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도에 열린 스위스 한국전시와 한국영화 회고전
21세기의 밀레니엄을 맞는 시점에 한국국보문화재전시‘ 한국 -고대왕국들(독어 Korea-Die Alten Konigsreiche)’이 쥬리히 리트베르그 박물관(Rietberg Museum)에서 크게 열렸었다. 1952년에 설립된 리트베르그 박물관은 전적으로 유럽 밖의 지역들, 즉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주의 예술품을 유럽에 소개해온 국제적 명성의 전시장이다. 그러나 한국국보문화재전시(지금부터 한국전시)는 독일 에쎈의‘빌라 휴겔(Villa Hugel)’그리고 뮌헨의‘히포 예술관(Hypo-Kunsthalle)’과의 공동 작업으로 이뤄진 것으로서 80년대 중반 이후 해외에서 열렸던 전시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행사였다. 에쎈, 뮌헨, 쥬리히의 순서로 열린 세 박물관의 공동전시는 독일에서 1999년 6월부터 2000년 2월까지 그리고 스위스에서2000년 3월에서 6월까지 진행됐었으며, 전시 품목은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등 6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국보 15개와 보물 27개를 포함한 문화재 317점이었다. 특징이라면 전시품들이‘무속-불교-유교’의 주제별로 나눠져 진열됐던 점이다.2000년 전시를 준비한 전문가 중 한명이었던 최선주 박사(전 국립박물관의 불교미술전문가)의 말에 따르면“반가사유상은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하마터면 독일과 스위스 전시품에서 빠질 뻔 했었다. 국보중의 국보를 밖으로 내보냈다가 혹시 사고라도 나면 후손에게 큰 죄를 진다”는 게 반대의 이유였다. 하지만 전시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반가사유상의 첫 해외 나들이가 허락됐던 것이다. 그것도 처음에는‘독일까지만’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리트베르그 박물관장의 조정으로 결국 스위스까지 통과될 수 있었다.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독일과 스위스에 도착한 반가사유상은 가는 곳마다 컬트 불상의 대접을 받았다. 묵상에 깊이 잠겨있는 그의 영묘한 모습은 한국전시의 상징으로 떠올려져 포스터, 도록, 전단 등을 장식했으며, 리트베르그 박물관 전시장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룻즈 박물관장이 들려준 말을 옮기자면“박물관 감시인으로 일하는 여직원은 어느 날 반가사유상 앞에서무릎을 꿇고 오래 울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을 봤다. 그런데 여인은 그 뒤에도 며칠을 두고 날마다 나타나 같은자세로 불상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 나서 여인은 다시 오지 않았으나 서글피 울던 여인의 이야기는 감시인의 입을 통하여 박물관 직원들에까지 퍼지면서 한국전시 동안 일급의 화젯거리가 됐었다”
한국전시는 스위스 한인사회에 문화적 활성화의 계기를 가져다 준 신선한 바람이었다. 솔직히 그 때까지만해도 한국과 스위스 사이에 문화적 교류는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드물었다. 물론 스위스는 중립국인데다가 나라도 작고해서 한국과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가 직접 맞닿을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작았을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스위스에는 주로 정년퇴직을 앞둔 대사들이 보내졌고 그러다 보니 한국문화의 진흥과정보활동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권순대 대사는 아주 달랐다. 그는 한국전시를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전시가 시작되기 1년 전에 벌써 리트베르크 박물관의 알베토 룻즈 관장과 문화계에서활동하는 교민 몇몇을 중심으로‘한국전시 준비위원회’를 만들고는 한국전시를 아우르는 부대행사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뒤에서 힘껏 밀어줬다. 