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발전한다”는 말을 예증하듯이 5·18은 엄청난 상처였으나 마침내 민주주의의 승리로 이어졌다. 12·12와 5·17 쿠테타에 이어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 세력이 민족과 민주주의에 준거한 역사적 단죄를 피할 수 없었음이 그것이다. 이른바 전직 두 대통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세기적 재판’을 받기 위해 ‘나란히’ 법정에 서야했다. 1996년, 대법원은 피고들을 판결하면서 “우리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고 명백히 선언을 했다. 돌이켜 보면 이렇다. 계엄군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밀어닥친다. 1980년 5월 13일 밤. 이미 상무대 31사단 병력을 투입시킨 신군부는 18일, 전북 금마에 주둔한 특전사 7여단(7공수) 686명 병력을 전남대와 조선대 교정부터 쏟아 붓는다. 전쟁터도 아닌 평화스러운 광주에서 박달나무 곤봉과 총칼로 충정작전-‘화려한 휴가’를 개시한 것이다. 5월 18일 경우, 오후에 병력 258명을 추가 투입한 특전사 11여단(11공수)은 19일 자정께 1천1백46명을 광주에 증파한다. 20일 새벽엔 역시 특전사 제3여단(3공수) 병력을 증파, 총 3천4백5명의 병력을 진주시킨다. 여기에다 서울을 지켜야 하는 20사단 병력들이 임무지 성역을 이탈, 열차와 군용비행기로 광주에 공수된다. 병력 현황은 장교 284명, 사병 4482명으로 총 4766명이란 어마어마한 숫자다. 물론 이 군인들 또한 완전 무장을 갖춘 최정예 부대다. 결국 7·11·3공수의 부대원 8171명과 20사단 병력 4766명이 추가된 12937명의 병력, 그리고 광주 주둔 31향토사단 병력에다 경찰 10개 중대 병력 1925명까지 합한다면 2만여 명의 병력이 10일 동안 광주현장에 투입된 셈이다. 당시 80만 광주 인구 40명 당 한 명 꼴로 완전 무장한 전투 병력이 달라붙은 것이다. 5·18희생자는 이렇다. 정부가 인정·집계발표(2001.12.18)한 5·18 당시 사망자는 민간인 16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총 195명이다. 총상 및 칼로 자상, 구타·고문 등으로 신체적 피해를 입은 부상자는 모두 4,782명이다. 피해 가족들이 신청한 행방불명자(행불자) 406명이었으나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는 70명뿐이었다. 피해 가족들과 정부의 조사가 많은 차이를 보인 것이다.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가버린 광주여 /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필자 시에서)
1980년 5월 이후 계속되어온 ‘오월싸움’은 어김없이 모든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 먼저 5·18은 시인 김정환이 노래했듯이 “끝까지 우리들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던” 나눔과 베풂의 문화를 창출한 공동선(共同善)의 전범을 보여준다. 계엄군이 투입된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시민들끼리는 살인·강도·절도사건 하나 없이 모두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운명공동체를 아름답게 재현했는데 그것이 이후 한국사회 시민운동의 도덕적 모델이 된다. 둘째로 분단국가에서는 여차하면 군부세력이 출몰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5·18의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시민대중은 국토와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외세에 의존하는 단순한 환상에서 벗어나 ‘주권국가’에로의 의지가 확실한 목소리로 표출되었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서로 다른 성격의 부문운동이 종국엔 하나로 만나는 연대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불교·천주교·개신교 경우 각 종파를 초월하여 ‘함께 하는 나라사랑운동’이 우선 큰 족적을 남긴다. 두레공동체의 재현이 바로 그것일 터이다. 따라서 그렇다. 이 땅의 민주주의운동과 통일운동에 온몸을 바친 젊은 영혼들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잊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라는 경구가 말해주고 있듯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라도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사람들은 그들이었고 우리였으니 말이다. 5·18의 연장선상에서 촉발된 1987년 ‘6월항쟁’을 통하여 국민들의 결집된 역량이 마침내 나라발전에 커다란 활력소를 불어 넣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해마다 오월 그날이 오면 노래처럼 입술에 올리고 싶은 슬로건이 있다. <오월에서 민주주의로! 오월에서 통일로!>가 궁극의 그것이다. 결국 이 말에서 찾아지는 5·18의 진정한 의미는 갈라짐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됨’ 속에서만이 완성될 수 있다는 얘기다. “서로 손잡고 서로를 위로하며 정의와 생명을 만들어나가는” 그것이 오월정신이기 때문이다. 아, 우리들의 그리운 산천에는 지금 오동나무마다 보랏빛 오동꽃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