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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 |
임안자의 내가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1-06-09 15:28:10)
몬테카티니 단편영화제 한국 단편영화, 이탈리아에서 존재를 알리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1994년에 칸영화제‘황금카메라상’의 심사위원을 맡은 이후 2000년까지 나는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로부터 여섯 번 심사위원으로 초청을 받았었다. 그중 1995년이 가장 많았었는데, 그해 2월 포르토판타스 영화제(포르투갈)의 젊은 감독 부문과 7월 몬테카티니 단편영화제(이탈리아)의 경쟁부문에서심사를 맡았다. 그리고 8월 로카르노 영화제(스위스)서는 국제평론협회에서 직접 파견하는 심사위원단(5명)에 처음으로뽑혀 이 단체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경쟁부문의 수상작품 심사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한국영화와 직접 부딪혔던 곳은 몬테카티니 영화제뿐 이었으므로 이번은 자연히 몬테카티니의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다.몬테카티니는 토스카나 지역에 딸린 인구 2만 여 명의 조그만 도시다. 르네상스 시대의 찬란한 문화의 전통이 깊이 스며들어있는 토스카나 지역은 천연의 아름다운 경관에다 애주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기안티 포도주와 미식가들이 칭찬을아끼지 않는 다양한 토속적인 요리 그리고 곳곳에 흐르는 온천 등등으로 사시사철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특히 몬테카티니의 온천은 간과 소화기 계통에 좋다는 전설에 힘입어 토스카나 지역에서 으뜸가는 온천장으로 꼽히고 있으며, 그 때문에 고급스러운 건강관리의 시설들이 시내에 즐비하게 들어서있다. 그렇다고 이 도시를 관광객을 위한 휴양지로만 생각하면 오해다. 이미 19세기 말경에 몬테카티니를즐겨 찾았던 여행객 중에는 이탈리아 문학계의 대가 피란델로를 비롯하여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와 푸치니 등이 들어있었는가 하면, 푸치니는 그의 오페라 <라 보헴>의 일부를 이곳에서 작곡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20세기의 중반에 들면서는 몬테카티니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몇몇 감독들 작품의 극적무대로 떠올랐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인기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8½>(1963)과 러시아의 니키타 미칼코프 감독의 히트영화 <검은 눈동자>(1987) 그리고 러시아 영화의 대가 안드레이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해외의 망명길에 오른 뒤에 만든 첫 작품 <노스탈지아>(1983)는 모두가 몬테카티니의 옛 모습을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적 건축미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대작들이다.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몬테카티니에서 영화문화가 꽃을 피기 시작한 시기는 휄리니의 <8½>이 나오기 훨씬 앞서 20세기의 40년대 후반기부터였다. 40년대의 후반기는 비토리오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 누키노 비스콘티 등의 감독들이2차 대전의 폐허 속에서 로마를 중심으로 나중에‘네오리얼리즘’으로 불리게 된 현실추구의 영화작업에 힘을 기울리던때였으며, 그런 시대적 흐름에 따라 몬테카티니에서는 1949년 이탈리아의 영화클럽 연합회(Fedic)가 만들어졌다.몬테카티니 영화제는 바로 이 조직체를 모태로 태어났으며, 그런 생성배경 때문에 80년대 초까지 영화제의 운영은전적으로 시네클럽의 조직체에서 맡았었다. 처음에는 국내영화를 위한 경쟁제의 행사로 진행됐으며, 특징은 참가자들대부분이 아마추어로 주로 8-16mm 형식의 실험성 소품들을 대상으로 영화제를 이끌어갔던 점이다. 그 시기의 아마추어 참가자들 가운데 오늘날 이탈리아 영화계의 총아로 떠오르는 나니 모레티 감독도 들어있었는데, 그는 사실상 몬테카티니 영화제를 발판으로 감독이 됐다.몬테카티니 영화제가 국내영화제의 성격을 벗어나 국제적차원의 행사로 방향을 바꾼 건 1975년부터였다. 그런 반면아마추어영화(Cineamatorismo) 위주로 움직이던 초기의모습은 조직체 내부의 비평에 부딪쳐 80년대 초쯤 해체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국제적 차원의 독립영화와 비디오 작품을 중심으로 한‘몬테카티니 시네마 81’이 새로 들어섰었으나 그것도 지지부진 하다가 1992년에 중편과 단편영화 그리고 비디오 작품을 합친‘몬테카티니 필름비디오 국제영화제’가 새로이 태어나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그로서 몬테카티니는 1981년에 문을 연 프랑스의 클레르몽-페랑과 독일의 오버하우젠과 함께 서유럽의 주요 단편영화제의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나는 2000년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에 국제평론협회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었고,그 곳에서 비경쟁 부문에 들었던 서너 편의 한국 단편영화를볼 수 있었다. 