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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고 싶다
시 쓰는 농부 김유석
황재근 기자(2013-04-05 11:57:32)

광활한 김제들에 물을 대던 벽골제, 그 인근에 그의 터전이 있다. 이정표 삼을 지형지물이 없는 광활한 평야에서 그의 집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을 지나치고서야, 마중 나와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유석 시인은 1989년 전북일보,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그리고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에서 당선작을 내며 다시 한 번 신춘문예와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남들은 한 번도 힘든 신춘문예에 세 번이나 당선됐지만, 그는 자신의 직업을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농사꾼이 그의 본업이다. 등단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출판한 시집은 단 한 권뿐이다. 이 독특한 이력의 시 쓰는 농부에게, 삶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린 시절, 학교는 4km를 홀로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드넓은 들판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원평천, 그리고 수많은 생명들이 있는 등학교길은 그의 시적 감수성을 키우는 또 다른 학교였다. 본격적으로 문학을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무렵. 서예로 단련한 글씨가 국어선생님의 눈에 들어 필경사 노릇을 하게 되면서였다. 수업교재를 만들며 늦은 시간까지 국어선생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더구나 아리따운 처녀 선생님이었으니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달콤했을까.익산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이후에는 학업보다는무작정 읽고 쓰는 일에 재미가 들려있었다. 당시‘좀 노는’ 학생이었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시보다 소설이었다. 학교 앞 책대여점에서 통속소설을 빌려읽고 수업시간에 습작을 끼적이던 것이 그의 유희였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최인호의 작품을모두 탐독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애정소설 김말봉의 『찔레꽃』도 당시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이었다. 그의 친구가 그에게 ‘흐르는 돌’이라는 뜻의 ‘유석’이란 필명을 붙여준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 썼던 단편 제목이 ‘횃불’이었는데, 새경을 받고 평야로 일하러 온 머슴과 동네 처녀의 연애이야기였어요. 그 때 우리 동네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소설로 쓴 거지요. 한번은 친구가 국어 수업시간에 그걸 몰래 읽다가 ‘킥킥’ 소리 내서 웃는 바람에 선생님한테 걸렸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나중에 장편소설 『갯들』을 쓰시는 임영춘 선생님이세요. 선생님이 그 소설을 들여다보시더니 ‘허허’ 웃으시면서 ‘글은 나중에 쓰고 지금은 공부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좀 노는’ 학생, 글로 시대와 부딪치다
하지만 이미 학업에서 떠난 마음을 붙잡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수학·과학에 자질이 있는 편이라 점수에 맞춰 전북대 문리대에 물리학 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하마터면 대학에 못 갈 뻔 했지요. 아버지는 전북대 이하로는 입학시키시지 않으실 생각이셨거든요.”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도 전공과목을 공부할 틈이 없었다. 한국사회와 대학 모두 크게 요동쳤던 시기, 1980년대. 빨간 셔츠와 백구두, 오토바이를 탄 여전히 ‘좀 노는’ 학생이었던 그는 현실에 맞서고 깨지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가 시대와 부딪치기 위해 선택한 무기는 바로 글이었다. 대학신문 신입생문예로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달하 시문학동인’을 만들어 문학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2학년 때는 대학신문사 기자가 되어 검열당국과 정면으로 맞섰다. 하지만 3학년 때 결국 필화사건으로 징계를 받고 동기 편집장과 대학신문사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한동안 순경들이 쫓아다니기도 했었죠. 그때 한창 학교 앞에 다방들이 생겨날 때였어요. 정학 맞아서 갈 데도 없고. 토요일 다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 아지트였어요. 문학하는 친구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는 문학한다고 하면 여학생들도 많이 따르고 그랬지요.” 대학신문사에서 나온 이후에는 ‘달하 시문학동인’ 활동에 힘을 쏟았다. 시내 다방에서 시화전도 열었다. “내가 그림에도 잠시 손댄 적이 있어서 목탄이나 콩테로 소묘를 그리고 시를 적어서 액자로 만들면 그럴듯했어요. 그걸 갖고 시내에 루브르 다방, 아트 다방 이런데서 전시를 했어요.”그는 그 시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20세기 초반에 파리가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시기를 ‘벨에포크’라고 합니다. 그 시기에 문화예술이 번창하고 파리가 그 중심지로 자리 잡지요. 생각해보면 20대 중반까지 몇 년간이 제‘벨에포크’였던 것 같아요. 가장 암울했던 시기이면서도, 자유로웠고, 맘껏 방황했던 때였죠. 지금도 그 시절 기억들이 칙칙하게 저를 따라 다닙니다.”

