈을 맞춰보는 것이 상당허니 좋은 기회라고. 그 집을 사계집으로 히서 허는디 그전이 히논 놈 같이 야물지든 못했어도 여하튼 맞춰놨어. 


암만해도 설지요. 내가 볼적으로 설지만 그대로 그나지나 잘 맞췄어. 그이가 허란대로 뭔 일을 히왔기 때미법수는 알었거든. 그 집을 맞추고 난 뒤에는 상당히 기술이 획득이 되드라고.그 때내 나이가 한 이십세 때 됐을거요. 그러다가 나중으 훌륭헌 목수님을 만났지. 인생의 멘토, 학자목수의 스승 이 동네에다가 집을 한 채 질라근다고그리요, 


부재 사람이. 부자 사람이 욕심이더 많은거요. 집을 생각 안허고 돈 찌께들어서 새 집을 맨들라는 그런 생각이여.내가 결혼을 헌 뒤에였을 거요. “우리 집을 한 번 맡어서 지어보소”그 때는 뭐 날품으로 일을 히주는 거요. 책음을 짓고 일을 혀주는 거지. 내가 당신네 집을 짓는디책음을 짓기는 지어도 이 옹중이라는 부락으 가서 조형선 씨라고 잘 짓는 양반이계신게 그 양반을 모셔다가 짓자 그런게돈 많이 줄 것을 생각히서 안헐란다겨. 


그냥 자네가 짓소 그려. 그서 아니요.이 집이라는 것은 한 번 지믄은 생전 또 질랑가도 모르고 그러는디 잘지야는 것이지 내가 기양 이 아무케나도 지어서 쓰겄소. 그것은 내가 욕심이 있어서 그렸어. 그 양반한테 내가 더 기술을 밸라고. 틀림없이 그랬어요. 그것을 내가 그 주인한티 사정을 했어요. 절대 그리서는 안됩니다히갖고. 있는 언변 없는 언변 내가지고 쥔을 설득을 혔어요. 그 사램도먹을 만치 사는 사램이고. 없는 사램한티 그러믄 안되겄지만 먹을만큼사는 사램이고 긍게. 그리서 그 양반을 모셨지. 승낙을 받어서 그 양반을찾어갔지요. 


가서 내가 이런 사램이요 내가 집을 짓는디 나를 조께 갈쳐주는 마음으로 히주쇼 긍게 양 아 그러자고 히가꼬는. 그때는 또 일도 많지도 않었어요. 씨게 짓는 집은 별시럽게 없고. 그런디 그런 양반들도 씨게 짓는 집이다 허믄 일을 헐라고 혔었지요. 인자 그 양반을 모셔다가, 그집을 지어갖고 그 집 짓고 난 뒤에부터서는 확실한 것을 터득을 혔지요.그 뒤부텀은 일감도 많어지고 그러고 그때는 일을 잘 헌다 소리를 들어야 일감이 많었지. 그 사람 델다 일 시깅게 놀기나허고 맨 연장만 갈고앉었고 그러드라 이런 소리 들었다가서는 일 못허고 말어요.


이 사람 델다가 일 좀 시기야겄다 이런 맘을 주기 위해서 노력을 히얀다고. 그리서 인자 심껏 혔지요. 그렁게로 내가 살림살이 재금 나와서 살면서도 유지사람들이, 어른들이 헌다 소리가 자네 품팔어서 먹고 사는줄 아는가 농사를 잘 지어야 허는 것이네 품 팔어서는 못 먹고 산다 하도기양, 한번 두 번도 아니고 그런 소리를 혀쌌길래“나는 내 일 허고 당신은 당신 일헌게 그런 소리 좀 그만 허쇼”내가 그렇게 나쁘게 답변을 히줬어요. “앞으로는 그런 얘기 다시는 마쇼. 내가 비루를 먹어도 내일 헐랑게 ”그렸어요. 이렇게 인자 꾸준히 허다봉게 결론적으로 인자 사램들이찾어오고 그렸어요. 조형선씨 그 양반이 큰 일을 많이 했어요 이 시골서는. 


