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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5 |
임안자의 내가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1-05-06 08:54:45)
상 세바스챤 국제영화제 2 상 세바스챤에서 빛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 임안자 영화평론가 상 세바스챤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음에도 1994년에 그곳에 다시 갔던 이유는 내가 추천한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상 세바스챤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선정되었기 때문이였다. 정 감독과 영화세상 제작사의 안동규 대표와함께 초대를 받아 셋이 같이 참가했다. 정 감독은 1991년 페사로 영화제의 한국영화 회고전 준비 시절에 남부군(1989)에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으로 만났다. 그 후 1994년 봄에내 개인 프로젝트“독어권의 한국영화 순화상영”때문에 영진공사에 들렸을 때 유인택 제작자의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그 무렵 정 감독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이 영화를 정 감독은 <헐키>로 불렀다.)를 해외 국제영화제에 출품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큰 영화제들을 고려하기엔 시기적으로너무 늦은 감이 들어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늦게 열리는 상 세바스챤 영화제를 추천했다. 다만 다음 날 출국을 하는 바람에를 스크린으로 보지 못하고 스위스에 돌아와 안동규 대표가건네준 비디오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추천한 영화<헐키>가경쟁영화로 뽑히는 행운을 맞은 것이다. 그로서 <헐키>는 상세바스챤 영화제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영화로 기록 되었다.한편 상 세비스챤 영화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영진공은 <헐키>의 성공적인 진출을 계기로 스스로 홍보활동에 나섰다. 아주 우아한 호텔 마리아 크리스티나에서 <헐키>의 국제적 초연의 축하 파티가 열렸던 것도 영진공의 국제부에서 파견된 직원이 현지에 와있기에 가능했다. 좀 비싸긴 했지만 실내를 꽉 채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헐키>의 홍보 면에서는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1994년에 제42회를 맞는 상 세비스챤 국제영화제는9월 15일 저녁 8시 바로크형식의 아담한 빅토리아 유제니 극장에서 화려하게 열렸다. 이곳의 개막식장은 유럽의 4대 영화제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다. 그리고 극장옆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대서양의 해안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1999년부터 영화제의 행사는 현대식 건물쿠어쌀(Kursaal로 옮겨졌다). 참고로, 상 세바스챤 영화제서는 스페인어와 바스크어를 공식 언어로 쓰고 있으며 그에 따라 영화제의 공식 명칭은Festival International del Cine de San Sebastian(스페인어) 그리고 DonostiakoNazioarteko Zinemaldia(바스크어)다.상 세바스챤 영화제는 해마다 평균 2백여 편의 영화를 7개의 부문을 통해 소개하며 관객수는 15만 명 정도인데 8백여 편을 다루는 칸과 베를린에 비하면 아주 약한 편이다. 그런데다영화제의 시기가 유럽의 4대 영화제 가운데 제일 늦어 영화의 선정 면에서 선택의 폭이 넓지않다. 그 대신 이 영화제의 특징은 라틴 아메리카 영화를 집중적으로서 소개하는 점인데, 전적으로 남미 영화를 상영하는 오리존테스 라티노스(Horizontes Latinos) 부문이 따로 있을 정도로 남미 영화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건 물론 영화제의 설립시기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한 문제점이 없지 않다. 그 중에 수상, 특히 대상(황금 조개껍질)을 놓고 비평이 많은데, 그 이유는 스페인어의 영화에 수상의 혜택이 눈에 띄게 많이 가는 경향 때문이었다.<헐키>도 심사위원들의 공정한 심사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헐키>가 상영되던 날 프레스의 일간지에는“헐키는 할리우드의 식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수작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독주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영화계의 공통된 문제점이다”라는 호평이 실렸고 관객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그럼에도 <헐키>가 수상 명단에 올라있지 않아 솔직히 실망했다. 그러다 폐막 파티에서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아투로 립스타인을 만났다. 립스타인은 내가 1991년 상 세바스챤 영화제서 알게 된 멕시코 출신의 노장 감독으로 내가 <헐키>에 대해 말을 꺼내자 그는“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칭찬을 많이 해서 나도 관심을 가지고 봤고 심사위원 가운데 <헐키>에대상을 주자는 사람이 많았으나 결국 평범한 스페인 영화 <드문 날들> (Diaz Contados-감독이마뉴엘 우리베)에 대상이 돌아갔는데 이 영화제는 좀 그렇다”면서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만일 <헐키>를 다음해에 보았다면 심사원들이 모두 박수로 환영했을 거라”는 말로나를 위로했다. 그 말은 다음해인 1995년은 영화예술 탄생 1백주년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영화평론가들은 다음해를 기다릴 필요 없이 <헐키>에게 1994년의 국제영화평론협회상을 안겨주었다. 참고로, <헐키>는 1994년 국내에서 주는 감독상인 백상예술대상을 받았다. 