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교동 향교에서 한벽극장 쪽으로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전주천 갈대밭이 훤하게 펼쳐진다. 조그마한 슈퍼와 식당, 오래된 한옥이 줄지어 있는 길을 따라가 마지막 골목 끝에 서면 임택준 작가의 한옥작업실, ‘꿈틀스튜디오’가 보인다. 입구엔 그가 만든 나무인형이 서 있고, 옆으로 빨간색 식탁과 의자가 손님을 기다리는 듯 놓여있다. 중앙엔 얇은 철판을 덧댄 벽이있어 무언가 싶었는데 다시 보니 문이다. 한옥의 철문은 낯설지만 나무와 철의 조화가 퍽 새롭다. 작업실 안은 나무로 만들지 않은 게 없고 철로 잇지 않은 것이 없다. 평면과 입체,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그의 예술세계처럼 작업실도 그를 똑 빼닮았다. 고구마장수들이 쓰는 철난로부터 나무인형과 조각, LP장에 빽빽한 음반들, 커다란 진공관 스피커까지. 신기한 것 물건 투성이다.찬찬히 공간을 살폈다. 작업실로 쓰는 거실과 뒷마당, 이불요가 깔린 작은방, 화장실까지 잘 갖춰져 있는 작업실. 주방대신 거실의 싱크대로 전주에 따로 집이 있지만 대부분 시간을작업실에서 보낸다는 작가는 독립된 공간이라야만 사유도 깊어지고 작품도 잘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이만한 작업실을갖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지나야 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삶은 방랑으로 점철돼있다. 여행도 꽤 다녔지만, 철새처럼 작업실도 많이 옮겼다.
고등학교 후반, 그림 그리는 친구들끼리 모여 전주의 한 상가건물이 생애 첫 작업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각자 없는 돈을 털어 집세를 내고 밤늦게까지 그림에 골몰하던 시절, 멋모르고 구한 작업실은 그에게 ‘공간과 예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 대학시절부터 작업실로 쓴 아파트 지하공간은 하수구관의 거대한 폭포소리로 매일 잠을 깨야했다.지하 작업실에서 7년을 지내니 지상으로 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어두운 시기였다. 그 후 군산, 전주를 거쳐 모악산의 숲속 초가집까지 진출(?)한 작가는 향교 앞 5평 남짓한 임시작업실을 끝으로 4년 전 이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비로소 완전한 작업실 하나를 가졌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10년은 늙는다”는 말을 실감했다는 작가는 2008년부터 2년간 붙박이로 공사현장 목수, 인부와 부대끼며 작업실을 짓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술 좋아하고 방량벽도 많은 그가 작업실 공사에 열중했던 까닭은 남의 셋방살이를 벗어나는 기쁨이 큰 탓이었다. 나무를 만지는 동안 고독도, 가난도 잊는 것 같았다는 작가는 완공 당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단다. 이후 작업실 생활은 작품과 내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아무래도 그 전엔 늘 방랑생활이다 보니 심리적으로 불안하잖아요. 우울하기도 하고. 그게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죠. 지금 좀 안정되어선지 이전 작품들과는 색깔 차이가 나요. 작업실 짓는 과정에서 시야가 더 넓어진 것도 있고, 다르게 사는 재미도 있고요.”집 한 채 만들고 나니 잘려나간 나무토막이 많아 아까워서 일제히 모았다는 그는 내친김에 나무로 작품을 만들었다. ‘즐겁게 만지다’보니 작품이 된 작품들. 2009년 11월엔 ‘똑딱나무-스물다섯개의 서랍에서 꺼낸 몽상’이라는 주제로 목각인형 35점을 전시한 개인전을 열었다. 단청과 안료를 버무려 덧칠하고, 몇 번이나 사포질을 해서 특히 손이 많이 간 작품들이라 애정도 컸다.
1989년 전북예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래 한번도 작품활동을 쉬어본 적이 없는 그는 지난해 10월 교동아트스튜디오에서 스물세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여기에 단체전까지 다 합하면 일년에 두 번 이상 새 작품을 내놓은 셈. 지난해엔 워싱턴에서 ‘호랑이’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전주한옥마을 꿈틀스튜디오에서 탄생한 작품이 미국 한복판까지 날아간 것이다. 그에게 작업실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야말로 꿈이 꿈틀대는 곳이죠. 이곳이 꿈의 ‘틀’이 돼주기도 하고요. 매일 산책도 가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작업실에 오면 마음이 숙연해져요. 숙연해야 외로워지거든요. 외로워야 사색도 하고 성찰도 하는 거고요. 작업실이 아무리 번화가에 있고 관광지에 있대도 독립된 공간으로서 소명을 다해줍니다. 이곳이 제게 주는 의미는 정착입니다. 다시, 외로운 정착인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