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활동을 지원하는 레지던스(residence)프로그램이 대세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일찍부터 예술가에게 일정기간 작업공간을 제공하고 공동 작업 과 발표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레지던스 프로그램 정책을 운영해왔다. 국내에서 이와 같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부터다. 특히 레지던스 사업이 슬럼화된 도심이나, 도시외곽지역 유휴시설의 재활용 방법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자치단체마다 예술인 지원정책으로 만들어져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물론 해외에서도 젊은 예술가 양성 중심에서 유휴시설의 재생과 프로그램의 다양화로 성격이 변화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도심의 오래된 장례식장을 개조해 개장한 파리의 르 썽 꺄트르(Le104)나 옛 도살장을 개조한 로마의 조네 아티베(Zone Attive), 역사적 건물들을 활용한 일본 요코하마의 아트뱅크 등이 좋은 사례다. 전북에서도 지난 2010년부터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전북도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협력해 시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레지던스프로그램 시행 2년차인 지난해 전라북도는 2억9천5백만원의 사업비를 책정하고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지원한 6개 단체 중 4개 단체를 선정했다. 2010년부터 레지던스에 참여한 전주의 (사)교동아트와 군산의 진포문화예술원, 프로젝트 그룹‘동문’, ‘문화공동체 감’과 2011년에 처음 참여한 익산예총이다. 미술가들의 새로운 창작작업의 통로가 되고 있는 전북지역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지난 1년을 되돌아보고 성과와 과제를 들여다보았다.
서로 다른 색깔 빚어내는 4개의 공간
4개의 레지던스 모두 입주작가들의 작품 활동 지원 및 전시, 지역커뮤니티 프로그램, 지역작가와의 교류와 공동작업, 세미나와 워크숍 등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의 중심은 비슷한 형태를 보였다. 하지만 각 단체의 구상과 목표에 따라 중점을 두는 프로그램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특히 2년차에 접어든 레지던스의 경우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다양하고 특성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사)교동아트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는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좋은 입지와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교동아트 이문수 큐레이터는“교동아트가 자리한 한옥마을은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가 높은 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기에 좋은 위치다. 소통과 교류를 통해 지역사회와 대화하는 문화커뮤니티 형성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에는 4월부터 11월까지 외부지역작가 2명, 내부지역작가 1명 등 3명의 작가가 입주했다. 교동아트는 이번 레지던스 프로그램에서‘창작공간 지원 및 작가 인큐베이팅, 지역작가와의 교류를 통한 연대 형성, 현대미술의 담론 형성, 지역주민과의 커뮤니티 형성’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8개월간의 사업 기간 동안 6회에 걸친 전시와 교육프로그램, 체험프로그램, 워크숍 등을 운영했다. 2010년에 목욕탕을 이용한 <신예욕탕 레지던스>를 진행했던‘문화공동체감’은 2011년에는 인근의 여인숙을 매입해 <군산 창작 레지던스 여인숙>을 진행했다. <여인숙>의 특징은 1년의 레지던스 기간을 4부로 나눠 작가들을 입주시켰다는 점이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각각 2개월에 걸쳐 3명씩 12명의 작가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전시를 가졌다. 이상훈‘문화공동체 감’대표는“지난해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기간이 너무 늘어날 경우 작가들이 루즈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올해의 경우 보다 타이트한 일정이지만 임팩트가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작가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했다”고 밝혔다. 진포문화예술원과 프로젝트그룹 동문은 2010년에 이어 군산의 수협 공판장 건물에서 <‘2011 군산 아트 레지던시-우여곡절>을 진행했다. 군산의 지역성과 역사성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해온 신석호 프로젝트그룹 동문 대표는“군산이라는 지역에 기반을 두고 도시의 맥락을 밝히고 지역 사람들의 삶 속에서 들어나는 심리와 움직임을 투영하는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2011년 우여곡절에 참여한 작가는 모두 22명으로 지역 레지던스 중 최대 규모다. 특히 영상과 사진,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참여한 것이 눈에 띈다. 신석호 대표는“스튜디오 중심의 개인적 작업보다 로컬을 기반으로 한 활동을 활발히 해온, 역량이 검증된 작가들을 조사해 큐레이팅 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처음으로 레지던스 사업을 주관한 익산예총은 일제 강점기 지어진 익옥수리조합에 부속된 폐건물을 활용했다. 익옥수리조합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관리를 받고 있고, 익산문화재단이 입주해 활용하고 있다. 반면 바로 옆에 위치한 3층 부속건물은 같은 번지수를 나눠 쓰고 있음에도 폐건물로 방치돼있었다. 더구나 이 건물이 위치한 익산 평화동 지역은 영등동에 신도심이 조성된 후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했다. <익옥수리조합 레지던스>의 코디네이터를 맡은 전승훈 씨는“입주작가의 성장을 돕는 것도 레지던스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익산의 경우 침체된 지역문화예술계에 자극을 주고, 낙후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방향과 목적을 보다 뚜렷하게 내세웠다”고 설명했다.
