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 출신 바흐만 고바디의 <거북이도 난다>라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고통스럽다. 으스러진 다리, 죽을 때까지 쏟아지는 피, 벌어진 살 사이로 빠져나오는 내장. 카메라는 열 살도 안돼 보이는 어린 소녀가 강간당해 낳은 아이를 버리고 자살하는 장면까지 무표정하게 보여준다. 이쯤 되면 영화관을 뛰쳐나가고 싶다. 이들에게 ‘모성’이나 ‘어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너무나 끔찍해서 언어의 대상으로 삼기는커녕, 무의식에서조차 떠올리기 싫은 장면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확실히 고바디 감독은 관객을 괴롭히는 데 일가견이 있다. 팔과 다리를 잃은 채 지뢰밭을 헤매고 다니는 아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묻는다. “일상이 돼버린 폭력과, 이들의 고통 앞에서 당신은 온당합니까?”수전 손택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에서 이미지로서의 고통을 향유하는, 현대인의 냉소적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자극적인 고통을 문화상품으로 둔갑시키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비판하고 타인의 고통을 통해 특권적 위치를 향유하거나 값싼 동정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예술성, 종교성, 대중매체 등의 측면으로 나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전쟁을 낯선 이방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고 한다. 타인의 고통이 매체를 통해 소비될 때 그것의 실체를 직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혹자 중엔 고통을 인간 활동의 존재론적 원동력이라고말한다. 물론 인간의 생이란 쾌락과 고통의 부단한 변증법적 상호교환 작용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타인의 고통 밖에 있다는 안도감이, 비극을 즐기는 자의 쾌감과 다를바 없다는 점에서 고통에 대한 정의는 모순이다. 오히려 타인의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그런 조건부들을 변혁할 가능성에몰두해야 한다. 종교분쟁이나 민족감정에서 야기된 전쟁의 이면을 보면 경제적 격차와 이해관계의 차이에서 전쟁이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영토와 자원, 무역로 등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타인의 고통이 진화와 진보를 위한 역동성을 마련한다는 말은 궤변중의 궤변이다.
냉전 체제의 붕괴와 전지구화로 인해서 세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9.11테러 사건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게 된 빌미를 제공했다. 이를 헌팅턴(S.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로 설명하는 이도 있다. ‘국가’나 ‘민족’ 대신 그 범위를 확대하여 문명적 차이 특히 ‘종교적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물질적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점이 농후한데 ‘정신적 가치관’의 차이로 포장하면 전쟁과 폭력이 좀 더 그럴싸해지는 걸까?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학살이 자행됐던 ‘보스니아 내전’도 사실은 종교와 별로 상관이 없다. 개신교가 우세한 독일과 덴마크는 크로아티아계(가톨릭)을 지지하였고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는 세르비아계 (그리스 정교)를 지지했다. 따라서 지원 국가들의 종교적 성향이 특정 세력을 지원하는데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라크를 침공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부시정부는 두말할 것도 없다.수전 손택은 이점을 간과하지 않고 미국과 부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한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과격단체가 환호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이후에 인도에서는 힌두교 우익단체가 이슬람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민족과 종교라는 ‘정의’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나면 초강대국과 무력을 사용하는것은 소수의 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불시의 폭력은 부조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과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 사이에는 압도적인 힘의비대칭이 존재한다. 중동지역에 미국이 개입해 온 역사는 테러의 역사와 겹친다. 폭력은 정의라는 명분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수전 손택은 책을 통해 이러한 논리를 일관되게 펼쳐 보이고 있다. 특히 폭력과 살육이 자행되는 사진을 보여줌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훔쳐보는 ‘관음증’과 그것이 문화상품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따라서 ‘타인의 고통’을 읽다 미국의 유명 여류작가가 반미감정(?)을 드러내는 데만 흥미를 느낀다면 그것은‘타인의 고통’을 오독(誤讀)한 것이며 논점을 이탈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할리우드 전쟁영화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냉전시대가 배경인 할리우드 영화들은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점과 보는 이의 촉각을 곤두서게 만드는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관객을 흥분시킨다. 승리는 언제나 미군의 몫이고 공산국가는 여지없이 악의 축이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러시아마피아, 아랍권 테러집단, 북한 등이 ‘악의 축’이었다. 고백하건대 필자 또한 영화 속 ‘타인의 고통’을 즐기면서 죄책감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영화 속 전쟁은 활극의 무대였고 모험이었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여주지 않는 매혹, 폭력과 가학의 그로테스크한 쾌락을 맛본 셈이니 ‘진실의 실체에 가까이 가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미국은 절대 선이고 악의 무리로 읽혀지는 이들은 소수자란 것이다. 소수자들은 공동체의 질서 문란과 재앙에 책임져야 할 속죄양으로 선택되어 폭력의 대상이 된다. 그런 일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들을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하고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그것을 방관하면서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취해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기왕 영화로 말문을 열었으니 고바디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취한 말들의 시간>를 소개하고 끝을 맺어야겠다. 이란과 이라크의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란의 국경 마을, 12살 소년가장 아윱의 이야기다. 지뢰로 보모를 잃고 부양해야 할 형제들, 병든 동생, 팔려간 누이, 목숨 걸고 넘어야 하는 국경,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게 하기 위해 술을 먹여 비틀거리는 노새 등이 화면 전체를 채운다. 보는 내내 훌쩍이는 관객도 있고 허구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이도 있고, 너무도 끔찍한 실상에 신을 원망하는 관객도 생길 것이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연대의 손을 뻗지 않고 안락한 좌석에서 그들의 고통을 향유하는 최종 소비자일 뿐이다. 당신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