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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2001년은 한국단편영화‘행운의 해’였다
되돌아보는 클레르몽페랑 국제 단편 영화제 2
(2012-01-05 14:07:18)

번째 방문


나는 1999년의 방문 뒤에 2001 클레르몽페랑에 다시 갔다. 보통 영화제들은 한번 들리면 해마다 가는 편이었으나 단편영화제를 방문하기는 클레르몽페랑 영화제 뿐이었다. 단편영화에 대한 전에 몰랐던 관심과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2001 1 26 나는 클레르몽페랑을 다시 갔다. 이번에서 영화제서 직접 초청장을 받아 것이다. 바젤에서 클레르몽페랑까지 기차로 갔는데 보통 자동차로 다섯 시간이면 닿을 거리를 기차를 갈아타느라 여덟 시간이 넘는 여행을 했다. 역에서 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는 거리였으나 비가 마구 쏟아지는 바람에 흠뻑 젖은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들려 옷만 갈아입고 부랴부랴 프레스 사무실에 가서 아이디를 받은 다음 개막식장으로 갔다. 23회의 개막식은문화의 안에 들어있는 1 석의 콕토연회장에서 열렸다. 개막식의 식순은 똑같은 프로그램을 오후 8 30분과 10 30분으로 나눠 진행됐는데 나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번째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그런데 개막식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주 독특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애타는 지역의 젊은 단편영화 감독들이 주인공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실업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울분을 터트리며 독립영화의 사회·문화적 중요성과 정부의 지원 그리고 시민연대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옆에 앉아있는 기자에게특이한 퍼포먼스라고 평하자 그는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주자는뜻에서 5 전부터 개막식 무대를 이들에게 내주고 있다 무대를 향해 열띤 박수를 보냈다. 2001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1650편이었다. 가운데서 77편이 최종으로 선정되었고 2001년에는 영화관 개가 생겨 상영관은 모두 10개로 늘어났다. 나는 영화제에 기간 프랑스의 월간 영화전문지카이에 시네마 편집장 미셀프로동을 기자회견실에서 만나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어디나 없이 국제영화제들이 당면하는 공통점은 가지로 집약될 있다. 어떻게 하면 수준 높은 싱싱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충분한 관객을 동원하고 국제 수준의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있는가?”인데 클레르몽페랑은 가지 조건을 채우는데 성공함으로 명실공히 세계 단편영화 수도가 됐다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밖에 나는 영화제 동안에 지역의 공산당에서 조직한단편영화 지원정책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 유일한 외국인으로 참석했었다. 자리에는 프랑스의 국보보전 정책담당자 메셀 듀프 정무차관이 참석한 가운데 칸영화제의 비평주간 책임자 로아와 단편영화 배급사들 그리고 철도, 전기, 가스 노조의 대표들이 발제자로 나와 시간 가깝게 단편영화의 구원정책에 대한 토론을 했다.


2001년은 한국 단편영화계에 있어 행운의 해였다. 경쟁부문에는 <자화상>(이상열), <지우개 따먹기>(민동현), <엔조이 유어 섬머>(이형곤) 세편이 올라있었다. 그리고 <망막>(김은경) 2001년에 새로 생긴와나두부문에서, 단편 애니메이션 <언년이>(유진이) 비경쟁의 어린이영화 부문에 각각 진출했다. 그에다 2001년에는 스페인과 한국 나라를 위한 특별 회고전이 열려 스페인의 16편과 한국의 22편이 소개됐는데 여러 면에서 관심의 초점은 한국이었다. 그런 뜻에서 2001 클레르몽페랑의 한국 단편회고전은 1992 페사로 영화제가 주최한 유럽 최초의 한국 장편영화 회고전에 비할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01년의 회고전은 앙토완 페레즈와 조르즈 고닝 공동집행위원장이 준비한 것으로, 내가 둘에게 회고전의 동기를 묻자 로페즈가 대답을 했다.“ 우리 영화제에 소개된 한국의 단편은 사실 많지 않았으나 중에는 수상까지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2000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1년에 40편의 단편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할리우드의 홍수에 자국의 영화를 지키려는 영화인들의 굳은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크린쿼터 문제만 해도 프랑스에선 텔레비전 쿼터에 그쳤지만 그러나 문제를 바라보는데서 나라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럼으로 한국 단편의 회고전은 시기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 한다


2001 클레르몽페랑의 한국 단편영화 회고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있었던 데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도움이 컸다. 영진위의 유길촌 집행위원장은 20명의 단편영화감독들과 함께 영화제를 방문했는가 하면 영진위의 국제부에서는 직원 명을 따로 보내 영접에서 외교접촉에 이르기까지 적극 도와주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영화아카데미의 교수 황규덕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으며 밖에도 배우 제작자, 감독들이 개별적으로 찾아와 50 명의 한국인이 클레르몽페랑에서 모임으로 자연스럽게 한국 단편영화의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다. 다만 하나 불만스러웠던 한국 단편영화 주제로 열렸던 세미나에 발제자로 초청된 앙토안 코폴라 교수의 발표가 연구부족으로 기대를 채우지 못했던 점이다. 그의 강의는 주로 씨네21 영진위의 격월간지영화 쓰인 글들을 인용하는 수준이었고 세미나의 핵심 주제였던 한국단편영화의 상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기자들의 관심을 끌었던이북영화의 현실 대해서도 이미 영진위의영화에서 발표했던 글을 반복했을 다른 새로운 재료를 제시치 못해 실망스러웠다. 내용이 너무 허술한 세미나에 실망한 나머지 나는 주최자 측을 향하여한국에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발제를 단평영화와는 상관도 없는 프랑스 교수를 불렀느냐 항의성의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실내에 한국의 감독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들에게 자신의 영화작업에 대해 말할 있게 해달라 제의를 했다. 그러자 주최자 측에서도 실내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의견에 동의를 하고는 즉석에서 감독들과의 대화시간을 열러 몇몇 감독들이 한국 단편영화의 현실에 대한 설명을 하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직접 대답을 했다. 물론 그것으로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세미나에 불만이 컸던 한국영화인들은 그날 저녁 맥주 집에서 모여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면서 단편영화가 처해있는 어려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끝으로 하나 덧붙일 점은, 2001년의 마켓 또한 한국단편에 중요한 해였다. 1999 처음으로 미로비전이 참가한 다음 2000년에 인디스토리 배급사가 뒤를 따랐다. 다행이라면 2001년에는 영진위의 지원으로 미로비전의 채희승 대표와 인디스토리의 다행히 곽용수 대표가 참가하여 마켓에 큼직한 자리를 공동으로 마련함으로 정식으로 한국 단편영화의 해외 판매에 나섰다. 인디스토리는 독립영화의 배급이 구조적으로 막혀있던 1998년에 과감히 출발한 한국 최초의 독립영화 배급사로서 오늘날까지 오로지 ·단편의 독립영화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는데 자리를 빌려 곽용수 대표와 구정아 이사에게 앞날의 성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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