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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연재 [백제기행]
흙과 불과 장인의 정신
박남준 시인(2003-09-08 10:12:49)

이번 백제기행은 주로 청자기를 만들던 옛 도요지터 중심이다. 된장찌개를 구수하게 끓여 내 담던 뚝배기나 장독대에 늘어서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지켜 주던 옹기 항아리 등을 만들던 그런 곳이 아니라…. 그러나 우리를 실은 차는 이미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있었다.
술이 나의 심신을 썩게 만든다는 말을 실감하리만큼 간밤의 괴음으로 인해 모처럼 참여하는 백제기행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늦은 밤 그가 찾아왔다. "형! 술 한잔하지.""뭐라고 해직교사가 무슨 돈이 있어서, 아무튼 나가자" 무던히도 착한 그가 교사로서 교육이 지배 권력층의 지배이데올로기 주입의 이용매체로 전락하기를 거부하고 입시교육, 관료교육, 통제교육 등의 비인간적인 틀을 벗고 자주적인 인간화 교육, 진심 어린 존경과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참교육의 실현을 위해 노심초사 교직원노동조합운동에 관여하다. 해직된 지도 오래지 않았다. 못난 선배는 어깨를 다독여 주며 말했다. '축하한다. 그 얼마나 장한 일이냐, 그릇이란 용(用)의 쓰임은 담긴 것을 진정을 비울 수 있어야 새로움이 채워지는 것, 그릇이란 비워있을 때 비로소 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빈 그릇이 된 네가 이제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큰 쓰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지고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해낼 수 없다고 믿었던 사회적 통념인 노예적 사고, 식민적 관습을 깨트려 버린 너의 용기가 이 반쪽의 땅을 이만큼이나마 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역사 앞에 떳떳한 너의 실천에 나는 큰 손뼉을 쳐 보낸다.'
저 숱한 빼앗김과 빼앗음의 싸움이, 농민들의 피와 땀과 살이, 아우성의 통곡의 함성이 쓰러지고 일어난 땅의 수난사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김제만경의 너른 들을 달려 '흙과 불과 장인의 정신'이라는, 바로 비어 있음으로 무언가를 담는, 하늘인 밥을 담고 땅의 어진 물을 담는 그릇을 만들던 이 땅의 역사를 더듬어 단절된, 그러나 결코 단절되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여덟 번째 백제기행이 시작되는 날 묘하게도 그날은 전북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 2차 범국민지지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차는 달린다.
지평선을 이루는 저 익어 가는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달린다. 해마다 물가안정대책이라는 허울 좋은 수탈정책으로 묶여야만 하는 추곡수매가의 애환은 언제야 만삭으로 춤추는 황금의 들판에 허리 굽혀 땀 흘리는 농부들의 모진 세월을, 깊게 패인이랑 같은 주름진 얼굴을 훤한 웃음의 소리들로, 가슴 벅찬 설레임으로 큰 물결 큰 물결치게 할까.
차가 처음 도착한 곳은 부안군 유천리, 전남 강진지방과 함께 우리나라 청자의 대표적 제작지 중의 한곳이었던 사적 69호로 지정된 부안 유천리 도요지였다. "고려청자의 특징은 그릇을 만드는 4가지 공정, 즉 형태를 만들고 문양을 새겨 초벌 굽고 유약을 바르고 불에 구워내는 이 모든 행위를 한 사람이 했다는 것이 조선시대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 넓은 벌판의 구릉 주위로 40여 개소의 가마터가 있어서 순청자·상감·철회·진사청자·백·철유자기 등이 생산되었던 곳입니다." 강사로 초빙되어 오신 前전주 시립박물관장 전영래 선생님의 말씀대로 지금은 다만 옛적을 알리는 기념비만 덩그마니 언덕 위에 서 있을 뿐, 그 먼날 도공들의 숨결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마터의 불길도 사위어버린 오래, 단절된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지금이 바로 이곳 옛 도요지에도 미치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흘러올 수밖에 없었는가, 비닐봉지들과 빈 병들이 주위에 널려 있는 시멘트의 기념탑신에 박혀있는 청가 그릇 조각들만이 , 아니 그 조각 몇 개마저도 이곳저곳 누군가가 떼어가버려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은 채 옛날을 전하고 있었다.
