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잘 드는 양지에 바람이 잘 통하는 집안의 한편에는 어김없이 장독대가 자리한다. 마당보다 한 단 높게 쌓은 장독대는 항상 청결하게 유지되었고 금줄과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 놓는 장독대 곁에는 봉숭아나 옥잠화를 심어 장의 부패를 막기도 했다. 장독 역시 크기별로 줄을 세워 서로 햇볕을 잘 받게 하고 앞마당이나 뒤란의 주변 자연환경, 흙담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게 했다.
그뿐인가, 장독대는 요리의 장소이기도 했다. 간장 한 숟갈과 된장이 섞여 맛있는 쌈장이 되기도 하고 건강한 밥상의 화려한 반찬이 만들어지는 원천이 장독대였다. 제철의 깻잎, 마늘, 무가 넓적한 돌에 눌려 장아찌가 되고 비린 생선이 묵어 입맛 도는 젓갈이 되는 곳도 바로 ‘여기’였다. 장독대는 치성의 공간이기도 했다. 무병장수를 관장하는 칠성신이 산다고 여겨 정화수 한그릇 떠놓고 정성을 다했다. 장독대는 오랫동안 여인들의 삶과 어머니의 기원과 정성으로 함께 해왔던 것이다.
기억 하나. 터질 듯한 오줌보를 잡고 추위를 무릅써야 할지, 참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어느 겨울 새벽. 후다닥, 신발을 신고 화장실까지도 내달리지 못하고 뒤꼍 어디쯤에 하얀 김이 서리게 하다 화들짝 놀란다. 촛불이 켜진 장독대 앞, 어머니는 소란스런 소리에도,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모으고 계신다.
기억 둘. 볕 좋은 봄날의 일요일. 막 출전준비를 끝내고 칼싸움 한 판 하러 가려는 찰라, 어머니 나를 부르신다. 키만 한 독에서 발에 채일만한 작은 단지까지 나란히 줄을 선 장독 사이를 오가며 청소를 하시던 어머니의 부름이다. 비 한바탕 내리면 또 흙 튈 장독을 뭐가 그리 중요한지 닦고 또 닦아 내는 일이 마뜩하지 않다. 빨리 끝내는 게 중요한 나는 대충 닦아내고 줄행랑을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그후로도 한참을 장독대 청소에 몰두하신다.
한국음식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간장, 고추장, 된장이 보관되는 장독대. 이 공간은 적어도 어머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기억된다. 장맛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염원하고, 집안을 지키는 신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지는 공간에서 정성을 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일상의 장소가 기원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은 집안 곳곳에 자리한다. 성주신이 있는 대청, 조왕신이 있는 부엌, 측신이 있는 화장실. 집 칸칸마당 가족을 지켜주는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 갔던 것은 아닐까.
장독대에서 하늘을 향한 어머니의 기원은 실현됐는지 알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만 보는 인간의 눈으로 그 염원의 실체를 확인할 방법은 없겠지만 그 간절한 기원이 어디 끝자락에는 닿지 않았을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뒤란에서 원망과 눈물을 축원과 기원으로 승화시켰던 공간, 장독대. 흙과 불로 빚은 장독의 투박함처럼, 하늘을 향한 어머니의 소박한 기원이 알알이 기억되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