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2.5 | 칼럼·시평
[문화시평] 전주시립극단‘사천의 착한 여자’
관리자(2012-05-14 10:58:59)


 전주시립극단‘사천의 착한 여자’(2012.3.31-4.1/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누가 세상을 바꾸게 될까? 정초왕 전북대학교 교수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세상’에 살며, 연극이 사람 살기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원했던 브레히트(1898-1956)에게 당대의 주류 연극은 도리어 이에 해악을끼치는 존재에 불과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토대를 둔 서구의 전통 연극에서 관객이 극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비극적 운명에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느낌으로써 궁극적으로는‘카타르시스’를 얻는다고 할 때, 이러한‘감정이입의 드라마투르기’는 극중 사건에 대한 관객의 판단능력을 약화시키는 데에나 유용할 뿐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의‘서사연극’은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또는 대리만족)를 통해 관객의 심적인 응어리를 해소시켜주지 않는다. 그 대신에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여 관객이 극 속의 사건을 낯설게 대하면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도록 만드는데, 그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극 속의 모순된 현실에 대한 올바른 판단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극장 밖의 실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능동적인 참여의 동력으로 삼으라고 주문한다. 전주시립극단이 3월 31일과 4월 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무대에 올린“사천의 착한 여자”(원제: 쓰촨의 착한 사람)는‘비유극’의 틀에 담긴 신랄한현실 비판적 주제와 내용을 다양한 서사적 기법을 구사하여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의 연극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첫날 낮 공연을 보면서무엇보다 관심이 쏠렸던 것은 공연장 분위기와 관객들의 반응이었던 것 같다.이번 공연은 연출자와 배우들의 역량이 어우러져서, 좀 더 다듬으면, 작품 자체로서는 수준작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군데군데 드러난‘구멍(?)’들을 몇 가지만 들어보면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공연대본이다. ‘믿을만한 번역본’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번역자의 이름이 없다!?), 중요한 장면에서원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부분들이 많았다. 다음으로는 음악과 노래이다. 본디 서사극에서 전형적인‘거리두기’기법‘( 생소화효과’)의하나로서극중 사건에 대한‘주석(코멘트)’의 기능을 담당하는 음악과 노래가 이번 공연에서는 거의‘상업적인 뮤지컬’처럼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하기까지 했다. 또하나는 연기방식의 문제이다. ‘감정이입의 연기술’을 벗어나 서사극이 추구하는‘거리두기의 연기술’을 제대로 구현하기위해서는 연기자들(특히 주인공“선덕”)이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갖고 놀면서상황을 제어함으로써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장면들을 좀 더 많이 만들어냈어야했다. 거리감에서‘웃음’이 나오고, 웃음으로써‘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술적으로 미흡한 것을 찾아내고 개선하여 예술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더 큰 난점은 바로 이 작품의 작가가 그 사회적인 기능을 무엇보다 중시한 사람이라는 데서 주어진다. 작품의 메시지가 공연에서 어느 정도 전달되었을지 더 공들여 살펴보아야 할 터인데, 이게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이다. (사실 브레히트의 작품은 당대에도 잘못 받아들여진 경우가 많았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것이 성공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대체 이 험한 세상, 아귀다툼 같은 인생은 세상 탓일까? 아님 인간들 탓일까?‘신들’은‘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서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직접찾아보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다(부언하면, ‘착함’은 거의 종교적인‘절대선’이며, ‘인간다운 삶’이란‘의식주 등의기본 조건이 보장된 생활’을 말한다).막이 열리면 신들은 이미 궁지에 몰려있다. 몸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선덕’만이 손해를 감수하고서 그들을 재워주는데, 신들은 이‘착한 여자’에게 숙박비로 돈(자금)을 대줘 장사(사업)를 하게한다. 그리고 인간답게 생을 영위하며계속 선행을 베풀라고 명한다. 그들에게는‘자신들이 만든 세상이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있는 그대로 존속해도 좋다’는 명분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단 한 명이라도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신들의 이‘실험’은 과연 어떻게 될까? 공연은 그 과정과 결과를 보여준다.선덕은 개업 첫날부터 난관에 봉착한다.이미 점포 계약에서 사기를 당했을 뿐 아니라 몰려드는 파렴치한 식객들 등등,파산에 직면한 선덕은 가공의 악한 사촌‘태수’로 변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최악의 사태는 선덕이 일자리 없는 비행사를 사랑하게 되면서 닥쳐든다.취직을 위해 뇌물을 써야 했던 비행사는선덕을 이용하려하고 결국 결혼이 파탄나면서 뱃속의 아이만이 남는다. ‘사랑(선)’이 도리어‘삶(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는 아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선덕은 제 아이만은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악한 사촌 태수로 변신한다. 부정한 밑천으로 담배공장을 차려 기업주로서 성공을 거둔 그는 선행을 베풀라는 신의 명령도 착실히 이행해나가지만, 선덕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정에 서게 된다. 재판관으로 등장한 신들은‘태수’와‘선덕’이 동일인임을 확인하고는 상황을 얼버무리며 꽁무니를 빼버린다. 신들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그들이 만든 세상(당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다른 결과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어야할까? 결론은 관객에게 맡겨진다. 연극은 그저 문제를 제시할 뿐, 그 답(해결)은 실제의 삶이 영위되는 현실 속에서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도 마지막에 한 연기자가 관객에게 묻는다.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세상, 또는 사람, 아니면 물질, 도덕성?”내 옆에앉은 아주머니가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도덕성!"이라고 응답한다. 아마도‘사람’이 바뀌어야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사실 원작의 대사에는‘물질, 도덕성’이란단어가 없다). 그리고는 1980년대 후반,당시 대학 공연 때의 질문에 젊은 관객하나가‘세상이요!’라고 외치던 기억이곧바로‘오버랩’된다.2012년 대한민국, 우리는 지금 어떤사람이며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절대 빈곤을 넘어서고 권력도 제 손으로선출할 수 있게 되었으니‘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시대’는 옛말이 되었을까?‘계급투쟁’이라는 단어는 이미 낯설어졌고, 이제는‘욕망’이 문제라고들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장질서가 공고히 뿌리내렸다고 하는 지금 여전히‘부정과 불의는 거리를 활보’하고, 성실한 생활인들은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우리의 세상이 결코 아무 문제도 없는 곳이라고, 그러니 아직도‘착한 사람 살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있는 사람은 바보 같다고 말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브레히트의 영화“쿨레 밤페. 또는 세상은 누구의 것인가?”(1932)에서는 마지막에 한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 “누가 세상을 바꾸게 될까요?”그러자 한 젊은여성이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요.”‘세상’을 바꾸려면‘사람’도 바뀌어야 한다. ‘시대가 그 해석을 좌우하기 마련이기에 고전들은 계속해서 다시 읽혀져야 한다.’라는 금언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면, 당대의 문제와 대결하면서 의미와 활력을 얻었던 작품일수록 더 더욱 공연하는시점‘( 지금 여기’)의 현실과의 접점을 제대로 찾아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이 글의 서두에서처럼‘미식가적’이라거나, 또는‘살아 움직이는 미술관 소장품’을 그것도‘복제품’으로 보여줄 뿐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참쉬운 일이 아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