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3.1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번역은 지식의 민주화를 이루는 일”
고전 번역가 변주승 교수
이세영 편집팀장(2013-01-04 15:04:01)

기억을 더듬으면, 90년대 후반까지도 번역된 책을 읽는 것은 여간 고약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책이 전문서적이라면 번역의 번역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했던 경험, 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 쉬운 번역 1세대인 변주승 교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전주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한국고전학연구소장, (사)한국학고전문화연구원 부원장 등 다소 복잡하게 얽힌 것 같은 그의 직함이 그 증거다.

그래도 그의 일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쉬운 번역’이다. 누구나 읽기 쉬운 말로 번역을 하려는 그의 생각은 어쩌면 아버지 산암(山巖) 변시연 선생으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아니, ‘기둥을 이으라’는 이름에 담긴 아버지의 바람과 온전히 유전자에 새겨진 ‘문풍’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이해하는 꼬리를 그의 아버지에서 잡았다.

아버지는 호남의 대표적 한학자다. 한학자답게 꼬장꼬장한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엄한 스승이었다. “젖 떼고 부터는 아버지와 한 방에서 지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진학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지냈는데 어찌나 혹독하게 가르치는지 진저리를 쳤죠. 신발 잘못 놓으면 한 대, 소리 내 문 닫으면 한 대…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어요.”

밥을 먹는 시간도 편할 수 없었다. 아버지 식사하시는 동안 매번 시립해야 했고,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제일 맛없는 반찬 하나 짚으며 “이것만 먹어라”했다고 한다.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기억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노인네가 말이야, 어찌나 나를 못살게 구는지.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방에 있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선뜻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치를 하고 싶었던 그를 아버지는 “공부해라”는 말 한 마디로 사학과에 집어넣었다. 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직접 체험한 그가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조국, 산하 이야기만으로도 눈물이 났던 시기’를 보내던 그에게 암수술을 받은 어머니가 유언처럼 말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달라.” 그렇게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를 아는 친구들은 “네가 무슨 공부냐”며 놀려댔다. 선비의 정신이 대를 이었던 것일까, 공부를 할수록 깊이 빠져들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으니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터였다.

“우연의 연속으로 번역작업을 하고 있지만 전 역사학자입니다. 박사 논문으로 조선 후기 유민에 대해 쓰면서 밑바닥 자료부터 봤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번역의 수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죠.”

그는 논문을 쓰면서 당시 번역의 한계를 봤다. 그리고 생각한 것이 ‘쉬운 번역’이었다. 누구나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급격한 단절을 겪었던 우리의 역사와도 관계가 깊었다. 100여 년만에 한자문화에서 일제 강점기, 분단, 한글이라는 시대를 겪었던 우리의 역사를 현재화시키는 작업이 고전번역이었다. 더구나 고전을 번역한다는 것은 ‘지식 민주화’와 맞닿아 있기도 했다.

“번역이 완벽하게 원 저자의 의미를 전달할 수는 없는 일이죠. 그러나 번역은 어제와 오늘,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읽지 못하는 과거의 글을 현재의 언어로 바꿔주는 것, 많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이 함께 다 읽을 수 있는 번역은 지식 민주화의 첨병이죠.”

94년 거처를 전주로 옮겼다. ‘노령 이남으로는 내려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엄명에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던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던 탓이었다. 초야에 은거한 선비처럼 완주군 천호성지에서 옛문서를 번역하는 일로 일과를 삼았다. 그리고 우격다짐으로 자리잡은 전주에서 그의 결실은 하나둘 빛을 보기 시작했다. 전주대 시간강사 명함으로 이름있는 대학을 재치고 <대한계년사> 국역번역사업을 따냈다. 그는 이미 ‘준비된’ 사람이었다.

그의 번역에는 딱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중고등학생이 국어사전을 놓고 볼 수 있는 책을 펴내는 것이었다. “번역을 해보니까, 한문을 잘한다 해서 번역을 잘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또 역사학을 한 사람은 한학 문리가 안 되고, 국문학을 한 사람은 한문을 모르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칙이 ‘세모꼴 원칙’이다. 번역에 임하는 자세에서 역사만이 아니고 한문에 대한 빈틈없는 독해력, 역사에 대한 구조적 이해력 그리고 이것을 아름다운 한글로 풀어내는 한글 실력이 한데 묶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그 때부터 방학이 되면 아버지의 집을 찾아 한학을 배웠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이 부분이에요.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가학을 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94년이 되어서야 한학을 시작한 것이지요. 책을 읽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옆방에 계신 아버지께 물어 볼 수 있다는 게 저에겐 큰 힘이었죠.”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과 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때다. 그렇게 김우철(동해대)·문용식(인천대)·이철성(건양대)·이상식(안양과학대)교수와 함께 숙식하며 공부하며 <대한계년사>의 번역을 마쳤다. 2004년 책이 발간되자 학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음지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낸 젊은 학자들의 열정에 박수가 쏟아졌다. 내친김에 국문번역을 전문으로 연구할 ‘한국고전문화연구원’도 설립했다. “번역서를 책 반 권 저술하는 것으로 쳐주던 시대에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던 것”에 대한 보상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인문학, 고문의 국문번역사업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그의 할 일도 많아졌다.

