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은 투박한 듯 거친 소리와 맑고 청아한 소리를 함께 낸다. 두 가지 상반된 소리를 한 몸에서 뿜어내는 것이다. 날카로운 눈매가 주는 강한 인상을 소년 같은 천진한 웃음으로 덮어버리는 이창선은 대금을 닮았다. 서른일곱, 그 중 20년을 대금과 함께한 그에게 대금은 자신과 동일한 존재다.

진지함이 무겁지 않아 정겹고, 가볍지 않아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

열여섯 살 소년 시절, 우연히 학교에서 듣게 된 대금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후 학창시절을 대금을 공부하는 데 고스란히 바쳤다. 날마다 나주에서 광주까지 대금을 배우러 다니면서도 힘들고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부모님은 국악의 길에 들어서려는 아들의 선택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미 대금은 그의 인생이 되었다. 대학교 4학년이던 스물세 살에 전주시립국악단 단원이 되었고, 3년 후엔 수석단원이 됐다. 좋은 연주자가 되는 데에 온통 마음을 쏟았다. 휴가도 반납하고 배우고 익히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문득 진정한 삶의 가치에 눈을 떴다. 연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도 그제서야 갖게 됐다. 시립국악단 단원으로서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단원들의 노동환경에 고민하며 그 답을 찾기 위해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노동조합 지부장이 됐다. 연주도 단원들의 복지활동도 그의 일상, 깊은 무게로 자리 잡았다.

“대금 연주를 어디까지 해볼 수 있을까”

무대에 서면 늘 아쉬웠다. 대금 연주곡은 왜 청송곡이나 산조 같은 형식으로만 실려있을까. 이것만으로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얻기 위해 그는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갈등했다. 그동안 대금으로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가 보여준 동영상이 그의 진로를 바꾸어놓았다.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누군가 촬영해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미 조회수가 3만 건을 넘어서 있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 그를 지켜보고 남겨놓은 관심과 격려의 댓글에 그는 감동했다. 그 때 깨달았다. 국악이 대중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편안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접근하면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며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대금연주곡을 만들고 연주하면서 그는 대금의 길을 새롭게 열어 보이고 싶었다. 기타, 베이스, 드럼 등과 대금 연주를 함께하는‘이창선대금스타일’밴드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연주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퓨전음악작업도 활발해 졌다. 2009 년, 한국문화예술위윈회 영아트 프론티어(ARCO Young Art Frontior)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음반 제작과 창작활동을 지원받아 음반 <꿈꾸는 소년>을 냈다. 이 음반에는 대금으로 연주하는 정통국악음악과 보사노바, 재즈, 블루스 등의 퓨전음악을 들려주는 10곡이 담겨있다. 이 앨범의 작곡자로 참여한 황호준은 이창선을“퓨전 국악 연주를 하면서 대중적 공감대를 넓히고 전통 음악이 갖는 음악적 특징을 살려 우리 전통악기 대금 특유의 멋을 제대로 표현해 내는 연주자. 대금을 통해 세상과 하나가 되려는 연주자”라고 소개했다. ‘이창선대금스타일’은 극단 문화영토 판과 함께 국악에세이드라마<사연>을 기획해 올려 화제를 모았다. 음악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을 연주와 함께 풀어 놓는 이 공연은 음악과 연극이라는 서로 다른장르의 융합을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공연 형식이다. 음반 <꿈꾸는소년>이 바탕이 되었고, 여기에 연극적 요소와 이야기를 접목해 음악적 풍성함을 담아냈다. 음악무대로는 이례적으로 11일 이나 장기공연하면서 <사연>은 많은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 호응에 힘입어 <사연>의 앙코르공연이 지난 12월 22일부터 24일까지 전주 우진문화공간에서 열렸다. 2010년 봄에는 지인에게서 빌린 간이 앰프를 동반해 거리로 나왔다. 주말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거리 공연을 시작한 것이다. 거리공연을 하기로 마음먹고 나간 첫날은 몇 시간 동안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그냥 돌아왔다. 용기가 없었다. 다시 마음을 다지고 자리를 잡아 대금 연주를 시작한 날, 그는 관객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는 벅찬 감동을 맛보았다. 그의 거리 무대 관객들은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외국에서는 거리 공연하는 문화가 자연스럽잖아요.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라도 연주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요. 그렇게 시작한 거리 공연에서 직접 관객들과 만나며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꼈고 언제나 공연을 할 수 있는 연주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저 스스로 갖게 되었습니다.”거리가 됐든 공연장 무대가 됐든 그의 연주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이 찾아온다. 대부분이 처음 대금을 듣고 대금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덕분에 그의 주위에는 아예 대금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여럿이다. 

그는 지난 2월, 또 한 번의 색다른 경험에 도전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 측의 추천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후원한 7박 8일 동안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다. ‘전통예술 레지던시 워크숍 - 탐색전’은 브라질, 오스트리아, 인도 등 해외의 유명 뮤지션과 레지던시 기관 관계자들이 한국 전통음악을 하는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공동 창작을 해나가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한 공간에서 토론을 하고 즉흥 연주, 실험무대를 통해 밀도 높은 음악교류를 했다. 즉흥적으로 팀을 짜서 15분동안 곡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치열한 음악탐색전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타이트한 일정으로 진행돼서 힘들고 벅차기도 했지만 지역도 장르도 다양한 음악인들이 모여 서로의 음악을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감추거나 포장할 수도 없는 자리였기 때문에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작업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게 되고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어 의미가 깊었습니다.”그는 이곳에서 만난 브라질 뮤지션 벤자민 톱킨에게 초청을 받아 11월 말엔 열흘 남짓한 일정으로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뮤직페스티벌에 참여 했다. 벤자민 톱킨은 연주, 편·작곡, 프로듀싱 등 브라질 음악을 소재로 가능한 여러 가지 작업을 통해 관심을 모으고 있는 피아니스트다. 이창선을 주목한 벤자민 톱킨은 여러 나라의 기획사 관계자들과 음악인들에게 그와 한국의 음악을 소개했다.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값진 경험이었다. 국적도 언어도 다르지만 뮤지션으로서 교류한 음악적 공감이 넓혀준 무대와 시간의 의미를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에 놓였을 때 평소보다 열린 마음으로 사고를 하게 되고 그것이 음악적 영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깨달았다.

대금에 대한 확고한 철학, 이창선 스타일

그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예술가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된 틀이 음악 소통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대금연주로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의 수많은 실험 역시 여러 번 벽에 부딪쳐야했다. 그러나 그의 실험은 중단되지 않았다. 옳다고 생각하고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이 들면 실행에 옮겼다. 덕분에 이제‘이창선’은 자신만의 철학과 스타일을 가진 연주자로 통한다.“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현재고,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됩니다. 전통을 바탕으로 지금에 맞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전통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같은 자리에만 머무르면 발전이 없습니다.지역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안 될거야’라는 말을 먼저 합니다. 그런 열등감이나 패배의식을 머리고 시도해야 해요. 복권당첨을 바란다면 우선 복권을 사야 하는 것처럼 그 어떤 것도 해보지 않으면 가능성은 없습니다.”그는 지역에서도 전국을, 전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예술인들이 나올 수 있다며 할 수 있다는‘희망’을 갖고 많이 시도하고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기다린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함께 꿈꾸고 이뤄나갈 동지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