다시 현실로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는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원래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역마살이 끼어서. 기자를 하려면 서울 가서 하고 싶었는데 지방대에서는 한계가 있었죠, 귀동냥으로 들은 게, 필력이 있어서 등단을 하면 기자가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래서 글을 열심히 썼죠. 정학을 당하고 나서도 일어공부도 독학으로 하고 했는데, 워낙 놀기를 좋아하다보니 열심히 하질 않았어요.” 멀어진 기자의 꿈 대신에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전주 시내에서 다방을 열었다. ‘행복다방’이라 이름붙인 그의 가게는 큰 탈 없이 괜찮은 수입을 안겨줬다. 뜻 맞는 친구들에게 아지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주위의 조언에 따라 다른 사업을 벌일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인생에 또 한 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나는 큰 아들이고, 여동생은 중학생, 남동생 하나는 고등학생, 또 하나는 대학생이었죠. 내가 장남으로서 집안을 책임져야할 상황이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다방을 4년여 만에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죠.”당시 제법 큰 규모로 농사를 짓던 그의 아버지는 이미 70년대 말에 기계영농장비를 갖춰 놓고 있었다. 덕분에 틈틈이 고향에서 아버지 일손을 돕던 그는 어렵지 않게 다시 농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기니 놓고 있던 글에 다시 손이 갔다. “다방을 하면서도 틈틈이 습작을 끼적이긴 했지만, 친구들이 찾아오면 술 마시러 나가기 바빴는데 제대로 됐을 리가 없지요. 고향에 돌아와서 기계로 농사를 짓다보니 남들보다 편하게 농사를 지었어요. 누구 건드는 사람도 없고. 그때 제대로 맘을 먹고 시를 써봤죠.” 팍팍한 농촌의 현실은 그의 소재가 됐다. 풍요의 상징이었던 김제들녘엔 한숨이 가득하고, 마을공동체는 해체됐다. 그는 기독농민회를 통해 농민운동을 하며 그 실상을 지켜보고 작품에 담았다.

‘어라, 이것 봐라?’
‘어디 신춘문예라도 내봐야 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던 무렵, 마을 이장 집에서 본 신문에서 신춘문예 공고가 눈에 띄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바로 작품을 보냈다. 1989년, 그는 전북일보 신춘문예에서 ‘겨울 들판에서’라는 시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 이번에도 이장댁에서 서울신문 신춘문예 공고를 보고 ‘신월기계화단지’라는 작품을 제출해 덜컥 당선되고 말았다. 수차례 떨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한번에, 그것도 2년 연속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됐으니 운이라 둘러댈 수도 없는 실력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한 생각으로 작품을 보냈죠. 그런데 당선이 되더라고. ‘어라 이것 봐라’하고 이듬해 다시 도전해본 거죠. 그랬더니 덜컥 또 당선이 됐어. 아무래도 고향에서 마음도 편하고 시간여유도 있고 해서 됐던 것 같아요. 남들에 비하면 정말 쉽게 쉽게 등단한거지요.”하지만 그 후로 10년 이상 그의 이름을 문단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동료 작가들과의 교류도 뜸해졌다. “사실 등단하고 일년 반 정도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바빴어요. 서울 가서 문인들도 만나고 TV 출연도 하고. 내가 원래 글 쓰는 일,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내가 직접 문단에 들어가게 되니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글만 열심히 써도 부족할 판인데, 엄한 짓들을 많이들 하더라고. 그래서 에이, 나랑 안 맞는 구나 하고 아예 생각을 접어버렸지.”대신 그는 자연을 벗 삼아 마음껏 쏘다녔다. 호남일대의 저수지란 저수지는 모두 섭렵했다 할 정도로 낚시에도 빠져봤고, 농한기에는 엽총을 들고 꿩 사냥도 해봤다. 본업인 농사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런데 참 이상하지. 뭘 쓸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보면 또 뭘 끼적이고 있더라요. 글 쓸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자꾸 메모도 해놓고. 그래서 아, 천성이 그쪽으로 뭐가 주어졌는 갑다 하고 조금씩 시를 써뒀지요.”