그리하여 한국 문학과 미술의 세미나, 한국영화 회고전, 한국도자기 전시 등이 공식적인 부대행사의 프로그램으로 채택됐으며, 그걸 바탕으로 권 대사는 준비위원을 두어달에 한 번씩 대사의 집으로 아니면 음식점으로 초청하여 같이 식사를 하면서 프로그램 준비 진행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준비된 한국전시는 드디어 2000년 3월 19일 오후 7시에 문을 열었다. 인간문화재 양승희(가야금 산조), 강정희(가야금 병창), 채조병(대금)의 국악연주와 함께 열린‘역사적’인 개막식에는 스위스의 2000년 대통령 아돌프 오르기(스위스는 해마다 국가 원수가 바뀌는 제도를 지키고 있다)와 서울 중앙박물관장 그리고 많은 교민들이 참석하여 그 자리를 빛냈다. 그리고 첫 부대행사로서 김선중 선재박물관장이참가한 한국미술의 세미나가 베른의 미술관에서 3월에 있었고, 6월에는 박후남 철학박사가 준비한 한국문학의 밤이 쥬리히와 바젤 등 세 곳에서 열려 오정희, 김주영, 김운우 소설가들과 김광규, 황지우 시인들 그리고 성민엽, 김병익 평론가들이 현지에 직접 참석했었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양승호 도자기 전문가(스위스 정부의 예술공로상 수상자)의 전시가 박물관의 작은 전시장에서 있었다. 그 밖에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첼리스트 김영옥이 협연한 금호 현악4중주단의 공연이 제네바에서 따로 열렸는가 하면 스위스 한인회에서 준비한‘한국 페스티발’의 행사를 통하여 김덕수 사물놀이와 한국 전통무용의 공연, 태권도 시범경기, 한복 패션쇼, 한국음식 전시 등이 6월에 리트베르크 박물관의 정원에서 푸짐하게 열렸었다. 한국전시는 교민들뿐 아니라 스위스 방문객들 사이에 인기가 아주 높았다. 룻즈 박물관장은“박물관 설립 이후 90년대의‘인도불교전시’다음으로 많은 방문객을 끌은 성공적인 행사였다”며 아주 만족해했다. 그리고 권순대 대사는 부대행사에 참여한 준비위원들의 협조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정부에 보내므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한인회장 이종진과 박후남 그리로 나에게 표창장과 조그만 상패가 주어졌다.
한국영화 회고전 준비에 얽힌 이야기들
나는 권순대 대사가 조직한 한국전시의 준비위원 하나로 한국영화 회고전을 맡았다. 사실은 권 대사의 열심에 감동되어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에 뛰어들긴 했지만 그 전에 대사관과 일을 해본 적이 없어 처음엔 어떻게 시작을 할지 좀 막연했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뮌헨의 영화박물관장 스테판 되슬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되슬러는 스위스 친구에게서 스위스의 한국영화 회고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던 것인데, 그는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하나는 1999년 11월에뮌헨에서 시작되는 한국전시에 맞추기 위해‘회고전을 그의 박물관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느냐’였다. 그리고 둘째는 영화박물관의 상영이 끝난 뒤에‘콤뮤날레스 키노’를 통해 독일의 10개 도시에서 2개월 동안 순회상영을 하고 싶은데 내 생각은 어떤지를 물었다. 이 비상업 영화관단체에 대해서는 문화저널에서 설명한 바 있다.그렇지 않아도 그 무렵 나는 어떤 식으로라도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던 터라 그의 물음에 귀가 번적 띄었다. 한마디로 프로그램 하나를 가지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위스 밖의 행사라서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먼저 독일의 한국문화원에 문의를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1999년 4월 중순에 나는 되슬러 관장과 함께 본(전독일의 수도)으로 가서 이현표 문화원장을 만났다. 문화원에는 상당수의 한국영화가 보관돼 있었다. 그 가운데 이름난국제영화제의 수상작도 더러 들어있었지만 내 프로그램에 맞는 영화가 없어실망했다. 그리고 문화원장과의 대담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 도착전에 내가 보낸 팩스와 전화를 통해 되슬러의 방문 목적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받았음에도 그는 되슬러의 물음에한 건도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해보자는 의견도 제시하지 못한 채 그가 기껏 하는 소리는“독일 회고전의 협조에 대해서 정부에 물어보겠다”는 정도였다.