 <대한계년사>를 번역 중인 2002년 한국연구재단의 ‘여지도서 번역 및 색인’과제에 선정돼 2009년 50권의 <여지도서>가 출간됐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가 2004년에 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으로 ‘추안급국안 번역 및 역주’ 과제에 선정돼 기나긴 번역과 교정 작업 끝에 총 100권의 <추안급국안> 번역서가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또 2010년에는 한국고전문화연구원과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컨소시엄이 한국고전번역원의 호남권 거점연구소로 선정돼 향후 30년 동안 전북, 전남, 제주도의 조선시대 한문 문집을 번역하는 사업을 수행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에 있었다. <대한계년사>를 마치고 “너 쓰것다”는 소리를 들었고 <여지도서>를 마치고 “그만하면 됐다”는 칭찬을 받았다. 두 번의 칭찬은 스스로 나아갈 힘을 만들었다. 그리고 육여년 동안 아버지의 공부를 물려받으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의 생각이 틀렸음을, 그리고 그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그만의 방식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나도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지만 그런 내리사랑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떠난 지금, 빈자리가 더 커지는 것을 그는 매일 느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길을 다시 책으로 돌렸다. 그의 연구팀이 만들어낸 <여지도서>는 제처 두더라도 <추안급국안>의 내용은 달라는 사람으로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책이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궁금증이 더한다.

“추안급국안은 추안 및 국안, 추국에서 행해진 진술이 담긴 책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보안법, 반란사범 등이 주로 다뤄지는데, 무신난에 관련된 내용이 상당부분 차지합니다. 그중에서도 전라도와 관련된 내용이 20권 분량정도입니다.”

다른 반역사건과는 무신난은 달리 전국적이고 실패한 난이었던 탓에 지금껏 그 규모를 누구도 몰랐던 사건이었다. 그는 무신난을 권력에서 밀려난 북인, 남인, 소론이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 올인한 사건으로 본다. 그래서 무신난은 ‘대한민국 사극의 마지막 보고’라고 그는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추안급국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추안급국안>은 육하원칙에 의해 적혀 있다 보니 조선시대 생활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노비, 평민, 여자 이름까지 적힌 수천 건의 사건기록이 담겨 있다. 또 <추안급국안>은 중세국어사의 보고다. 속기를 하면서 한문과 국문을 혼용하기도 하고 이두식 표기하기도 해 중세 국어의 속살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 <추안급국안>이다.

기록에는 재미있는 사건들도 많다. 무시난으로 계엄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암행어사를 사칭하다 잡힌 사내가 있었다. 그는 “백성의 고충을 살피러 왔다”며 돈을 뜯어내기도 하고 양반집 딸이나 아전의 아내, 과부와 동침을 하는 조선의 카사노바였다. 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쪼개어 현감에게 복수하는 아전의 사건, 조선시대 궁녀들의 미팅 후 벌어진 살인사건, 죽은 부모 목을 잘라 돈을 요구하는 절두적 등 방대한 사건의 기록이 담겨있다.

“사건 기록이 수천 개에 목차만 몇 권이 될 판인데, 어떻게 하나만 골라서 이야기합니까? 조선시대 기록 중 가장 방대한 법제사, 제판기록이자 생활사, 국어사가 <추안급국안>입니다. 이 책의 폭발력은 저도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덧붙인다. “<추안급국안>의 판권을 서울에서 달라고 해요. 당연히 거절했어요. 짜고 친다는 소리를 다시 듣더라도 완판본의 고장 전주에서 이만한 책은 만들어야 되지 않겠어요? 디지털 자료를 달라고 해요. 그것도 거절했어요. 저와 함께한 지방의 학생들이 먼저 쓰게 할 생각이에요. 똑똑하지는 않아도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 학생들이 이 책을 다 쓰고 나면 그 때나 보라하세요!” 그가 한 일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누가 뭐라 할까.

30년 넘는 세월을 한 우물에 정성을 쏟은 그에게도 여전히 번역은 어렵다. ‘본뜻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번역작업은 마라톤과 같이 진득하게 해야 되고, 영화처럼 다양한 분야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IT처럼 위험도는 높은 것이 그가 생각하는 고전 번역이다. 한자 한 자를 잘못해석하면 다른 사람들까지 계속 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언제나 살얼음판이다. “OX퀴즈를 풀 듯 항상 맞는 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쉬운 언어로 풀어낼 수가 없죠. 또 국어와 한문의 미묘한 차이를 풀어내다보면 오역의 위험성은 높아집니다. 진퇴양난인 거죠. 그 의미를 궁리해서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그날, 그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의 문집을 번역하는 16개 거점연구소 중에서 그의 연구소가 최상위 점수를 얻은 것이다. 이로써 2년 연속 수위의 평가를 받았다. 일개 지방대가 어떻게 이런 큰 사업을 진행하느냐는 뒷소리도 쏙 들어갈 평가다.

“역사가와 문사가 만나야 해요. 국문학, 철학, 역사학이 서로 잘났다고 싸움할 게 아니라 서로 잘 맞물려야 해요. 저희 연구소는 고문서·초서, 기록학, 한문학, 철학, 역사를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요. 두고보세요, 한국고전학연구소와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이 쏟아내는 성과가 어마어마해질 것입니다.”

그와 거닐던 거리에 그의 머리칼처럼 하얀 눈이 내린다. 그를 아는 사람은 한량이라 이야기한다지만, 눈 맞으며 걷는 그에게서 선비의 냄새가 풍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처럼 옛이야기를 오랫동안 쏟아내길 기대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