이원경씨, 그는 30대의 젊은 도예가다. 흔적조차 찾아볼 길 없는 이곳 유천리 도요지에 뿌리내려 그릇을 빚던 그 옛 장인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가 바로 이곳 유천리 도요지의 기념탑이 서있는 언덕 아래 10여년 가까이 살고 있다는 일이다.
40여 평이 될까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니 꿈결처럼 들려오는 옛 도공들의 숨결, 지금은 비록 미약하나마 이제 곧 큰 숨결로 우리 곁에 다가설, 그가 땀 흘려 빚은 그릇들이 가마 속에 들어가 곱게 단장할, 바로 밥과 물을 담을 그릇들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옛날의 장작불을 지펴가며 치성으로 굽던 흙가마가 지금은 전기나 가스 가마로, 손발을 써야만 했던 물레가 스위치만 올리면 저절로 돌아가는 전기물레로 바뀌었지만 어루만지듯 흙을 다듬어 자그마한 항아리를 만드는 과정을 보고 몇 사람이 해보겠다고 손을 걷어붙였지만 그것은 눈썰미로 만도 알량한 손재주로 만도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쉬움이 남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시간을 더 내어 모든 참석자들이 잘되고 못되고 간에 그들의 손으로 흙을 다듬어 그릇을 빚어 보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빡빡이 짜여진 일정으로 인해 전통자기의 재현에도 욕심은 있지만 그것에만 고집하지 않고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이원경씨의 작업실을 뒤로하고 우리들은 서둘러 차를 타고 다음 방문지로 떠나간다. 길가에 세워진 반계 유형원의 유적지 안내판이 떠나가고, 초가을의 들녘에는 붉게 붉게 그 치렁치렁한 머리를 이제 막 단장하며 익어 가는 수수밭이 떠나가고, 하얗게 머리 새어서 새어죽어 꽃이 되는 억새들이 떠나가고, 서해의 예전에는 꽤나 큰 포구였던(지금은 뻘밭의 퇴적으로 한가한 갯마을이 되어 버린) 곰소 바닷가의 주변으로 펼쳐진 염전이 비포장의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흙먼지 날리며 더나갔다.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여기가 2차 방문 도요지인가, 길가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사적 70호를 알리는 부안 진서리 도요지 안내 팻말이 서있었다. '유천리 도요지와 함께 부안 지방의 대표적 청자 생산지, 해변을 중심으로 구작, 연동, 신작부락 주위의 구릉에 35개소의 가마터가 산재 유천리에서부터 함께 동행한 이원경씨는 유천리가 주로 관청 등에 소요되는 청자를 굽던 곳이라면 진서리 도요지는 서민들이 쓰는 생활자기를 생산하던 곳이라 할 수 있다고 몇 마디 덧붙였다. 그래, 그래서 이곳 진서리 옛 도요지에는 그 한한 시멘트의 비문마저도 없는 것인가. 이런 나의 추측은 너무 소시민적 사고에의 비약은 아닌가?
"청자의 문양 중에 가장 특색 있는 것은 수향문(水鄕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향문은 그릇을 굽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변, 주로 물가의 풍경을 청자의 문양으로 삼은 것으로서 버들, 수련, 갈대, 원앙새, 오리, 기러기, 학 등을 문양의 소재로 삼은 자연주의적 서민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오히려 그러한 것이 수요자인 귀족층의 동경정서를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전영래선생이 청자의 여러 문양 중에서도 수향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곳 珍書리 옛 도요지터는 바닷가를 뒷배 경으로 소나무 숲이 한가한 가을 바다 바람소리를 일며 높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먼날에도 그랬을까, 바닷가엔 마치 수향문의 발생사실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집오리들이 뒤뚱거리며 뻘밭의 바다 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전남 강진지역이나 이곳 부안 지역, 고려청자의 대표적 도요지였다는 곳 두 지역이 한결같이 바닷가를 주변으로 하여 터를 잡았을까, 중국 북송시대 청자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강남지방의 월주요(越州窯)와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인가, 혹은 운송에 편리한 바닷길을 지척에 두었기 때문인지, 전영래선생을 중국 강남지역의 풍경(풍토)과 비슷한-수향문의 전래과정-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함께 생각해 보자고 하신다.