참 훌륭헌 목수였지.그 양반도 돌아가시고 폿집으로 넘어갈 때, 폿집이라는 건 조각을 히갖고 쌓아 올리는 것이거든요. 익공집도 폿집으로 생각이 되는디 이보다더 이익공으로 들어가는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은 고태명씨한테 사사를받았지. 내가 그 양반을 계속 따라 다님서 일 헌 것이 아니라 가서 선생님 이러이런 것은 어떻게 헙니까 이것을 물어서 이렇게 허소 이렇게 해서 받어 왔는디 그 어른이 돌아 댕김서 오직해야 나보고는 학자목수다고그랬대요. 배운 것도 없는디 학자 목수다고. 허허. 그렇게 인자 그 어른한티 내가 상당히 귀염을 받었어요.


“도편을 헐라믄 집 맨드는 것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어야 혀” 우리 일할 때는 사람이 죽으면 관도 짜고, 생이도 맨들고 모다 이런 것을 다 히야요. 뭐 농촌에서는 농기계, 쟁기 같은 거, 보습.. 수꾸락이라고혀요. 그 수꾸락이 닳어지믄 고챠주야 허고 쓰레도 다룰 줄알어야고. 목수라고 허믄 농도 짜주야고 이렇게 조밀허게는못헐지언정 책상도 짜주야고 그리요.목수라고 허믄 기술적인 일은 다 히야요.글고 그 때에 기와로 집을 진 것이 아니고 짚으로 다 이거든요. 볏짚으로 다 이는디 그것도 일 줄 알으야요. 그걸 일줄알으야 집이 안 새지 거 잘못 이어노믄 폭싹 썩어서 다 새버리요. 그런 것도 다 헐 줄 알어야요. 내가 직접 손으로 할 줄은 몰라도 거그 가서 잘못했네 잘혔네 거그 어찌케 좀 히봐라 이렇게는 헐 줄 알어야 혀. 방 놓는 것도 구들장도 처음불 올라가는디 거그가 중요허고 저 귀뚝 연기 나가는 굴뚝거그가 중요허고 그리요 근디 그런 것 저런 것을 알어야 혀.


결론적으로 도편을 헐라믄 집 맨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다 알고 있으야 혀. 흙 바르는 것도 알으야고 문 짜는 것도알으야고. 문 달어놓으믄, 옛날으는 우리가 다 문 짜서 달었는디 지금은 공장으서 다 맨드니까. 근디 옛날으는 다 이렇게 혀라 이렇게 짜도라 다 시기고 그렇게 혔어요. 목수가 지킬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다 부안무형문화재종합전시관이라고 저 부안읍 동중리 거그다가 만들아 놨어. 아직 개관식은 안 혔어. 안 혔는디 전시관안에 내 전시실을 집을 한 채를 지었는디 전시허는 그 사램이 업자가 와서 혔는디 아 그 안에다가 목수일을 육모정이니팔모정이니 집 짜는 법이니 이런 것을 히놨는디 엉터리로 히놨어. 


그것을 헐라믄 내 솜씨로 허던지 그래얄 거 아뇨. 근디내 솜씨로 안 허고 뭔 짓을, 맞지를 않게 해놨어. 담당관이와서 한 번 보라히서 가봤는디 막 엉터리여. 그것이 자기들끼리 허고 댕기는 법순가 그건 모르겄는디 이상허드라고요.담당관이 그리 못허게 히주야거든요. 내 솜씨를 거그다 놔두야지 왜 다른 사람 솜씨를 놔두냔 말이지요. 고태명 씨 그 어른은 중요무형문화재. 근디 돌아가신지가 한 삼년 됐는디 그양반 사진도 거그 붙여놓고 그랬드라고. 하여튼 보고 재미없다 생각을 먹었는디 어뜨케 변동을 못허는가벼. 돈때미 그런가.관청에서 뭐 짓는다고 헐 때는 설계를 먼저 내야혀. 그전에는 설계가 없어요. 내가 예를 들어 사계집이다 익공집이다포집이다 이런 것을 나보고 이 일을 내가 말을 히서 그 주인허고 타협해가꼬 평면도를 기려요. 평면도를 기리가꼬 잘 모르믄 어디가믄 이런 집이 있응게 어디를가보자 히서 이집같이 진다 저집같이 진다 해서 시작을 허거든요. 