한편, 오버하우젠 영화제는 독일 분단시절의초 기 였 던 1954 년 에 세 워 진 ‘ 서 독 단 편 영 화 제 ’(Westdeutsche Kurzfilmtage)를 이어 받은 것으로서,1991년 독일 통일이 된 뒤부터는‘서독’대신에 영화제가 치러지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오버하우젠 영화제로 불리고 있다.몬테카티니를 가게 된 이유는토스카나 지역에 서너 번 갔었지만 몬테카티니는 나에게낮선 곳이었다. 솔직히 심사위원으로 초청을 받을 때까지 그곳에 영화제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 몬테카티니 영화제에 가게 된 데는 이 영화제 집행위원의하나였던 풀로리아나 마우덴테 여사를 1994년 칸영화제서만나면서였다. 하루는 내가 영화관 옆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60대의 여자 한분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는 나더러 혹시 한국에서 오지 않았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여인은 자기소개를 간단히 한 뒤“칸에 오기 전에 클레르몽-페랑에서한국의 단편영화 <호모비디쿠스>를 아주 인상 깊게 봤는데높은 수준에 놀랐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몬테카티니 에 한국영화를 초청할 생각인데 좋은 영화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나를 95년에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뜻밖의 요청에 당황한 나는 단편영화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얼버무렸으나 ”당신은 황금카메라 심사위원으로칸에까지 왔는데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며마치 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여인은내 말을 가볍게 꺾고는”그럼 몬테카티니에서다시 만나자“며 자리를떴다.솔직히 그때까지 단편영화를 본 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드물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을 리 없었지만 이왕 주어진 기회니 한번 부딪쳐 보자는 마음으로 마우덴테의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는 칸에서 돌아온 뒤 틈틈이 단편영화에 대한 책을 읽고 영화도 몇 개 구해서 보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한 다음 6월 말일에 몬테카티니로 떠났다. 이번에는 남편이 처음으로 영화제에 같이 가게 되어서 길고 복잡한 기차 길이었는데도 즐거운 부부여행이 되었다. 46회 몬테카티니 영화제((46 Mostra Internationale le di Montecatini TermeFilmvideo 95)는 7월 1일 저녁 조촐하게 베르디 극장에서막을 올렸다. 95년의 영화제는 이탈리아 비상업영화협회의전국회장 마씨모 마세티와 앞에서 말한 마우덴테를 여사를포함한 4명의 집행위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며 모두 밀라노에서 활동하고 있던 평론계 출신들이었다.개막식 영화는 40년대 초에 등장한 이탈이아의 노장감독주세페 데 산티스의 <쓴 쌀>(Riso amaro, 1949년)이었다.단편영화제에서 고전의 장편을 보여준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런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쓴 쌀>은 2차대전시 이탈리아의 비참한 농촌현실을 민중의 시각에서그린 것으로, 9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인기 최고의 작품이었을 뿐 아니라 신인여배우 실바나 망가노를 단번에 세계적인 배우로 만들었던 시쳇말로‘국민의 영화’였다. 그럼에도 데 산티스 감독은‘빨갱이’라는 딱지를 받아 20여 년간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 그의 작품에 대한 영화사적 재평가가 진행됨과 동시에 감독의 명예회복도 이뤄졌다. 몬테카티니 영화제 역시 연대감을 나타내는뜻에서 <쓴 쌀>을 개막식 영화로 초청하고 데 산티스 감독에게 예술 공로상으로‘황금 왜가리’를 안겨줬던 것이다(왜가리는 몬테카티니 도시를 상징하는 새다).한편 1995년은 영화가 태어난 지 백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영화제마다 영화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프로그을 내놓았다. 몬테카티니 영화제는 19세기 말경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루미에르, 고몽, 파테 등의 굴지의 제작사들이 사용했던 촬영기계 100여 점을한데 모아‘영화가 태어날 때’라는 제목으로 특별 전시하여영화제작 기술의 발달사를 한눈으로 볼 수 있게 했다. 하나놀라웠던 건 그 희귀한 도구들을 모두 한 시골에서 한때 영화상영 기사로 일하던 젊은이가 몇 십 년에 걸쳐 모았다는점이었는데, 영화제의 전시장 말고도 시외 비놀리 박물관에는 2천개가 넘는 그의 수집품이 보존되어 있었다(포스터 사진 참고). 몬테카티니에서 만난 한국의 단편영화 세편 몬테카티니에서 한국단편이 처음으로 소개된 건 1994년으로 <호모비디쿠스>가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1기생인 변혁. 이재용 두 감독의 공동 작품인 <호모비디쿠스>(1992)는‘단편영화의 칸’으로 불리는 클레르망페랑 단편영화제에서 이미 예술 공로상과 젊은 평론가상을받았고 또 샌프란시스코에에서 단편영화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4년 몬테카티니에서 은상을 받음으로서 한국 단편영화의 존재를 외국에 알리는데 공로가 컸다. 그 결과 1995년몬테카티니 영화제에 초대된 한국의 단편영화는 세 개로 늘어났다. 