김제우렁이, 침묵을 깨다
그가 오랜 침묵을 깬 것은 2005년이었다. 학교 후배이자 소설가인 김병용 씨가 그를 찾아와 시집을 출판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사실 책 낼 생각도 없었거든. 그런데 병용이는 내가 안타까웠던 것 같아요. 작품을 주면 출판할 곳을 알아보겠다 하길래, 그 친구한테 맡겼죠.” 우여곡절 끝에 그간 틈틈이 써왔던 작품들이 시집 『상처에 대하여』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이후 시집출간으로 인연을 맺은 《현대시》 등을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전에는 도통 김제에서 나오질 않는다고 김제우렁이라는 별명도 얻었는데, 요즘은 그때 비하면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죠. 서울에도 1년에 한 번씩은 올라가고. 전북작가회의 모임에도 1년에 한 번씩은 얼굴을 비추려고 하고 있어요. 제 시가 대중성이 있거나 잘 쓴 시가 아닌데, 그래도 서울 쪽에서는 종종 이야기 거리가 된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여기저기서 청탁이 들어와서 작품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가 쓰는 시들은 한 사람이 썼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다른 색을 띄기도 한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즐겨 읽었던 시가 1930~40년대 모더니즘 시에요. 김광균의 ‘추일서정’이나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같은 시죠. 오늘날 말하는 모더니즘과는 조금 다른데, 일종의 회화주의라고 볼 수 있어요. 보여주듯이 쓰는 거죠. 그런 시들을 주로 읽다보니 제 시풍도 그쪽에 영향을 받아 닮아있어요. 대학시절에는 언론활동을 하고 사회참여를 하면서 리얼리즘에 심취하기도 했구요. 제 나름대로는 그 둘을 섞어 쓰려고 하는데 아직 완전히 접목시키지 못하고 양쪽을 다 쓰고 있죠.”

인간이기에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인간의 정신, 그 중에서도 부조리다. 인간은 누구나 부조리를 안고 살고, 또 그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하나를 깨트린다 해도 또 다시 새로운 부조리가 기다린다. 그는 주변의 자연에 빗대어 그런 인간의 모순을 비꼰다. 소, 닭, 두꺼비, 호박넝쿨 등 자연물이 소재가 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다. 비꼰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모순, 그리고 실패할지언정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부딪치고 깨어지는 과정에 애정을 갖고 있다.“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가 신에게 대항하잖아요. 우리같으면 ‘나 안해’하고 대들겠죠. 그런데 그건 오히려 지는거예요. 신이 하라는 대로 끝끝내 하는 것이 진짜 반항이죠. 돌을 굴려 언덕으로 올라가도 다시 굴러 떨어지잖아요. 그걸 알아도 계속 반복하는 게 우리 인생이죠.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보면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요. 오히려 도피나 막연한 희망은 죽음과 같다는 거죠. 모순인 줄 알면서도 그걸 끝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까뮈가 말하는 실존주의고, 제가 주목하는 주제도 그 부분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이 그가 움켜쥐고 있는 주제라면, 그가 발 딛고 있는 기반은 자연과 농촌이다. 이슬비가 내린 보리밭, 옥수수를 얽은 호박넝쿨, 거미줄을 달고 대롱대롱 매달린 거미, 일상 속에서 관찰한 풍경들이 시적 상상력을 더해 작품으로 탄생한다. “인간의 부조리를 다룬 시들이 모더니즘적 영향을 받았다면, 내가 쓰는 생명시, 농촌시들은 리얼리즘적 요소를 갖고 있어요. 내가 천착하는 주제를 담기엔 애매하지만, 짧게 소품처럼 그런 시들도 쓰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두 종류의 시를 같이 붙여놓으면 서로 이질적이라 읽는 분들은 이게 뭔가 싶기도 할 거예요.”