지금은 무조건 설계사가 설계를 내요. 설계를 내갖고 와서 어뜨케 허는고니 인자 업자기다가 맡겨. 입찰을 붙여. 입찰을 붙여가꼬서는낙찰을 된 사람이 자기 맘대로 목수를 쓴단 말여.더러는 우리한티 온다치믄 그걸 보믄 설계가 이상허게 돼야있어. 그림이라는 그냥 그릴 수는 있지만나무를 여기다 얹고 힘을 받고 이런 것을 헐 수가있간디. 근런디 맡은 사람은 돈이 더 들어가면 안된다고 하고, 우리는 이대로는 집이 안 된다고, 그럼 집이 힘을 못 받어서 휘거나 짜부라지거나 허는경향이 있는디 어찌케 허냐 그럼 안 짓고 그냥 놓아버리고 허는 경우가 있지. 몇 년 전에 전주시청공무원들하고 이야기를 했으요. 설계가 나오면 될수 있으믄 전문가, 우리 같은 사람, 도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지정해놨지 않냐 사전에 그 설계를 우리한테 검사를 맡어가지고 맨들어라, 그리야지 그냥업자가 맡어버렸는디 변동허믄 업자가 안 좋다겨. 그냥 허라고 허고 그것이 복잡허단 말여. 


내 제자들헌티도 늘 당부허지. 그 설계도 잘 봐가지고 만약으 어디가 이상이 있으믄 절대로 그건 고챠라. 고챠야지 안 고친다고허믄 차라리 일을말드래도 안 곤치믄 안된다. 만약으 안고치고 해서 잘 안되믄 늬들 명예가 좋아질 수가 없잖냐. 그렇게해서 퇴박친 놈도 많애요. 섣불리 지은 집은 쉽게 썩는 법 근게 인자 여그서 아까도 얘그했지만 여기는 요쪽 지붕은짤룹고 요쪽 지붕은 높은 집이요, 펴다보믄 평으로 이르케돼갖고 이쪽으로 올라간 거 이것이 공량이거든. 그것이 목수의 말허자믄 기술이여. 그리고 나중의 마지막으로 집 처마,지붕 처마, 이것이 잘 돼야 집이 하늘로 널러가는 것 같이 잘되는 거요. 근게 하나하나를 심각히 생각히서 해야 되는 거요. 처음에는 그 업자허고 나허고 돈갖고 얘기를 히서 주냐안주냐 따지지만 일 들으가서는 그때는 기술에 인자 정신을써야혀, 목수들은. 


기술에 정신을 쓰고 있으야지 돈에 정신을 쓰믄 못쓴당게. 절대 못써. 지금은 돈돈 허는 통으 그것이문제다고요. 집 물건이 지대로 가냐 안가냐 근디 집 같은 거인자 판단을 헐 줄 알고 모르고 간에 모르는 사람도 똑같은집을 지었는디 이집 지어놓고 저집 지어놓고 근디 이집이 맘으 든다, 맘으 안든다 근데요. 근디 우리가 지어논 집은 맘으쏙 든대요. 어디가 어찌서 그런가는 모르지만 맘에 든다는거셔, 그 사람이. 


글고 집을 똑같이 지어놨어도 무신 수가 있는고니 그냥 섣불리 져 논 집은 쉽게 썩어요. 어찌서 근가는 나도 모르겄어. 우리가 지은 집은 그런 일은 없거든. 근디 그런일이 많이 있어요. 그런 것이 정성과 그 사람 힘이 거그가 다댐겨야 되는 거 같어. 한 오년 전인가 향교에 있는 누각을 수리를 했어요. 업자가 맡어서 수리를 허는디 마루를 다 괴야놨네. 전부 괴야놨어요. 나중에 이것을 어떻게 헐 것이여. 이 막대 판자가 딱 맞게 때리서 들어가게 맨들어야는 것이지 그래야 이게 말러도 들 훌쩍거리거든. 아조 이것을 전부 다 괴야놨어. 