경쟁부문의 <비명도시>(감독 김성수)1편과 파노라마 부문의 <우중산책>(임순례)과 <경멸>(김진한)의 2편이었는데, 그해 몬테카티니 영화제에는 46개국으로부터 330편이 프로그램에 올라 있었다. 물론 단편영화의 오랜 역사를가진 나라들에 비하면 한국의 3편은 시작에 불과했지만 90년대 중반 싹을 트던 한국의 단편영화계에는 반가운 소식가아닐 수 없었다. 몬테카티니 영화제에 가기 전에 나는 <비명도시>를 미리 볼 수 있었다. 박광수 감독의 추천을 받고 김성수 감독이 나에게 비디오를 보내줬던 것인데, 그는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과 <베를린 리포트>에서조감독으로 있다가 1993년 <비명도시>로 연출 데뷔를 했다.나는 <비명도시> 보고나서 마우덴테 집행위원에 추천을했다. 그러나 대답이 없기에 선정에서 탈락된 줄로 알고 있다가 경쟁부문에 들어있어 반가웠다. <비명도시>는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해있는 아내를 간호하던 동철이 창밖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살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살인자의 추격을 받아 밤거리를 헤매다가 끝에 가서 살인자를 죽이게 되는 액션스릴러로서 인간의 살인적인 폭력의 가변성이 중심테마다.그런데 상영 날 문제가 생겼다. <비명도시>의 원형은35mm 필름이었음에도 비디오를 상영한 데다 비디오의 화질이 좋지 않아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우덴테 위원에게 항의를 했으나 ”그게 한국에서 온 유일한 재료였다“는 대답에는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다김성수 감독은 새 영화의 촬영 때문에 영화제에 참석할 수가 없어서 이래저래 <비명도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채 끝나버려 좀 아까웠다.파노라마 부문에 올라있던 임순례 감독의 1994년 작 <우중 산책>은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서 대상과 평론가상을받았던 감독의 첫 작품이다. 서울단편영화제는 삼성 나이세스의 지원을 받아 1994년에 설립된 것으로 생성 초기에 처해있던 한국의 단편영화계에 신선한 자극을 줌과 동시에 해외의 이름난 단편영화제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으나 얼마 가지 못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우중산책>은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어느 낡은 극장에서 표를 파는 30대의 여직원이 비오는 여름날에 첫 데이트의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겪는 기대와 실망을 묘사한 작품으로, 90년대의 주류 영화에서 흔치 않았던 서민층의 여인상을 현실감 높게 보여준 점이 돋보였다. 한국영화사에서일곱 번째로 여성감독의 자리에 오른 임순례 감독은 여성감독이 거의 없던 90년대 중반에 영화학교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인 작업 스타일을 바탕으로 주로 힘없는 자들의 일상을그린 작품들을 내놓았다. 임 감독은 몬티카티니에서 만나지못했지만 2년 뒤 임 감독의 첫 장편 <세 친구>(1996)가 베를린의 영포럼에 선정됐을 때 내가 통역을 맡으면서 처음으로만났고, 그 뒤에도 <세 친구>가 프리브룩 영화제와 쥬리히의 스튜디오 키노에서 초대되었을 때 내가 다시 통역을 하게되면서 임 감독과 좀 더 가까워지게 됐다.파노라마 부문에 오른 또 하나 단편영화 <경멸>은 제1회서울단편영화제서 우수상을 받았던 김진한 감독의 첫 작품이다. 앞의 <우중산책>과 <경멸>을 몬테카티니로 연결시킨건 사실 나였는데, 서울단편영화제를 지원하는 나이세스에서 해외담당자 김은영 여사로부터 부탁을 받아 이뤄진 것이다. <경멸>은 부모와 연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뒤에 소외감에 빠져 고통을 받는 한 젊은 성전환의 남성이 심리학자의앞에서 내뱉는 독백을 뼈대로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성적 소수인들의 심리적 갈등을 조명한 단편이다. <경멸>은몬테카티니에서 심사위원의 특별상을 받았으며 현지에 와있던 김진한 감독이 시상식에 참여했다. 참고로, 95년 몬테카티니 단편영화제의 심사위원은 오랫동안 베니스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었던 감베티 박사(심사위원장), 이탈리아의 노장평론가 페레로, 칸영화제 평론주간의 단편영화 선정위원장콜파, 프랑스의 제작자 모하메드 그리고 나 다섯 명이었다.김진한 감독은 1992년 우연한 기회에 이현승 감독을 만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에서 조감독으로 영화작업에 참가했고 그 뒤에 앞에서 말한 김성수 감독의<비명도시>에서 여균동 감독과 공동기획을 맡은 바 있다. 김 감독은 두 번째 작품 <햇빛 자르는 아이>(1996)를 통해 클레르망-페랑 단편영화제서 심사위원 특별상,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서 은상을 받았다. 그리고이스트만 코닥과 씨네21이 공모한 사전제작 지원작으로 단편 <장롱>(1998)을 만들었다. 그로서 김진한 감독은 단편영화하면 의례 장편으로 넘어가기 위한 습작으로 생각하는 한국에서의 뛰어난 단편영화의 작가로 주목됐었다. 그러나 <장롱>이후 그는 영화계를 훌쩍 떠났다. 이 글을 쓰기 위해그에 대해 수소문 해봤으나 영화계서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왜 영화를 그만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재질 있는 젊은 감독을 하나 잃은 듯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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