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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칼럼·시평 [문화저널]
우리문화연구판소리란 무엇인가 3
최동현 판소리 연구가(2003-09-08 10:19:08)

판소리의 기원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소위 <巫歌起源說>이다. 장노식에 의해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이 주장은, 이혜구, 이보형, 서대석 등으로 이어지면서 광범위한 실증적 증거들을 확보해 가면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성장해 왔다.
판소리가 巫歌, 그것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巫歌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거론된다.
첫째, 판소리와 판소리 창자의 분포지역이 무가의 시나위권(경기 일부·충청·전라·경상도 서부 지역)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지역적인 관련성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시나위 조가 판소리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고, 판소리의 기본적인 聲音인 <패개성음>이라는 것이 이 지역의 무가에서도 중심이 되어 있으며, 장단에 있어서도 매우 비슷하여,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둘째, 판소리의 演唱 양식이 이 지역의 무가와 같다는 것이다. <잽이>라 하여 반주를 하는 사람과 의식을 집행하는 무당이 있다는 점, 반주 악기로 북이 사용된다는 점, 무당과 창자가 공히 부채를 중요한 소도구로 사용한다는 점,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발림이 이 지역의 무가의 춤에서 사용하는 춤사위 (살풀이)와 같은 양식이라는 점, 반주자가 추임새를 하며, 둘 다 청중의 참여가 따르고 또 公演을 필요로 한다는 것 등이 중요한 점으로 지적된다.
셋째,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대체로 降神에 의해 갑자기 무당이 되는 데 비해, 시나위권의 巫系는 세습되어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이 巫系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가문을 중심으로 세습되는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넷째, 판소리의 내용적 성격이 무가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무가는 기본적으로 살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판소리도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판소리의 내용을 한결같이 처음에는 온갖 시련을 겪다가도 나중에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 모두가 흥겨운 한바탕의 축제적 분위기로 끝맺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축제적 분위기가 곧 굿의 성격과 동일하다. 물론 이 축제는 <원한>으로 상징되는 세상사의 질곡을 <굿> 곧 儀式을 통해 해결하고, 새로운 삶의 의욕과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집단적 행위에 의해 유발되는 것인데, 판소리 또한 이 점에서는 무가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판소리의 기원에 관한 두 번째 주장은 <육자배기 토리>에서 왔다는 주장이다. 육자배기 토리란 시나위권 民謠의 음악적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미(Mi), 라(La), 시(Si)의 3음이 주된 구성음으로 시(Si)위에 레(Re)에서 도(Do)에 이르는 미분음이 있어 시(Si)에 흘러내리며>, <樂想은 여성적이고, 한스럽고, 처절하고, 부드럽다>. 바로 이 육자배기 토리와 판소리의 근간을 이루는 <계면조>가 동일한 구성음과 악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처 번째의 무가기원설을 음악학적인 면에서 심화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나위권의 무가가 바로 육자배기 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가기원설과 육자배기 토리기원설은 동일한 발상으로부터 나온 동일한 주장으로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무가기원설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부류에 속하면서도 사회적 制度와 관련하여 기원을 논한 소위 <廣大笑謔之歲起源說>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民俗藝能은 巫家 출신의 巫夫에 의해 대대로 계승되어 왔는데 국가적인 큰 행사에 대비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궁중의 가장 큰 연례적인 행사의 하나인 儺禮는 고려 때부터 이어내려 온 것으로 동짓날 밤에 邪神을 쫓고 국가의 태평과 안녕을 기원하는 일종의 굿이었다. 이 의식은 시대에 따라 규모와 내용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곡예와 갖가지 연예까지 곁들여진 대규모 행사로 발전하였다.
이 행사에는 巫夫들이 전국전인 조직을 통해 동원되었는데, 판소리는 이 나례의식 중에서도 곡예와 연예를 행하는 <廣大笑謔之 >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광대들이 각자의 재주를 겨루는 가운데, 어느 광대가 기왕의 남도 巫家의 음악과 양식을 사용하여 민속 가운데 흐르고 있는 설화를 긴 노래로 엮어 부른 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조 후기에 이르러 국가재정상의 이유로 나례의 규모가 축소되자, 생활 기반을 잃은 광대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간단한 인원, 고도의 전문성이 확보되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판소리의 시창자로 알려지고 있는 최선달, 하은달, (혹은 하한담이라고도 함)이 巫夫들의 조직인 神廳의 대방이니 도산주니 하는 직책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뒷받침되어 상당한 지지자를 얻고 있다.
또 김동욱은 판소리의 발생지역으로 충청도 지역을 들었다. 앞에서 말한대로 나례는 전국의 예능인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였기 때문에, 전국의 예능이 한 곳에서 공연되었고, 이에 따라 예능간의 상호 영향이 필연적으로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때에 북도에서 유행하고 있던 1인창 형태의 배뱅이굿에 남도 무가의 음악이 합쳐져 충청도 광대에 의해 판소리는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특히 판소리 시창자로 알려진 최선달이 충청도 결성사람이며, 초기의 판소리 창자인 고수관 등 <甲申完文>에 나오는 광대의 출생지가 대부분 충청도인 점에 뒷받침되어 있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주장은 문헌적 증거와 사실적 증거를 댈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만큼 광범위한 설득력 도한 지니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판소리적 특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들은 판소리 전체를 포괄하는 게 아니고, 판소리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일 뿐이다. 무속적 요소니, 육자배기 토리니 하는 것들이 판소리의 중요한 요소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이 판소리는 아니다. 판소리에는 무속적인 것 외에도 忠·孝·烈이니, 우애니, 하는 유교적 관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의 중요한 주제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다.
판소리의 음악적인 요소에도 육자배기 토리만 있는 게 아니고, 추천목이나 경 드름과 같은 경기도 민요의 선율이나, 메나리조와 같은 경상도 민요의 선율도 들어 있으며, 심지어는 漢詩의 詩唱이나 時調, 歌曲聲羽調와 같은 사대부들의 正樂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염불과 같은 불교음악도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판소리 창자들도 巫家에서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비가비>라 하여 양반 출신 광대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특히 판소리 始唱者라고 하는 최선달도 선날이라는 호칭으로 보아 巫夫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판소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무가기원설의 범주에 포함되는 여러 주장은 그 나름대로 많은 강점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너무나도 명백한 반론의 여지와 증거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약점은 근본적으로는 복잡한 대상물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태도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판소리를 연구하고, 감상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해석하는 여러 행위들은 판소리의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릇된 전제와 선입견을 가지고 출발한다면, 올바른 결과에 이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판소리의 기원에 관한 또 다른 논의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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