해안지역이라서인지 점심을 하기위해 들린 부안 군청 앞의 거송식당에서는 어리굴젓이며 가오리찌개, 부서구이 등 맛깔스런 해산물이 상을 가득 채우며 식욕을 돋구었지만 해장이나 하라고 소주잔을 내미는 이병천 형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나의 뱃속은 간밤의 숙취로 인해 무엇을 먹어도 풀려질 것 같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근처에 있다는 전통찻집을 찾아갔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이 닫혀 있어서 모처럼 대할 수 있었던 전통차 대신 우리는 가까운 다방에 들려 커피나 음료수를 들며 이런저런 이야기와 밀린 인사들을 나누었다.
붉은 고추가 길가에 널리고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춤추는 고즈넉한 가을 길, 저 만큼 산자락의 개암사울금바위가 성큼 달려와 뒷걸음치는 2차선 국도를 따라 우리는 고창 고수자기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논둑길을 걸어 고창군 고수면 와촌리, 동곡요(東谷窯)의 유춘봉씨 집을 찾았다. "쩌그 방앳간옆에 뻐런 양철지붕이 그 집이요." 가는 도중 집위치를 잘 몰라 길가 촌로 한분께 물었더니 구수한 숭늉냄새가 나는 말투로 가리켜 주신다. 유춘봉씨는 계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작업실의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무슨 대회에서 상을 탔다는 작품도 구경했다. 작년까지는 사용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언덕의 비탈 그대로를 이용하여 만든 보기 힘든 흙가마가 이제는 마치 흉물처럼 버려져 있는 옆에는 메밀꽃이 가을바람에 하얗게 흔들리고 있었다. 몇몇은 사진을 찍고 몇몇은 동심에 적어 아이들과 함께 방아깨비를 쫓고 있었다.
"고려청자의 독창적인 수법은 상감수법입니다." 유춘봉씨의 작업실 바로 곁에 붙어있는 내동정미소 앞 살구나무 그늘 아래서 전영래선생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상감이란 음악으로 문양을 새긴 곳에 백토나 흑토 등을 넣어 만든 것을 말합니다…."
막걸리 한잔에 낮잠 한 소금이 저절로 떠오르게끔 하는 정감 어린 길가 모정을 지나면 6대째 자기를 굽는다는 나희술씨의 고수자기 전시관이 있는 고수면 황산리 평촌, 그릇 하나하나마다의 높은 가격에 우리는 알량한 주머니타령만 늘어놓고 83년도에 발굴되어서 아직 그곳에는 많은 그릇조각들이 남아있다는 용계리 도요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마라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우리는 차안에서 문화저널전속가수(?)라는 윤희숙씨의 노래지도로 열심히 가사를 외며 용계리에 도착했다.
발굴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앞서의 도요지터에 있던 안내팻말마저 아직 들어서 있지 않은 이곳 용계리 도요지터에는 그야말로 무수한 그릇조작들이 쌓여 있었다. 이제는 한쪽으로 넓은 뽕밭이 들어서고 잡목과 풀덩쿨로 뒤덮여 있는 곳이지만 비로소 도요지터였다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었다.
벌써 가을 해가 길게 몸 누이며 땅거미를 만든다. 저수지가 바라보이는 망향정이라는 정자 아래서 토기의 발생과정과 발전과정을 들으며 몇 사람의 질문을 끝으로 '흙과 불과 장신의 정신'이라는 8번째 백제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용계리에서 주워온 그릇조작을 쓰다듬어 보았다. 이 깨어진 그릇조각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다시 흙이 되어 온전한 그릇으로 만나기를 고대하듯 우리는 진정 무엇을 고대하고 있는가
이제 그릇을 빚어야겠다.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나눠야할 소중한 사랑을 담을 그런 그릇을 빚어 야겠다. 분단과 독재와 외세를 물리칠 자주·민주·통일의 참세상을 담을 그릇을 빚어야겠다. 다시는 조각으로 떠돌지 않을, 다시는 조각으로 깨어지지 않을 그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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