싹을 틔웠으니 이제 꽃을 피우라
작가 인큐베이팅과 유휴공간 재생, 교류사업을 통한 지역기여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양대 기능이다. 어느 쪽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레지던스 프로그램에도 차이가 나타난다. 교동아트 이문수 큐레이터는“최근의 문화예술정책 방향이 소비자의 향유권 강화에 있는 것을 긍정하지만 레지던스 사업의 본 목적인‘작가 인큐베이팅’에 대한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선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지역성을 중심으로 목표를 세운 익산과 군산의 레지던스의 경우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외부의 작가들을 통해 지역의 문화예술에 자극을 주고, 지역 정체성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제공받는 것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 익옥수리조합 코디네이터 전승훈 씨는“지역 레지던스는 수도권과 구조자체가 다르다.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서는 창작활동에 전념하길 원하겠지만, 지역 입장에서는 보다 다양한 활동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서 작가와의 많은 대화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든 장단점이 있는 만큼, 한쪽으로 획일화시키기보다는 적절한 조율과 각각의 목표에 맞는 특성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문화예술계의 의견이다. 이를 위해 레지던스 사업의 심사와 평가틀 역시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레지던스 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장기적인 정책수립도 시급하다. 1년 단위로 지정되는 방식으로는 주관단체나, 입주 작가 모두 긴 안목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 2011년의 경우 3개의 단체가 2010년에 이어 사업자로 지정을 받아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계속 사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반면 현재의 단체들이 매년 사업자로 지정을 받는다면 이 역시 신규단체들의 진입장벽을 높인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3~5년 정도의 장기 지정 방식이나 공공기관이 직접 레지던스를 운영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청주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가 좋은 사례다. 2007년 문을 연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는 심사를 통해 15명의 정원 중 10명은 지역작가, 5명을 외지작가로 선정하고 있다. 레지던스의 안정성은 레지던스의 권위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예술가들이 레지던스에 참여하는 이유는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 새로운 공간에서의 창작욕 자극이란 목표 외에도 활동상의 중요한 이력이 되기 때문이다. 레지던스 입주는 곧 소정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의미가 된다. 때문에 더 권위 있는 레지던스에 예술가들의 참여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지역의 한 미술인은“최근 청주레지던스가 작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시에서 직접 안정적인 운영을 하며 권위를 쌓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이런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전북 레지던스는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 특히 공간의 문제가 대표적이다. 교동아트의 경우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있지만, <익옥수리조합>과 <우여곡절>은 매년 공간을 임대해야 한다. <여인숙>의 경우는 이런 문제 때문에 주관단체에서 비용을 들여 건물을 매입했다. 이상훈 대표는“언제까지 예산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사비를 들여 공간을 매입하고, 지역의 후원자들을 통해 기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익옥수리조합>과 <우여곡절>은 문화공간조성 차원에서 시의 협조를 위해 논의 중이다. 신석호 대표는“레지던스 사업을 통해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바라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며“점차적으로 역량을 축적하고 경험을 공유한다면 각 지역의 레지던스 사업들이 지역문화의 활력소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년을 보낸 전북레지던스 사업은 이제야 싹을 틔우기 시작한 단계다. 지나친 성과위주 평가나 현행유지식의 안이한 정책은 그 싹을 짓밟는 일이 될 것이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지자체와 지역 문화예술계의 역할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