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2.2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모차르트’, 그 이름의 비밀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교수(2012-02-06 14:01:37)

음악 신동, 모차르트의 네임(full name)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이름을 들여다보시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있습니다. 그것은 볼프강과 모차르트는 독일어 이름인데 아마데우스는 독일어가 아닌 라틴어라는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으니 독일식 이름을 갖는 당연한데 가운데 이름만 라틴어를 사용하였을까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원래 모차르트의 가운데 이름은아마데우스 아닌 그리스식 독일어인테오필이었습니다. 볼프강 테오필 모차르트였던 것이죠. 그런데 모차르트가 13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비슷한 (신의 은총을 입은 , 신이 사랑하는 ) 이탈리아어아마데오 이름을 바꿨고, 그것이 다시 라틴어아마데우스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당시 음악가들에게는 흔히 있었습니다. 음악의 성인 베토벤도 자신의 본명인루트비히 베토벤대신 악보에 이탈리아식 이름인루이지 베토벤이라고 사인하곤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유럽 클래식 음악의 쌍두마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대가가 자신의 본명인 독일식 이름을 버리고 이탈리아식 이름을 사용하였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19세기 유럽의 음악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음악 교과서에는 19세기, 그러니까 1800년대 전후로 유명한 작곡가들이 줄지어 나옵니다. 바흐-헨델-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멘델스존 등등. 그런데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나 독일 출신이란 것입니다. 독일음악가들이 당시 유럽 음악계를 지배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까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답니다.


19세기 유럽의 음악계는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살리에르와 모차르트의 관계만 보더라도 있죠. 오늘날살리에르 작품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아마데우스 아니었으면 이름을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출신 살리에르의 라이벌이 되지 못했습니다. 살리에르는 궁정의 대표 작곡가로서 당시 음악의 중심지 빈의 최고 음악가로 대우받으며 지위를 오랫동안 누렸지만 모차르트는 계몽주의 황제인 요셉 2세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도 끝내 궁정의 작곡가가 되지 못한 거리의 음악가로 머물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유럽의 음악계를 이탈리아가 지배하게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입니다. 르네상스 전까지 유럽 음악의 주도권은 종교적 지위를 유지하는 음악을 천재적으로 활용한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교황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에 따라 바뀌곤 했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이탈리아 로마에 주로 머물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탈리아가 유럽 음악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지요.음악이 교회를 벗어나 세속으로 나오게 근대 초기, 사정은 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유럽 음악계에서 이탈리아의 패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와 함께 이탈리아는 근대 유럽 음악사에 가장 영향을 미친 위대한 발명을 합니다. 바로 오페라를 발명한 것입니다. 결혼식 뒤풀이를 위한장난처럼 시작된 오페라에 새로 등장한 시민계급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유럽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오늘날 한류는 저리 가라할 정도지요.한류는 일반 대중 중심으로 확산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는영주, 귀족,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떠오른 부르주아 지배계급들의 최고 여흥으로 자리 잡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이탈리아 작곡가 모시기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음악가들은 어떻게든 이탈리아와 연을 맺어야만 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오거나 이탈리아 작곡가를 스승으로 모시거나 아니면 이탈리아 언어나 음악어법으로 작품을 써내거나 아니면 최소한 이름이라도 이탈리아식 이름을 써야만 버틸 있었습니다.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이탈리아와 아무런 인연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바흐는 촌구석의 이름 없는 음악가에 불과했습니다(바흐를 재조명한 사람은 멘델스존과 이탈리아를 이기고 싶어 했던 후세의 독일 평론가들입니다). 독일 출신 헨델은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두각을 나타내며인기 작곡가가 되었고, 결국 이탈리아로 귀화하여 게오르그프리드리히 헨델이라는 독일식 이름 대신 조지 프레드릭 헨델로 바꾸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심지어는 독일 근대문학의아버지라고 불리는 괴테와 낭만주의 작곡가 멘델스존도이탈리아 기행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탈리아의 빛나는 문화와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탈리아 열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독일어로 오페라나음악 작품들도 있었습니다만 독일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음악을 무시하고 심하게는 경멸하며 오직 이탈리아식 음악만을 최고의 음악으로 여기는 문화 사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장면 같지 않습니까?사정이 이러했는데 우리는 당시의 대표적인 음악가들로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모르고 오히려 독일 출신 작곡가들을 많이 알고 있을까요?그것은 기막힌 반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스스로를 유럽의 촌놈이라고 부르는 열등감에 빠져있던 독일(정확하게는 프로이센) 부국강병 정책을통하여 군사력을 확장하며 1870 보불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정치적 패권을 장악하게 것입니다. 그리고나선 위대한 게르만의 시대를 펼쳐나갔습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음악을 지워나가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이탈리아음악의 하이라이트였던 오페라를 밀어내고 대신 독일 출신 작곡가들,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교향곡의 역사를 서양음악사의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들은 근대철학을 동원하여 음악의 숭고한 아름다움은 성악이 아닌 기악과 절대음악에 있다는 독일식 음악관을 음악의 주류사로만들어 냈습니다. 이후 유럽 음악사는 독일 출신 작곡가들로도배가 되다시피 합니다. 그동안 유럽 음악을 지배해왔던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이름은 지워지고 자리에 바흐를 아버지로, 헨델을 어머니로 독일의 작곡가들로 채워졌습니다. 이른바 독일제 서양음악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독일은 유럽 음악의 본고장처럼 인식되었고 이탈리아 음악,프랑스 음악 등은 경박한 음악,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정에 치우치는 음악, 변방에서 잠시 유행하는 음악 정도로 취급되기 시작하였고 위대한 독일의 작곡가들에 비해 한수 뒤지는것으로 평가절하되었답니다. 힘의 논리는 정치나 경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서도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모차르트가 시기에 활동하였다면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아닌볼프강 테오필 모차르트 남아있지 않았을까요?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