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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칼럼·시평 [저널이 본다]
참된 '살아남음'을 위하여
이종민 본지 주간(2003-09-08 09:47:06)

우리 문화저널의 편집진들은 지난 연말 문화저널 창간 2주년 문화행사 김덕수패 사물놀이 공연을 마무리하면서 정리되지 않는 여러 가지 사실들 때문에 당황해야만 했다.
물론 우리가 가졌던 우선의 느낌은 뿌듯함이었다. 그간 우리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점을 우리는 이 지역 어느 문화 행사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많은 청중과 이들의 열렬한 반응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매일 늦게 귀가하는 것을 탓하던 가족들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줄 때, 자신의 전공 혹은 전문분야를 소홀히 한다며 염려를 해오던 직장 동료들이"구경 잘 했소"라고 감사의 말을 전할 때, 우리는 학예회에서 어려운 대사를 틀리지 않고 끝낸 어린아이처럼 몸이 달아오름을 느끼기까지 했다. 1부 공연이 끝난 후 '비나리'의 제물을 나누어 먹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 예상 밖의 성황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야 우리의 기획 능력도 상당하구나'하는 어줍잖은 자부심마저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흥분은 잠시, 이러한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고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우리의 마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물론 우리가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살아남음'이었다. 재물의 축적이나 사회적 출세 혹은 허영심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처해있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모임들-감히 운동을 표방하지는 못할지라도-이 해결해야할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이 '살아남음'의 문제이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또 돈 없이는 아무 것도 꿈꿀 수조차 없는 각박한 자본 만능의 세상에서는 이러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9그래서 소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적 물적 재생산구조의 확충을 강조한다.) 우리도 별것도 아닌 잡지를 그래도 거르지 않고(물론 합본호로 낸 적이 여러 번 있기는 하지만)내면서 또 '백제기행'을 한번도 빼지 않고 치르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심적 물적 빚에 싸이게 되었다. 우리의 처지를 이해해주시는 많은 분들로부터 원고료 한 푼 없는 원고를 청탁하는 것도 송구스럽게 되었으며, 잡지의 출판과 '백제기행'에서의 적자로 인한 빚도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보고자 기획했던 것이 바로 이번 문화행사이다. 이제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적으나마 답례를 하고 또 '빚도 갚고'.
그래서 우리 편집진은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후원을 구해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갈등을 겪게 되었다. 후원이 후원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우리들 작업의 방향에까지 유형무형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살아남음'에는 설득력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한 살아남음인가'가 분명하게 규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의 중요한 무엇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우리의 감승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섭외의 과정에서 편집위원 개개인이 겪게 된 알량한 자존심의 손상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본의 횡포로 인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본의 힘을 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번 일을 치르면서 우리 스스로가 자본의 논리에 굴복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워버리기가 수비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우리 잡지의 정기독자들의 항의 혹은 불만에서도 확인될 수 있었다. 초대권을 한 장밖에 보내지 않은 결례에 대하여 대부분 우리의 처지를 알고 있는 독자들은 양해를 해주었지만 적지 않은 분들이 이 '반문화적 상업주의'를 탓하였다. 심지어는 이를 질책하는 의미에서 참여를 거부하기조차 했다. 야속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우리들 자신이 너무 '돈벌이'에 열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쉬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또 하나 치명적인 '상업주의'는 이 행사의 선전지에서 확인된다. "우주를 뒤흔든 영혼의 소리"라는 선정적 구호는 그렇다 하더라도 왜 하필 가장 한국적인 악기에 의한 공연을 선전하면서 외국 신문들의 평만을 인용했단 말인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껄끄러움이 분명 있다.
외국 신문의 평을 통하여 이 지역 주민들이 사물놀이의 참된 의미를 깨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이는 분명 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건강하지 못한 대중성에의 함몰이요 야합이라는 비난을 면하기는 쉽지 않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역주민들에 잠재되어 있는 건강한 정서를 개발하고 이에 호소할 수 있는 문화예술을 통하여 건강한 의식을 일깨운다는 지역문화운동의 일차적 책무를 포기한 것이며, 현란하고 선정적인 문화예술 행위를 통하여 대중들의 건강한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려는 지배세력들의 음모를 방조하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살아남기'위한 대중성 확보의 노력이 야합의 꼴이 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우리들 들뜬 마음을 내리누르고 있다.
또 하나 우리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하는 것은 지역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하면서 이 지역 공연단체들을 무시하고 기왕에 많은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이번 같은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그리하여 우리와 같은 모임에서 주관하지 않더라도 상업적인 언론매체 등에 의해 초청될 수도 있는 단체를 굳이 택해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도 물론 '살아남는 것'자체가 절박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취해진 것이지만 우리의 본령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의 작업은 결코 문화가 서울에 너무 편중되어 있어 이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은 "중앙과 비교하면 변방이 아니라 사실은 쓰러져 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공급할 전위의 자리"라는 사실이 우리들 노력의 흔들릴 수 없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공연자들은 분명 자신들의 명성에 값하는 장인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점이 바로 성공(흥행)의 원인이 되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점이 다시 우리를 당황케 한다. 이들의 철저한 프로의 정신이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구체적 삶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전래의 전통적 일과 놀이의 문화에서 나온 사물놀이가 이제는 일과는 무관한-시장경제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하나의 잘 만들어진'상품'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고도의 상업성에 근거한 전문인들의 유희를 일반 대중에게 제공해줌으로써 '문화적으로 소외됨을 극복했다는 허위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구심은 특히 이 지역 문화 패들의 조잡하기는 하지만 철저한 의식으로 무장된 공연형태와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겠다.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는 우리의 실생활과 관계없이 손님이 찾아왔을 때 '이게 얼마짜리요'라며 내어놓는 골동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활 속에 사용되어 우리의 땀과 때가 배어있는 밥그릇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성공적이 공연의 원인들이라 할 때 이를 기획 초청한 우리들은 만족해 할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 의도(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는)의 건전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제적 이유 때문에 프로그램까지도 팔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러한 성공적 공연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이번 공연의 준비과정에서 필요했던 포스터, 프로그램, 선전지, 티켓 등을 인쇄하느라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작업인 잡지발간이 늦어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살아남음'은 적지 않은 희색을 통하여 가능하였다. 이를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살아남음에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적 여건을 도외시한 명분론으로 인하여 어렵게 구축한 현재의 상황을 어리석게 망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준비의 부족으로 청중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겨 주었던 정태춘의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공연이나, 참신한 기획으로 많은 인상을 남기고도 공연장의 부실함과 연주자들의 불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성공적인 마무리를 하지 못했던 호남사회연구회 주최 '우리노래 우리가락'과 같은 문화행사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우리가 이번 문화행사를 치르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대중성과 '살아남음'을 위하여 상업주의에 함몰되거나 거창한 명분과 이념만을 내세우다 '살아남지'못하는 어리석음을 함께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노력에 더욱 많은 애정의 격려와 비판의 채찍질이 가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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