내가 본 <헐키>는 영화의 타고난 숙명적인 양면성, 즉 문화 차원의 창조성과 이윤 추구의 시장성이 서로 맞부딪치므로 생겨난 영화문화 발전의 부조화 현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는 전쟁으로 가난과 고통에 찌들어 있던6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대자본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들어오면서 나타난 문화충돌의 현상을 젊은이들의 시각을 통해 익살스럽게 보여준다. 그런 반면 후반부에서는 세계 영화시장을 독점하려드는 꿈의 공장 할리우드의 식민주의적 전략에 삭발과 데모로 맞서는 영화인들의 후진 작업 환경 그리고 문화충돌의 산물인 정체성 상실과 혼동으로 인한 한국영화의 창작의 위기 문제를 90년대 한국영화가 공통으로 앓고 있는 증후군으로 묘사했다.<헐키>는 한때‘헐리우드 영화의 키드’였던 안정효 작가의 자선적인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은 90년대 초반으로 헐리우드영화배급사들이 국제적 무역자유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에서직접 배급을 시작하던 때였다. 영화의 크레딧에 한국 영화인들의 직배에 대한 대대적인 데모 장면이 떠오른 건 그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정지영 감독은 한국 영화인들이 한국영화시장을 지키기 위해 공동으로 만든“스크린쿼터”제도의 사수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었다. 스크린 제도는 스크린을 할당한다는 의미로 이미 1966년에 만들어졌으나 쓰지 않다가1993년 영화인협회에서“스크린 쿼터 감시단”이 조직되면서 실행에 들어갔으며 이 제도에 따라 국내의 영화관들은 일년에 최대 146일 최소 106일 동안 자국영화를 상영할 의무를 맡게 됐다.1946년생 정지영 감독은 불문과 출신으로 김수용 감독밑에서 조감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입봉 했고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남부군>,<하얀전쟁>과 함께 그의 역작에 속한다. 나는 1994년 상 세바스챤 영화제의 방문 뒤에도 부산과 전주영화제에서 정 감독과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쓰기 위해 그와 서면 인터뷰를 했다. 그의 대답을 여기에 소개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만든 동기는. 또 안정효의 원작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안정효 씨의 원작 하얀전쟁(92년)다음 작품이다. 하얀전쟁도 원작과 다르지만 헐키도 다르다. 안정효 씨는 영화가원작과 달라지는 데에 상당이 관용적인데 그의 표현을 빌리면 “소설가가 제공한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던 빵을 만들던 그건 영화감독의 몫“이라도 거다.헐키가 원작과 다른 점은 원작이 그냥 60.70년대의 대중문화 추억담이었다면 나는‘헐리우드가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 세대를 얼마나 어떻게 세뇌시켰는가’하는데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정효 씨는 그 소설의 미국출판을 위한 번역작업 때 소설에는 없던 영화 속의대사 (영화의 종반부에 테마를 은유하고 있는‘임병석이가헐리우드 키드한테 속았다’는 주인공의 대사-자신도 자신에게 속았다는 정체성 혼돈)를 넣어 부분 개작을 했다고 한다. 상 세바스챤 영화제에 대한 인상과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우선 가리비 조개 모양의 (영화제 마크)의 해안선이 너무아름다웠고 영화제 기간에도 있었던 바스크 민족분리주의자들의 테러(자동차가 불에 탔지 아마?)도 기억에 남는다. 폐막파티를 열었던 고성도 기억에 남고 임 선생님(필자)과 대화에 빠져 있다가 내 영화 상영시간에 쫓긴 것도. 물론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대상 수상작 (스페인영화)에 대한 기자들의 비난이었다. 임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었던 멕시코 감독에게 문제제기하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기억하는데. ‘최근3대 영화제서 스페인어권 영화들이 찬밥이다. 스페인어권 영화가 스페인어권 영화시장에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자구책이니 이해해 달라.’ 감독님은 90년대 말 헐리우드의 직배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위기에 빠진 한국영화의 국내 시장을 지키기 위하여 보호정책으로 만들어진‘스크린 쿼터의 사수’로 이름나 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 제도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 앞에서 갈수록 보호막 역할을 하지 못하는 듯한데 스크린 제도는 오늘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스크린쿼터는 146일에서 74일로, 즉 반절로 줄었다. 90년대 이후 빨리 발전해온 우리 영화가 탄력을 잃지 않고 아직은 시장에서 50%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과 유통의 변화가 우리영화계에 부익부 빈익빈(중대작 20%외에는 모두 소품들이다.) 현상을 촉진시키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매우 위태롭다. 저는 그때의 운동을 토대 삼아 타 문화예술인들과‘문화다양성 포럼’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문화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스크린쿼터운동이 문화다양성 운동이라면 모든 문화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류 대중문화때문에 소수문화가 도태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문화다양성운동이다. 감독님은 2008년부터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전문교수로 활동하면서 신작 <불멸>을 준비하는 듯하다. <불멸>을 보류하고 작년 한 해 동안 준비한 법정에서 벌어지는 영화를 저예산으로 준비 중이다. 안성기 씨가 캐스팅 되었고 3월부터 촬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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