그런데다 그는 되슬러에게 작업 비용을 얼마 주면 되느냐고 물은 뒤“그 문제는 내가 충분히 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허튼 소리를 하여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는 내가 되슬러와의 모임을 준비하기위해 전화를 했을 때도 회고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 개인의 신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무례를 서슴지 않았는데,되슬러가 마침 돈을 요구한 것처럼 돼버렸다. 되슬러는 더이상 문화원장과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문 채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나중 나에게“오랫동안 여러 나라의 문화원과 일을 해왔지만 오늘 같은 텅 빈 모임은 처음이다. 그가‘정부에 물어보겠다’고 했지만 미덥지 않다. 그래서 뮌헨의 회고전은 아쉽지만 포기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 모임이 실패한 뒤 나는 6월초에 프랑스의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 갔다. 실은 이성강 감독의 <덤불 속의재>가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로서는 최초로 경쟁부문에 선정되는 바람에 기자회견을 위한 통역을 맡아서 간 것인데, 거기서 나는 문화관광부 영화진흥부의 김상욱 행정사무관을 만나는 행운을 맞았다. 김 사무관은 내가 스위스 회고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좋은 일인데 국가에서 도와줘야지요. 한국에 돌아가서 알아보겠습니다”라며 나를 우선 안심시켰다.그리고 두어 달이 지난 뒤에 그로부터 메일이 왔다. “문광부에서는 영화진흥위원회의 2000년 사업에 스위스 회고전을포함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영화진흥위원(영진위)과 영상자료원에 직접 연락하기 바랍니다”라는 희망이담긴 소식이었다. 그러나 영진위와 영상자료원에는 내가 회고전을 맡자마자 미리 연락을 했던 터라 새로 연락할 필요가없었다. 그 대신 나는 9월에 귀국하여 2주일간 부산국제영화제서 일을 한 다음 서울로 올라가 김상욱 사무관의 사무실에 먼저 들렸다. 스위스 회고전이 영진위의 2000년 사업에포함됐다는 소식을 받은 뒤였기에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하러 갔던 것인데 그가 다른 부처로 옮겨가는 바람에 만나지못했다. 그 대신에 그의 후임자를 만나고 그로부터 정부의새로운 해외 영화 사업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다. 그중 정부에서 해마다 해외 국제영화제의 수상작 다섯 편을 자막과 함께 해외 문화원들에 보낸다는 정보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를 가장 기쁘게 해준 건 문화교류부의 이진식 사무관과의 대화였다. 그는 내가 스위스 회고전에 대해말을 하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문화교류부에서 프린트운송문제를 도와주겠다”고 시원스럽게 말하면서“그러기 위해선 스위스의 한국대사로부터 행사에 대한 보고와 함께 프린트 요청의 공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고도 그는 파리문화원에 보존돼 있는 영화목록을 나에게 넘겨주면서“필요한 영화가 있으면 파리 문화원으로연락하라”고 친절히 일러줬다.
문광부 다음으로 내가 간 곳은 영진위의 국제부였고 거기서 이건상 부장과 류현상 실무자와 만나 회고전 준비과정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둘은 과거 낭트, 페사로, 라 로셀, 뮌헨 등의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을 할때마다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협조가 잘 됐다. 그렇지만 제작자 일부에서 협조를 해주지 않아 마음을 놓기는 너무 일렀다. 아무튼 영진위에서 일을 미친 다음에 나는 영상자료원에 들려 박노민 부장에게 프린트 사용에 대해서도 협조를 부탁했다. 회고전을 하다 보면 프린트 일부는 영진위에, 일부는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기 마련이어서 양쪽 다 사전의 토의가 필요했다.나는 그러고도 마음으로 놓을 수가 없어 제작사 가운데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하명중 영화제작사의 하명중 감독, 태영 제작사의 이효성 제작자 그리고 임권택, 이두용, 유현목 감독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전화를 하여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회고전을 할 때마다 가장 힘든 문제는 제작자들의 하락을 받는 일인데 배급자들이 협조를 꺼려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수송 중에 프린트가 망가지거나 없어질 위험 때문이고 둘째는 프린트 사용비가 평균화 되어있지않기 때문이다. 제작권이 인정되지 않았던 90년대 초 까지만도 해외에서 쓰는 영화는 정부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루과이 협상 이후부터는 한국에서도 제작권이 법적으로인정되면서 제작, 배급사의 허락 없이는 국내외 어디서나 영화를 틀수가 없게 돼있다. 스위스를 예로 들자면, 해외 회고전의 영화는 대개가 전국의 큰 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예술영화관에서 상영된다. 이들은 상업영화관에 비해 관객 수가많지 않기 때문에 수입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러므로프린트 사용비는 관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2천년 한국영화 회고전 때는 프린트 1회 사용에 100달러, 2회에 180달러, 3회에 250 달러를 각 배급자에게 지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