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다시보기 - 정읍 1
황토길 위에서 피워낸 예술, 그 다채로운 결실 - 황재근 기자
정읍은 역사가 글로 기록되기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터 잡고 살아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인근 부안과 고창에 자리 잡았던 선사 시대인들은 동진강과 만경강을 따라 점차 내륙으로 퍼져나갔고 정읍의 황토에 청동기 농경문화를 가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뻘건 황토는 백제의 흥망을 지켜봤고, 선비들의 꼿꼿한 절개를 키워냈으며, 동학혁명과 의병전쟁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세발의 솥, 정읍·고부·태인 오늘날의 정읍시는 오랜 기간 각기 다른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세 고장의 합일체다.
백제시대 정촌현(井村縣), 대시산군(大尸山郡),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으로 불렸던 세 고장은 각각 정읍, 태인, 고부로 맥을 이어오다,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정읍군 8개 면, 고부군 15개 면, 태인군 18개 면이 정읍군으로 통합됐다. 이후 정주시와 정읍군의 분리·통합을 거쳐 오늘날 도·농복합도시 정읍시에 이르렀다. 규모나, 역사 면에서 인근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고부나 호남대로에 위치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태인이 그보다 작은 정읍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인 것이다. 정읍향토역사연구가 이진우 씨는 정읍의 문화권을 단일문화권이라 보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통합 정읍군·시가 출범한지도 어언 100년이 가깝지만 여전히 정읍과 고부와 태인은 별개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읍면지역사람들이 도심지에 일을 보러 갈 때‘정읍 간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행정 쪽에서도 도로명을 붙일 때 정읍 수성동-신태인 간 도로를 정신선이라 하는 경우가 이런 인식을 보여준다.
”이씨는“일제는 과거 1천수백년의 역사성을 지닌 고부군을 해체하고 고부와 태인을 자신들보다 작은 정읍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100년 가가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읍과 고부 태인의 역학구도는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정주읍이라 불리던 도심권이 정읍을 구동하는 중심이 됐다”고 설명했다. “오늘의 정읍은 옛 고부와 옛 태인과 옛 정읍이 만나 이루어진 트라이앵글로서 삼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그 소리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정읍은 저항과 혁명의 고장이기도 했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의 주요거점이기도 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처음 지펴지고 가장 크게 타올랐던 곳이다. 또 1906년에는 최익현과 임병찬이 호남 최초의 항일의병을 무성서원에서 일으키기도 했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나주와 함께 정읍의 농민운동은 강력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역사는 대외적으로 정읍을 반골기질의 저항적인 고장이라는 이미지로 각인시키기도 했다. 백제부터 전해온 전통 시가와 소리 정읍은 복잡한 역사만큼,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간직한 고장이다. 이진우 씨는“정읍에는 정읍사와 상춘곡 등 시가문학의 전통과 우도농악과 시조창 등 소리예술, 증산교, 보천교 등 신흥민족종교를 포함한 종교문화, 태인방각본과 태산선비문화권으로 대표되는 학문과 선비문화 전통이 전해 내려온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정읍사는 그 역사성이나 상징성 면에서 정읍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읍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이자 한글로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가요다. 행상의 아내가 달밤에 높은 산에 올라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이 노래는 전해져 내려온 오랜 세월만큼이나 우리음악에 깊은 영향을 줬다. 이용찬 정읍문화원 사무국장은“정읍사는 삼국통일 후 신라악부에서 고구려, 백제의 전통음악들을 모아 연주하면서 이어져 내려왔다.
그 이후 후대 왕조들의 궁중음악으로 전해지면서 신라의 처용무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시대 무고정재 때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조선중기에 들어서는 가사를 부르지않고 관현악으로 쓰였고, 수제천(壽齊天)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궁중의례와 연회 때마다 연주됐다”고 설명했다. 수제천은 이후 중종 때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노래라 하여 궁중에서는 더 이상 연주되지 않았으나 민간에서는 계속 전승돼 내려왔다. 1971년에는 프랑스 세계민속음악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부터 다시 주목을 받았다. 종묘제례악을 복원하는데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호남우도농악,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하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정읍은 정읍사예술회관과 정읍사국악원 등 정읍사를 활용한 문화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관에서 추진하는 사업 못지 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정읍문화원의 수제천연주단이다. 지역문화관 차원에서 연주단을 운영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이용찬 사무국장은“그동안 정읍에서 수제천은 향제 줄풍류의 전통을 이어온 선생님들을 자비를 들여가며 전승해왔다”며“이런 맥을 보존하고자 1996년 정읍문화원에서 연주단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수제천연주단은 전통음악 강사들과 수강생들 15명 가량으로 구성됐습니다. 강사들이 주선율을 담당하고 수강생들이 보조하는 역할이지요.”이 사무국장은“현재 연주단은 수제천 연주를 기본으로 다양한 전통음악을 다루고 있지만 고전음악을 배우려는 수강생도 줄어들고 예산도 부족해 명맥을 유지하는데 만족하는 실정”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정읍이 자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소리 문화적 전통은 호남우도농악의 본산이라는 것이다. 1920년대 당시 정읍에서 번성했던 보천교가 농악을 종교음악으로 삼고 각지의 명인을 불러 모으면서 정읍농악의 명성이 전국에 퍼졌다. 이후 1980년대에 유지화, 김종수 명인을 중심으로 옛 명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져왔다. 그리고 꾸준한 조사·연구와 후진 양성 등을 통해 지금 정읍농악은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 바탕에는 지난 2001년 건립된 우도농악전수회관이 그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향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오랜 예향의 전통을 갖고 있는 정읍.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정읍에서 창조적인 문화예술활동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는 비단 정읍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경제적 중심뿐 아니라 문화적 활력마저도 대도시가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동렬 정읍예총 사무국장은“정읍에서는 예총 이외의 민간 문화예술단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국악과 농악관련 단체들 외에 다른 조직들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현재 정읍예총에는 약 3백 20여명의 회원들이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적지 않은 회원들이 있지만, 창작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고 공간도 부족해 아쉬움이 크지요. 대개 개인 작업실 등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회원들 간의 유대감도 약합니다.”현재 정읍예총은 시에서 예술창작스튜디오를 위탁받아 운영 중이다. 최 사무국장은“구 군청 건물을 리모델링해 전시와 창작공간으로 활용하도록 위탁을 받았지만 아쉬움이 많다.
공간을 만들 당시부터 어떤 전시의 용도로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형식적인 리모델링에만 그친 상태”라고 소개했다. 최 사무국장은 예술활동 정체의 가장 큰 원인을 시 행정조직과 문화예술인 간의 소통부재로꼽았다. 그는“무조건 관 탓만 할 생각은 없다. 우리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관에서 주최하는 사업설명회나 간담회에 가면 우리는 듣기만 하는 입장이 된다. 예술창작스튜디오의 경우도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활용할 것인지 문화예술인들과 사전 소통이 있었다면 보다 활용도가 높은 공간으로 쓰였을 것이다. 문화예술사업에는 보다 넓은 안목과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