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짙은 숲이 자랑인 장안산은 장수의 명산이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갈라져 나온 호남정맥이 가장 먼저 빚어낸 까닭에 호남의 종산(宗山)으로 대접 받기도 한다. 이 덕분인가. 장안산의 정기를 받은 장수는 예부터 충절과 의기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장수가 낳은 충절과 의기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2덕(德) 3절(節) 5의(義)’로 상징되는 사람들이다. ‘2덕’은 방촌 황희와 정신재백장,‘ 3절’은주논개, 순의리백씨, 충복정경손,‘ 5의’는백용성조사, 정인승박사, 전해산장군, 박춘실 장군, 문태서 장군이다. 이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은‘3절’. 후대 사람들은 이들의 삶을 기리기 위해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와 공간을 보존하거나 문화유산으로 만들어 오늘에도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 남강에서 왜적장의 허리를 안고 강물에 떨어져 순절한 논개, 장수향교를 불태우려 침입한 왜적을 꾸짖어 감동시켜 향교의 원형을 온전히 보존케 한 정경손, 민정을 시찰하다가 꿩이 갑작스레 날아가는 소리에 놀라 송탄천에 빠진 현감의 뒤를 따라 순직했다고 전해지는 순의리 백씨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장수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이고 정신인 것이다.
스무 살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고 간 논개
장수는 논개가 태어난 고장답게 논개사당(의암사), 논개생가, 주촌민속마을 등 논개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장수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논개는 1574년(선조7년), 장수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외동딸인 논개는 부친을 일찍 여의고 숙부에게 의지하고 살았으나, 숙부 또한 생활이 어려워 어느 집 민며느리로 보내졌다. 그러나 논개는 그 집에서 도망치다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의 재판을 받게 된다. 무죄로 풀려나게 되지만 갈 곳 없던 그를 최경회가 후실로 맞는다. 1592년(선조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 현감은 의병을 모집해 왜군을 무찌른 공로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게 되고 논개와 함께 진주에 부임한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한다. 논개 또한 국치의 설욕과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촉석루 왜군 승전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하여,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해서 강물에 함께 몸을 던지고만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 후 나라에서는 논개에게‘의암(義岩)’이라는 사호를 내리고 진주 촉석루 곁에 논개 사당을 세웠으며, 1955년 고향인 장수에도 의암사라는 사당을 지었다. 지방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된 논개사당 의암사의 영정각 안에는 고고한 자태의 논개 영정이 있다. 그 아래 휘광문 자락 북쪽에는 논개기념관이 자리하고 있고, 기념관 앞 남쪽으로는‘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가 세워져있다. 매천 황현 선생은 논개의 충절을“신내 나루에 물까지도 향기롭구나. 내 얼굴 깨끗이 씻고 의랑에게 절하니… 천만년 역사에 제일 빛나는 휘황한 인물이 되었도다”라고 칭송했다. 장수에서는 매년 9월 초, ‘논개제전’을 열어 논개를 추모하고 애국정신과 정절을 기리는 각종 문화행사를 벌이고 있다.
목숨 건 의기(義氣)로 지켜낸 장수 항교
전국 지방마다 향교가 있지만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복원한 건물이다. 더구나 대개는 큼직한 자물쇠로 잠겨 있어 향교 안을 둘러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에 반해 장수향교는 수백 년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407년인 조선 태종7년에 창건된 지방교육기관인 장수향교는 1686년(숙종 12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600여 년이 흐른 지금 까지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수향교는 그만큼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향교 안에는 대성전을 비롯해 명륜당, 사마재, 진덕재, 경성재, 부강문등이 있는데 대성전은 보물 제272호로 지정됐다. 12칸짜리 대성전 건물은 주심포형의 특이한 공포구조로 역사적으로도 그 가치가 높다. 낮은 석축기단 위에 맞배지붕을 세운 이 건물은 정면 3칸과 측면 4칸으로 좌우 측면 하단에 석벽을 쌓았다. 향교가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데는 향교지기 정경손의 공이 컸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장수에 침입하자 백성들은 모두 피난을 갔으나, 정경손은 향교의 문을 굳게 닫고 문 앞에 꿇어앉아 왜병의 침입을 몸으로 막았다. 그의 기개와 지조에 감복한 왜장은 결국 향교를 침입하지 못한 채‘누구든 이 성역에 침범하지 말라’는 친필을 향교 문앞에 붙이고 물러갔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국의 향교가 거의 불타고 없어졌지만 오직 장수 향교만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수향교는 우리나라 현존 향교 중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잘 보존된 건축물로 꼽힌다. 향교 안에는 정경손을 기리는 비각이 세워져 있다.
절의의 상징, 타루비(墮淚碑)와 순의비(順義碑)
‘3절’중 또 한명인 순의리 백씨.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장수군 천천면 장판리에는 지방기념물 제83호인 타루비와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숙종4년(1678년),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에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천천면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나는데, 길가 숲 속에서 졸고 있던 꿩이 요란한 말발굽소리에 놀라는 바람에 무심코 지나가던 조현감의 말도 놀라 한쪽 발을 실족, 절벽 아래의 배리소에 빠져 급류에 휩쓸려 현감이 목숨을 잃었다. 주인을 잃은 백씨는 자기 잘못으로 현감이 죽었음을 한탄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고 자신 또한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가 바위벽에 남긴 혈서는 원한의 꿩과 말,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는 뜻의‘타루’두자. 그 후 1802년 장수현감 최수형은 그의 주인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타루비’라 이름 붙였다. 1881년에는 현감 이헌승도 백씨의 절의가 귀감이 된다하여‘순의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배리의 성은 백씨로 구전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도 혈서로 그린 검붉은 말과 꿩의 형상이 타루비에 남아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두 비각은 타루공원에 나란히 서있다. 험한 산세의 외진 지리적 위치로 생활은 풍족하지 못했지만 삶의 길을 밝혀주는 인물들을 배출한 장수. 충절과 의로움을 대표하는‘2덕 3절 5의’를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고 있는 장수 사람들은 행복하다. 갈수록 도덕적 가치관이 퇴색되어가는 때, 무뎌진 정신을 깨우게 하는 지역의 역사와 전통은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장수 사람들 또한“우리 지역의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정신적 가치와 교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삶의 지표가 된다”며 이들 역사적 인물들을 고장의 자긍심으로 내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