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3.5 | 특집 [연중기획]
도민이 함께 숨 쉬던 추억의 그 곳
공간 - 전주종합경기장 1
이세영 편집팀장(2013-05-02 16:00:25)

1980년에 열린 제61회 전국체육대회는 전주의 모습을 꽤 많이 변화시켰다. 6개월여 만에 전주를 가로지르는 동서로 남북로가 생긴 것도, 현재 모습의 전주종합경기장도 이 때 지어졌다.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카드섹션에 동원되는 것은 물론이고 관제 궐기대회나 시위를 할라치면 전주종합경기장은 언제나 그 시작이고 끝이 되는 장소가 됐다.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중년들이 추억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전주종합경기장. 그 공간의 과거를 살펴보고 사라질지 모를 전주종합경기장의 추억을 더듬어 봤다.

도민성금으로 지어진 전주종합경기장
전주의 종합경기장 역사는 덕진에 세워진 전주종합경기장보다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덕진공원 주변에 처음 만들어졌다. 덕진운동장에는 야구장, 육상경기장, 정구장 등의 운동시설이 세워졌다. 전북체육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실록 전북체육사』에는 “덕진운동장은 덕진공원 개발과 더불어 조성되어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덕진운동장은 1920년대 초 당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던 자전거 경기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전주 이동면 검암리 덕진지 일대 잡종지에 설치된 간이 자전거 경기장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덕진운동장은 1949년 전북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중노송동으로 옮겨진다. 인봉리 공설운동장은 노송들과 계곡물이 여름 피서객을 불러 모았던 중노송동 인봉리 방죽을 메워 만들었다. (사)체육발전연구원 이인철 원장은 “처음으로 풍남제가 열린 장소도 인봉리 공설운동장”이라며 “전국적인 스포츠행사를 치르는 장소인 동시에 신탁통치 반대운동, 학도호국단 등 전주시민이 한꺼번에 모이는 장소로 애용했다”고 인봉리 공설경기장을 기억했다.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전주종합경기장은 다시 덕진으로 이전한다. 1억여원을 들여 당시 서울 운동장의 3배에 달하는 규모인 육상경기장이 중심이 됐다. 그 주변으로 야구장, 농구장, 정구장이 들어서고 이때부터 ‘덕진원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건축비의 일부를 도민이 성금을 모아 보탰다. 삼양사 김연수 회장도 당시 많은 기부금을 내 정문인 수당문에 직접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이 현판은 김연수의 친일행적으로 2005년 전주시 친일잔재 청산 과정에서 철거됐다.) 성금에 참여한 도민들은 ‘찬조 배지’를 하나씩 받았고 전국체육대회에 입장할 수 있었다. 전국체육대회 당일 새벽 4시부터 ‘찬조 배지’를 찬 도민이 몰려들어 사고가 날 정도로 많은 도민이 성금에 참여했다. 이날 경향신문은 “문을 열기도 전에 정문을 비롯한 4개의 출입구는 인파로 혼잡을 이루었는데 5시경부터 문이 열리고 찬조 「배지」를 단 사람들만 입장시켰”으며 몰려든 인파로 문이 떨어지는 바람에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전주종합경기장은 이때부터 전주의 대규모 궐기대회, 규탄대회를 시작하는 모임의 장소이자 전주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이 원장은“그 당시는 스포츠가 문화의 전부였는데 전북도민이 하나되는 계기가 전주종합경기장과 전국체육대회였다”며 “모금도 민박도 전 도민이 힘을 합해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문화·체육의 산실… 만남의 광장이 되다
전주종합경기장의 모습은 80년 또 한 번 변한다. 현재 모습의 전주종합경기장은 제61회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전주종합경기장의 건설은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전라북도가 발간한 『제61회 전국체육대회 백서』에는 “전문가의 견해를 들어 4~5개의 계획안을 마련해 놓고도 결정을 못내렸”다고 적고 있다. 결국 1979년 10월 23일 기존의 경기장 전체를 해체하고 첫 삽을 뜬다. 연인원 15만명, 시멘트 5만5천포대, 철근 1천700톤이 들어간 전주종합경기장은 1년만에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진다. 이때 야구장과 정구장의 개축, 수영장의 완공이 함께 이뤄졌다. 육상경기장은 기와장식을 한 전통양식이 더해진 정문으로 30년이 흐른 지금도 경기장의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미와 웅장함을 간직하고 있다. 프로 스포츠의 막이 열리자 전주종합경기장은 더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89년 프로축구 개막전에는 이틀연속 2만이 넘는 관중이 몰려 전북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 창단에 힘을 실어줬다. 1994년 전북버팔로나 현재 전북현대모터스의 옛 이름인 전북다이노스의 경기가 있는 날은 경기장 부근이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다. 1996~97년은 전주야구장의 최고 전성기이자 최후의 전성기였다. 만년 꼴찌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의 활약으로 야구장은 연일 만원이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응원하는 시민들과 몰래 들여온 술을 마시며 경기를 관람하는 풍경이 연출되고, 낮은 담을 타고 들어오거나 돈을 내지 않기 위해 5회를 넘기고 경기장을 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전주종합경기장은 전북 체육사에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뜨거웠던 민주화의 열기는 전북대를 시작으로 전주종합경기장을 지나 오거리에 이르는 길을 이었다. 그런가하면 시립극단, 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과 풍남제전위원회, 한지축제조직위, 전주시예총 등의 문화단체들의 사무실이 자리잡으며 문화예술인들과 체육인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또 전주종합경기장은 만남의 광장이기도 했다. 경기장 앞의 넓은 도로와 주차장은 관광버스의 출발지였고 전주에서 출발하는 여행객이 함께 모이는 곳이었다. 답사여행이 붐을 이루던 그때부터 현재까지 ‘전주종합경기장 앞 출발’은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우리 모두에게 경기장은 추억이다
하지만 프로야구단도 떠나고 축구경기도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오늘의 전주종합경기장은 스산했다. 육상경기장은 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몇몇 보였지만 텅 빈 관중석으로 더욱 휑해 보였고 군데군데 금이 가고 잡초가 자란 야구장은 전라중학교 야구단이 연습을 하고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운동을 하는 한 시민은 “경기를 안 한지 꽤 오래되더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경기장이 텅 비었다”고 전주종합경기장의 오늘을 전해줬다. 최근에는 찾는 사람들도 줄고 사무실도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있다고 했다. 대형 컨벤션센터가 들어선다는 전주시의 계획 때문이다. 전주시와 개발사업자로 선정된 롯데쇼핑은 이곳을 호텔, 백화점, 쇼핑몰, 영화관 등이 결합된 복합 컨벤션센터로 개발할 계획이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소상공인들은 롯데쇼핑 입점저지 및 지역경제 살리기 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전주시의 계획을 반대하고 있어 찬반양론이 거세게 불어 닥칠 전망이다. 이 원장은 “문전옥답은 파는 것이 아닌데 전주의 문전옥답을 부당하게 판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큰 나무 밑에 작은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이치를 깨닫는다면 이곳에 컨벤션센터가 들어서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주종합경기장은 시민이 함께 만들고 함께 참여하던 공간이었다. 시민의 성금을 모아 지었던 건물을 헐고 시민이 반대하는 컨벤션센터를 짓는 것은 전주시민이 전주종합경기장에 가지는 추억을 빼앗는 격일 것이다. 한 시의원이 제안한 ‘전주 시민의 숲’은 아닐지라도 지역의 역사성을 살리고 전주의 이미지에 적합한 곳으로 남아 오랫동안 추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