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을’이라 불리는‘전주(全州)’가 단일 행정구역 단위로 설치된 것은 685년 신라 신문왕 5년으로‘완산주’를 둔 것이 처음이다. 그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헌상에 보이는 확실한 치소(治所)의 명칭은 이때부터 나타난다. 757년‘전주’로 고쳐졌으니 전주는 천년이 넘는 전통의 도시인 셈이다. 900년 견훤이 전주에 도읍하고‘후백제’를 칭한 것은 전주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전주는 후백제 견훤의 땅이었던 셈이다. 견훤에 대한 이미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조선’을 건국했던 역사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대체의 역사상이었을 것이고 쓰러져 가는 고려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였다.
견훤성 경치가 오르라 하기에 / 옛 것 어루만지며 시름에 잠겨 쓸쓸히 웃네
한 사대부 구경하려니 지난 날이 슬퍼서 / 괜히 도참으로 세상을 한탄하네
노란 국화에 서리 내릴 즈음 술은 무르익고 / 청산에 해질녘 발길을 나선다.
옛 영웅들은 날아가는 새와 같으니 / 지쳐 쓰러지기 전에 일찍이 돌아올 줄을 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로 전해지는 이 시는 남고산성에 올라 읊은 것이다. 이색은 고려시대 성리학자로 새로운 사회 개혁을 지향했던 인물이다. 이성계,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에 반대한 사람으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1395년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벼슬에 나올 것을 요청하였음에도‘망한 나라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선산에 파묻을 뿐’이라 하면서 끝내 고사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적극 협력하였음에도 길을 달리했던 건국세력에 의해 제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패가 만연했던고려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리학에 있었다고 믿었던 이색이 견훤성을 보는 소회는 포은 정몽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길 산머리 돌길 가로 놓여 / 그 산 올랐으나 스미는 감정 이길 길 없네
청산에 은밀히 서약한 부여국(夫餘國)인데 / 누런 잎만 어지러이 백제성에 날리는 구나
구월 가을 바람에 깊어가는 나그네 시름 / 한 평생 호방했던 서생을 그르쳤네
하늘가에 해는 지고 뜬 구름 모이는데 / 머리 들어 하염없이 개경(開京)만 바라본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면서 대풍가를 부르자 서장관으로 동석했던 정몽주가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쓸쓸하게 노래한 시이다. 지금도 만경대 바위에 새겨진 이 시는 망국의 아련한 아픔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역사는 늘 흘러간다. 고려 멸망을 아쉬워했던 남고산의 천경대, 만경대는 천세 만세 무궁함을 대비한 지명으로 비춰졌다. 전주가 완산이었던 것은 조선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길이 성대함을 누리고자 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경기전을 고쳐 지으면서 지은 관찰사 이경전의 상량문에 나오는 말이다. 조선숙종대 명신이었던 문곡 김수항(1629~1689)은“땅은 임금을 내어 왕기(王氣)를 머금고, 산은 걸터앉은 뱀 같아서 웅장한 성을 수호하네”라 하여 조선의 본향지였던 전주를 위호하는 남고산을 노래하였다. 또“명예로운 도회(都會, 전주)는 성조가 창업한 땅이요 황폐한 보루는 견훤이 말달리던 성이라”하여 조선의 번성함과 옛 후백제의 과거를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은‘전주’의 도시정체성을 새롭게 만들게 된다.
큰 고을 여러 곳에 있으나, 완산(完山)이 가장 진기하다.
천년 세월 제왕(帝王)의 상서로운 기운이 모여, 한 시대의 왕업(王業)을 열었네
조선의 개국원종공신이었던 양촌 권근(1352~1409)은 전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제왕을 낳았던 도시로서의 전주는 그 자체만으로 상서로운 고을이었던 것이다.
기린봉 형세는 투구와 같고 / 완산은 호남의 첫째가는 고을이라
혼란했던 삼국시대 군비를 담당했고 / 오랜 태평성대에 뛰어난 인물을 내었네
백성들은 부지런히 갈고 길쌈하여 / 배우고 익혀 가문에 전하는 이 공자와 주공(周公)이네
숙종대 뛰어난 문장가이자 시인이었던 이사명(李師命,1647~1689)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읊은 시의 일부이다. 조선시대 전주는 주나라의 태빈으로 한나라의 풍패(豊沛)로 한 나라의 건국조가 난 고장의 인식과 국가의 재정을 떠받치는 탕목읍(湯沐邑)으로서의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이속에서 만일 황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 어디에서 매서운 위세를 찾을 것인가?”전주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조선왕실이 시작된 성스러운 곳이었던 것이다.경기전 유료화 논쟁에서‘조선왕정, 이씨왕정은 민주주의시대의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천년고도 전주의 경기전이민주주의 시대 있어서는 안 될‘역사적 교훈의 장’으로 누군가에게 비춰지고 있는 현실의 격세지감은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의 역사는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발전해 나가는 역사의 법칙 속에서 늘 배척의 대상이어야 할까 아니면 앞으로 나가야 할 힘의 원천으로 받아드릴까? 개인의 세계관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무게감이 너무나도 크다. 내가 그 곳에서 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