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다시보기 - 완주 5
사랑이 그렇듯 완주도 육감적이지 - 밥장 일러스트레이터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은 안다. 인연이란 게 하늘에서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연을 가장하여 자꾸들이대야 확률이 높아진다. 대학 다닐 때 연애의 달인이라불리던 친구는 말했다. 길거리에서 처음 보는 여성들에게말을 걸어도 17퍼센트는 차 한 잔정도 마실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일단 말부터 걸어보라며 소심한 나를 도닥거려 주었다.
완주군과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2009년 초 작은도서관에 벽화를 그리고 싶다고 온 동네에 떠들었더니 기회가 찾아왔다. 완주군 도서관 담당자가 메일을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우리 완주군은 전라북도 전주시를 둘러싸고있는 농촌입니다.상관면 기찻길 작은도서관은 완주군 도서관과 가장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주민들의 문화 욕구는 오히려 가장 큽니다. 작은도서관이 생기는 아파트 옆으로 신리역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물이 맑아 만덕산에는 정수사라는 천년 고찰이 있습니다. 알카리성 유황온천수도 유명합니다. 작은도서관을 조성하면서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던 명필 창암 이삼만 선생의 문화도 이 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기찻길 도서관에 그림을 그릴 곳은 유아 온돌 공간 옆 벽면입니다. 면적은 가로 3미터,높이 2.4미터입니다. 예쁜 그림을 주시면 널리 자랑하겠습니다. 벽화 재능기부로 맺어진 인연 얼른 붓과 물감, 물통과 팔레트를 챙겨 트렁크에실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핸들을 잡았다. 여행을떠나는 기분이었다. 완주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이틀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기찻길 작은도서관이란 이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서관에서 꼬물꼬물 기찻길이 뻗어나가고 아이들 얼굴을 닮은 꿈붕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그렸다.그림을 마치자 도서관 담당자가 수고했다며 저녁을 사주었다.
아중역 근처에 한정식을 하는 식당이었다. 그때는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완주에 푹 빠지게 되리라는 걸 말이다. 터닝포인트는 이런 식이다. 언제나 과거형이다. 밥상 위에 놓인 반찬 하나하나가 눈과 입맛을 사로잡았다. <미스터초밥왕>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입 안으로 음식이 들어갈때마다 밥알과 반찬이 입 속에서 탱고를 추었다. 그 뒤로 서울에서 말도 안 되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때마다 나도 모르게 완주를 떠올렸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말이다. 완주에 대한 사랑은 혀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랑이 그렇듯완주 역시 육감적이다.
2010년 10월 마른 침 다시며 서울의 밥맛에 애써 적응할무렵 메일을 받았다. 완주군 기찻길 작은도서관을 담당했던분이었다. 날 파블로프의 개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밥장님이 완주군 상관면 기찻길 작은도서관에 벽화를 그려주신 뒤 변변한 문화시설 하나 없던 상관면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 3월 개관한 뒤 인구 5,100여명 중 1,000여 명이 독서회원에 가입하였습니다. 꿈붕어그림 아래서 책을 읽고, 문화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각종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답니다.이제 꿈붕어 벽화는 기찻길 작은도서관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곳을 찾으시는 분들마다 도서관을 더욱 밝게해주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그림 덕분인지 몰라도 이용자도많이 늘었습니다. 그림 속 꿈붕어들처럼 주민들의 꿈과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고맙습니다. 메일을 다 읽고‘그렇게 고마우면 밥이나 한 번 더 사지’라고 말할 뻔했다. 내가 워낙 유치한 인간이기도 하지만 완주의 밥맛 앞에서는 별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욱 하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예의를 갖춰 답장을 보냈다. 그래도 허기는 여전했다.
