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리 아득한 허공에 말을 부려 다리를 놓는 이유 김병용 소설가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하지만, 문학 또한 자신이 속한 시공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분단된 지 고작 60여년 만에 우리 남한 작가들은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뻗어나가던 상상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문청 시절,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둔황>과 <누란>을 읽으며 그 상상력의 스케일에 질투와 부러움, 그리고 투지를 동시에 느낀 적이 있었다. 천산처럼 가파른 상상력이어야 하리! 타클라마칸의 광활함에는 오히려 불귀(不歸)의 결기로 맞서야 하리! 투르판의 화염산보다 더 뜨거운 불의 혀를 지녀야 하리! 그 당시, 내게 새로운 상상력에 눈뜨길 역설하였던 이가 바로 이병천 형이었다. “지나다 들렀습니다”라는 자그마한 술집에서 어리숙한 후배에게 문학의 길과 작가의 길을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줬던 병천 형은, 얼만큼 불콰해지면‘예성강’이라는 노래를 그야말로 목 놓아 부르곤 했었는데“…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흠뻑 물기 젖은 형의 목소리가 아주 머언 곳에서 길게 메아리치곤 했었다. 그때마다 내 몸에선 소름이 돋았다. 이게 문학이구나!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어느 곳, 그 어느때, 그 어느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스스로 불러내는 일… 자신의 입이 부른 노래가 자신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일... 온몸이 사무치는 그리움에 사로잡혀 마침내 펜을 잡지 않고서는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유폐, 그 속에서 그리움이 부글부글끓어 넘칠 때까지 발효의 고통을 견디는 일이 문학이라는 것을병천 형은 내게 노랫가락으로 일러주었다.<사냥>에서 시작된 이병천 형의‘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 <신시의 꿈>으로이어지면서 나날이 더 커지고 더 구체적인 엮음새로 드러났다.그리고, 마침내 이 책 <90000리>로 마침내 구역(九譯)의 한계를 돌파하는 새로운 문학적 시공간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구(九)’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완정성의 아득함을 상징해왔다. 구중(九重), 구주(九州), 구역(九域)과 같은 단어 속에서는더할 나위없는 완벽한 경계라는 뜻이 숨어 있고, 구천(九天, 九泉)과 같은 단어에서는‘구만리 장천’과도 같은 아득함이 묻어난다. 완벽은 언제나 인간들의 꿈이고, 꿈은 또 언제나 멀고도먼 법.소설 <90000리>는 지상에서 하늘까지 그 아득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고조선의 유민들이 하늘의 참뜻을 읽기 위해 갈석산에 출발, 둔황과 누란을 거쳐 사마르칸트, 파미르, 테헤란을 통과해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와 만나게 되는 2천 년 전의 여정… 그길은 자신의 삶과 영혼을 온통 길 위에 던지겠다고 결심한 사람만이 간신히 가 닿을 수 있는 길이며, 구만 번의 절망과 후회, 위기를 통과해야만 간신히 당도할 수 있는 격절 그 너머까지의 거리이다. 넘어서야 하는 것이 어디 공간뿐이겠는가, 시간도 뛰어넘어야 하고, 아홉 번씩이나 바뀌는 언어의 격절도뛰어넘어야 가 닿을 수 있는 저 먼 곳 너머의 너머…‘그때 그자리 그 사람들’이 바로 그 공간과 시간과 언어를 모두 관통하는 길 위에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그 사람들이 후세‘동방박사’라고 불렸다던가, 베들레헴 목수에게서 받은 곱자가‘금척 신화’로 재구성된다는 이야기는 이 길의 시작과 끝에 서있는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즉, <90000리>는 명확하게 역사와 신화에 대한 상상력으로부터 빚어진작품이라는 뜻이다.물론, 누구나 무엇이든 상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칫 공허해보일 수도 있는 상상력에 말과 글로 살을 붙이고 뼈를 세우는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상상으로 시작된 일이 한권의 책이 되기까지, 작가는 상상력에 상상력을 더하고, 자료를조사·검토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서탁에 정좌해 붓을 쥔 채, 아득한 글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이건 그야말로, 다른 어떤 사람이나 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맨몸으로 벌이는 원시 노동이다. 오직 두 발과 두 눈에만 의지하여 타클라마칸의 모래바람 속으로 뛰어든 그리메와 달하의 여정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 이병천도 구만리 멀고 먼 길을 편두통에 시달리며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양과 서양이라는 근대사의 이분법은 소멸된다. 칼리와 융커, 에데사가 그 길 위에서 동행이 되었다 헤어지고 또 싸우기도 하는 사이, 조로아스터교와 동방의 쇠불이 만나며, 이국 여인이 공후를 연주하기도 한다.- 왜 그때라고 통교가 없었겠는가? 저 너머에 대한 사람들의그리움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면, 그때에도 길은 있었고 길 위에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사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이처럼 명료한 것이다.우리는 때때로 시간 그 너머의 것들을 역사책 속에 감금하는데 익숙해져 있어, 과거를 몇 줄의 글로 결박해버리는 역사적하극상을 범하곤 한다. 오늘이라는 결과에 맞춰 과거라는 원인을 역으로 재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을사는 우리에게 원인이란 오히려 결과보다 더 뒤에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착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불완정한 사실(史實)의 파편 조각들을 사실(事實)처럼 보이게만드는, 사가들의 교묘한, 선언적 언술 행위라고 할 수 있다.<90000리>는 이와 같이‘굳어져버린 언어’에 맞서 싸우는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고조선과 아기 예수는‘주어진 과거’가 아니라‘이제 시작되는 현실’이다. 그 속에서는 2천년의 시간도, 구만리의 거리도 모두 땀과 열망의 서사 속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과 하나가 된다.이 책의 말미에 작가가 붙인‘연대기’속에서는 예수와 그리메의 연보가 똑같은 무게로 담겨져 있다. 이를 신성모독이라고여기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은 바로 그런 분들이읽어야 할 책이다. 까마득한 시공간의 커다란 틈바구니 사이에이병천 형은‘다리’를 놓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다리’를 밟고 서보라, ‘그때 거기 그 사람들’과‘오늘 여기 이 사람들’이 모두 이 다리 위에서 만난다.책은 심심풀이 파적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통해작가와 대화를 시도하고, 마침내 그 대화의 끝에서‘질문하는나’를 발견하는 것이 책을 읽는 일이다.이 책을 읽고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상들의 욕망과 그리움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지었고, 우리의 살과 피가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리움을 안고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