동시, 다시 만나게 된 아이들의 언어
그가 20여년 만에 다시 신춘문예 동시부문에 도전한 것도 사실은 그 이유 때문이다. “안도현 시인과 유강희 시인이 펴낸 동시집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쓰는 생명시들이 동시와 유사한 점이 많구나. 농촌에 있다 보면 그런 소재들은 무궁무진하거든요. 나중에 시로 쓰려고 메모를 해둔 것도 굉장히 많았고. 그래서 한번 써보자 맘먹었죠. 재작년 겨울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서 금세 수십편을 썼습니다. 이전부터 오랫동안 해왔던 작업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어요.” 처음 동시를 쓰면서 만난 가장 큰 난제는 아이들의 언어를 찾는 것이었다.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과 아들들이 어린 시절 썼던 일기장을 바탕으로 시어를 다듬었다.“사실 내 시가 건조하거든요. 별로 따뜻한 느낌도 없고. 근데 동시는 짧고 명징하잖아요. 단일구성이고, 별로 심각하지 않아도 되고. 동시를 쓰면서 참 기분이 좋았어요. 성인시는 쓰고 나서도 찜찜한데, 동시는 쓰고 나면 참 개운하더라고요. 왜 이걸 진작 몰랐던고 싶더군요.” 그 중 몇 편을 골라 다듬어서 지난 겨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고 그중 ‘아빠의 공책’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사실 굳이 동시로 다시 등단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래도 유명작가도 아닌 내가 작품을 알릴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의 동시는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는 자신의 동시가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고, 함께 그 감상을 공유하는 시가 되길 원한다. “사실 아이들 혼자 동시를 읽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 어른들도 함께 읽고, 내가 그 시를 쓰면서 그랬듯, 치유 받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진짜 시인이 되기 위하여
올해는 아마도 그가 등단한 이래 가장 바쁜 해가 될 것 같다. 먼저 2005년 이후로 8년이나 미뤄놓았던 시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오랫동안 미뤄놨지만 올해는 꼭 내야겠다 맘을 먹고 서두르는 중이다. 첫 동시집을 위한 준비도 함께하고 있다. 이미 40~50편의 작품을 써둔 상태다. 김제지역의 아마추어 동인 ‘시야’의 활동을 이끄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본업이 농사꾼이라, 본격적인 농번기가 돌아오기 전에 어느 정도 정리를 해놔야 해요. 요즘 한창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조금 더 멀게 계획하고 있는 일도 있다. 전북지역에서 순수문예지를 창간하는 것. 지역문단에 기여하고픈 마음이기도 하고, 언론과 문학에 뜻을 뒀던 젊은 날의 꿈을 이루는 일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진짜 시인이에요. 사실 시도 정신력으로 쓰는 것이라, 나이를 먹으면서 총기를 잃고 기억력도 흐려지면 잘 안 써지거든요. 그게 겁나기도 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주제에 끝까지 천착해서 시간이 갈수록 더 좋은 시를 내놓고 싶습니다. 표현은 완곡해지고 내용은 부드러워지더라도 그 주제의식은 꼿꼿하게 살아있는 시를요.” 그가 인생의 가을에 거둘 풍요로운 수확을 함께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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