내 뱃속을 알았는지 담당자는 한 달 뒤에 또메일을 보냈다. 밥장님. 부탁이 있어요. 완주군 소양면에 철쭉 작은도서관을 조성 중인데 하얀 벽면을 남겨놨어요. 철쭉 농사는 완주군 소양면의 생업입니다. 붓글씨와 농약 사용법을 가르치던 주민자치센터 1층에작은도서관을 만들고 있습니다. 도서관이 생기면 조용하던소양면에 재잘재잘 이야기거리가 생기고, 꿈을 꾸는 장소가될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과 어린이들은 아무래도 그림을 볼기회가 적습니다. 작은도서관에서 밥장님의 그림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장님께 재능 기부를 부탁드립니다. 곧바로 붓과 물감, 물통과 팔레트를 챙겨 트렁크에 실었다. ‘와우. 이번에는 뭘 또 맛있는 걸 먹을까?’서울에서 완주까지 세 시간 동안 달렸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철쭉 작은도서관이란 이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꽃분홍 철쭉들이 피어있는 사이로 아이들 얼굴을 닮은 숲의 요정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맛깔 나는 완주 음식에 흠뻑 빠지다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완주 군수님이 점심을 사주었다. 그냥 밥집이었는데 청국장이 끝내줬다. 흔히 청국장하면 똥 냄새를 떠올린다. 그래서 나도 거의 먹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청국장은 달랐다.
역겨운 냄새는 전혀 없었다. 솥에 지은 밥을 슥슥 비벼 입 안에 넣으니 2년 전 그때처럼 밥알이 춤을 추었다. 눈알마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밥도둑이 따로 없었다.점심을 먹고 맥주 공장에 들렀다. 공장장님이 마중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맞춰 입었다. 맥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마무리는 역시 시음이었다. 맥주 좀 홀짝거려봤다는 사람들에게 맥주 공장은성지나 다름없다. 이른바 원액이라고 불리는, 맥주 탱크에서갓 짜낸 생맥주를 마셨다. 마셔본 사람은 안다. 목젖을 타고내려오다가 느닷없이‘탕!’하고 가슴을 때린다. 누가 시키지않아도‘크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그림을 핑계로 이틀을 머물었는데 끼니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군수님은 물론 면장님, 도서관장님, 지역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완주의 맛을 보여주었다.
콩나물국밥, 연잎밥, 다슬기 비빔밥을 차례로 먹었다.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다는 상동면의 명품 곶감 고종시까지 챙겨 먹었다. 구제역청정지역인 완주군의 한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야들야들한육질은 숯불 위에서 금세 익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냄새는 무슨 주문처럼 소주를 불렀다. 이번에도 역시 완주는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서울살이에 집 나간 입맛까지 되돌려주었다. 맛도 맛이었지만 인심도 무척 훈훈했다. 젯밥에더 관심 있는 유치한 그림장이인 줄 알면서도 애써 따뜻한밥으로 대접해 주었으니까. 완주를 생각하면 침이 고인다 지난 1월에는 모 방송국에서 재능 기부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
촬영 나온 PD는 어디서부터 찍을지 물어보았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완주 작은도서관부터 하자고 추천하였다. PD와 함께 기찻길 작은도서관과 철쭉 작은도서관에 들렀다. 카메라 앞에서 아이들에게 그림 그려주고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도 주책없이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만약 머릿속을 찍었다면 재능기부 다큐멘터리보다는 맛집 기행 프로그램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매슬로우가 말했던가. 욕구에는 단계가 있다고. 자아실현은 멋있다. 하지만 자세 안 나오는 식욕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기 마련이다. 오늘도 노트 한쪽에 상동면 작은도서관과 홍시 갤러리를 어떻게 꾸며볼지 빼곡하게 적어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열심히 끼적거린다.어머니는 내게 체모가 나기 전부터 연애를 잘 하려면 일단맛있는 걸로 여자의 배부터 부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완주에 오면 난 여자 마음이 된다. 능이버섯 무침과 적당히 삭힌홍어를 잘 익은 김치에 싸서 오물거리고 나서 완주를 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완주는 애인의 입맛처럼 육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