마루가 괴야서 놓는 것이냐고. 이게 뭣이냐고. 암말 못허지. 바깥으로 나온 놈들은 또 다 쓸이냈드만. 그서 어찌서그런다냐 헌게 곧 부서지야 돈을 번대요. 부서지야. 돈을. 자기의 기술 본위를 생각지를 안혀요. 무조건 돈만 생각허지. “한옥 짓는 목수는 노가대가 아니여”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말로 히서는 잘 안돼야요, 직접 실천을 히야 실천험서 이야기를 해야지. 시방 밑의 제자 영철이라고 그 사램이 애덜을 데리고 일허는디 한옥학교를 대닌사람이 넷인가 다섯인가 있어.그 사람들 와서 본게 아무것도 못혀. 아무것도 못혀. 핵교를 대님선 배왔다는디도 잣대를 댈 중을 몰라. 잣대 잡는 법부텀 알어야는 것이요. 첫째 이 눈금부터 알어야요. 


그것이기본인디. 긍게 사람이 자만허믄 안돼요. 여그 집을 지어갖고 집이 맨들어 졌다고 아 잘 됐고나 허고 만족허믄 발전성이 없어요.집을 이 짝으서 보고 앞으서 보고 옆으서 보고 흠을 찾아서 고쳐가야 혀. 다음으 고쳐서 혀도 또 보믄 모지란 데가 또뵈야. 그럼 또 고치고. 그래야 발전을 혀. 이 한옥을 짓는 사람은 한옥 짓는 목수는 노가대가 아니고, 일본말로 노가대가아니라 예의를 지키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그냐믄가정집을 지러 가믄 그 주인을 상대허고, 재실을 짓게 되믄그 문중대표를 상대혀, 어른들을. 근게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지 무례하면 안되요. 무례허믄. 아무리 잘 헌다해도 대표자 눈에 거슬리면 못된 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믄 일을 못허거든요.


그런 것을 잘 챙기면서 행동 헐 줄 알어야히요. 그러고 구경허는 사램이 와서 얘기험서 얼풋얼풋 한마디썩 허는 소리가 있어요. 들은 풍월로 한마디썩 허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혀. 알도 못허는 것이 씨부린다고 싫어허는 사람이 많지요. 허지만 저 사람이 어딘가 지 맘 안든게 저런 소리를 허는거거든. 그믄 그 자리를 알아둬얀당게. 그러고 그 사람으로인해서 내가 깨닫는 것이 있어요. 그렇게 생각허고 일을 히야지 기술도 늘려가야허고 자꾸 그렇게 히나가야는 것이지기양 무조건 저 사람이 얘기헌다고 나삐 생각허고 그럼 안된다고. 그런 것 저런 것을 여러 가지로 이해헐 중도 알고 예의범절도 알고 내가 소득헐 중도 알고 여러 가지로 다 생각을해야 모든 작품이 다 제대로 빠지는 것이지 건성으로 지가잘헌다고 앞장서서 큰소리 치고 대니믄 안돼야요. 


항상 내가모지래는 사람으로 알으야 혀. 그리야지 자기가 너무 자만히서는 절대 안된당게요. 그런 얘기를 늘 얘기해요. 건넘고 그리서는 안된다, 사람이 건넘은 것은 안된다. 암먼. 1935년, 부안출생 김정락 대목장 명인 그의 나이 17세 때 도편수 김형오를 만나 한옥 건축의 길에 발을 디뎠다. 4년여 후 20대가 되어서 도편수 조형선을 만나 대목장 기능을 3년여 동안 사사했다.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故고택영 옹으로부터 고건축의 으뜸인 다폿집을 사사, 8년 동안 한옥 건축 기능을 전수받으며 50여 년간 한옥과 함께 해왔다.


전주시 한옥마을 소재 전통한옥생활체험관, 정음시 이평면 동학혁명유적지 말목정, 강원도 원주시 소재 부안김씨 한옥생활체험관, 전남 담양 소재 하동정씨 재각, 충남 천안시 소재 수자원공사 전망대 등 30여 채 이상의 한옥건축물을 지었다.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76호 남고서원 해체보수, 충청남도 거익선생 신도비각 해체복원공사,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 56호 심덕부 가옥 해체복원공사,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 74호 고부향교보수 등 전국의 지정문화재 모수 및 해체복원공사에 참여해왔다.슬하에 8남매를 두고 있으며 지금은 부안읍 매요리에서 후계자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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