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침대>(1996), <쉬리>(1998), <태극기 휘날리며>(2003)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흥행대박을 이끌며‘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의 공식을 정착시킨 강제규 감독의 또 다른 전쟁 영화 <마이웨이>(2011)가 마침내 공개되었다. 순제작비 280억, 손익분기점 천만 명, 한중일 스타 배우들의 출연이라는 영화의 엄청난 외적 위용은 그대로 이 영화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들이기도 하다. 물론 그 단서의 편린들은 이전 작품들의 제목에 꼼꼼히 새겨 넣었던 한국적 정서를 비워낸 <마이웨이>라는 추상적인 영화 제목에서부터 이미 눈에 띄었다. 그렇다. 감독은 애초부터 7년여의 공백 기간 동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경쟁할 수 있는 해외 시장을 겨냥한 작품을 준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제 <마이웨이>는 더 이상‘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을 듯하다.
본래‘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표현에는 영화산업적인 요소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 대중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하고 이와 더불어 그 소재를 한국영화계의 일반적인 제작비 규모에 부합하는 수준에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전략을 모방하는 것이다. 일례로 전쟁 영화의 경우,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수식되는‘한국전쟁’으로 특화된 사건에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트라우마를 각인시키면서 한국 관객들에게 소구된다. 반면에 <마이웨이>는 특정 국민에 국한된 전쟁의 민족사적 아픔을 부르짖지 않는다. 대신 세계인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전쟁 일반의 반인도주의적 모순을 가시화하며‘반전 영화’라는 보편적 가치 층위로 주제를 확장한다. 이는 세계시장을 염두에 둔 강제규 감독에 의해 면밀하게 의도된 노련한 전략이다.
<마이웨이>는 일제 시대의 경성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인‘준식(장동건)’과 일본인‘타츠오(오다기리 조)’는 어린 시절부터 줄 곧 마라톤 라이벌로서, 각 민족의 자존심을 건 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식민지 국민과 피식민지 국민이라는 엄연한 계급적 차이에서 비롯된 뜻하지 않은 오해와 사건들은 선의의 경쟁자였던 그들이 서로를 한 없이 증오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어느 날, 일본 마라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한 준식을 실격 처리하는 부정판정에 대한 항의가 폭동으로 이어지면서, 준식은 친구들과 함께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으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대위가 되어 나타난 타츠오와 재회한다. 이제 그들은 중국에서 출발해 소련과 독일, 프랑스에 이르는 2차 세계대전의 대장전을 함께하며 관계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준식은 거듭되는 전투에서의 승리로 치하 받으려는 공명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고향 친구들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아 함께 고향인 경성으로 돌아가 마라톤 선수로서의 꿈을 이루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괴롭히고 수많은 동료를 무모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던 타츠오의 생명마저 구해준다. 결국 준식의 그런 무한한 휴머니즘 정신에 타츠오마저 감화되면서 그들은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 불가능해 보였던 우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전쟁의 악순환 속에서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명목상의 적군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이다. 즉 그들에게 정말 위협적인 존재는 적군이 아니라 오히려 아군 내부의 맹목적인‘전쟁광’이다. 인간을 그저 전쟁의 도구이자 국가 존속의 수단쯤으로 여기는 파렴치한 전쟁광 말이다. 이런 사실에 공감한다면, 전쟁터에 끌려온 군인들은 아군이든 적군이든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리하여 민족적 대립을 넘어‘우리편’은 재정립된다.
국경을 초월한 휴머니즘이라는 측면에서, <마이웨이>는 <태극기 휘날리며>보다는 차라리 최근에 한국에서도 선전한 인도 영화 <내 이름은 칸>(2010)과 근친 관계에 있다. 뜬금없는 비교 같지만, 두 나라 모두 아시아권의 영화 강국으로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휴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유사 할리우드 영화로 세계시장 공략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내 이름은 칸>에서 미국에 정착한 인도인‘칸’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그는 무슬림으로서 종교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홍수 피해를 입은 할렘가의 흑인들을 돕는 인류애를 발휘하는 초국가적/초종교적 화합을 통해 실제로 전세계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이 영화는 제3세계 영화의 성공적인 국제화 사례로 손색이 없다.
다시 <마이웨이>로 돌아와서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따라잡기의 가장 확실한 전술을 확인해보자. 그것은 바로 심혈을 기울여 연출한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으로서 할리우드에 버금갈 정도이다. 강제규 감독은 특수효과와 CGI 기술의 우선적 개발과 그 테크놀로지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시나리오 연구에 긴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 그것만 놓고 본다면, <마이웨이>는 분명 기대 이상이다. 문제는 그 화려한 전투 장면이 숨 쉴 틈 없이 반복되고 있고 그만큼 등장인물들이 차근차근 여유롭게 감정 선을 잡아갈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적 트라우마를 깊이 있게 건드는 견고한 서사의 결핍으로 인해 뜨거운 공감의 눈물을 흘리게 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혁신적 향상을 높게 사더라도 영화는 절반의 성공에 그쳐버렸다. 다시 말해, 절반의 실패 요인은 정확히 <트랜스포머3>(2011)처럼 스펙터클을 쉴 새 없이 전시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니 가질 수밖에 없는 그 결함의 성격과 닮았다. 여기에서 감히 실패라고 부르는 지점들은 모두가 계산된 포기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마이웨이>는 <태극기 휘날리며>나 <괴물>보다 최종 국내 관객수가 더 적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그들과 비교도 할수 없는 흥행 신화를 거둘 확률은 높다. 다만 그 절반의 성공을 미덕으로 여기고 거기에 만족할지 여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