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 |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
국민들의 애국심과 청와대의 칼국수
윤덕향 발행인(2003-09-09 09:24:33)
드디어 쌀 시장이 개방되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는 쌀 시장이 개방되고 이를 계기로 개각이 단행되었다. 모두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지만 개방논자들의 어깨가 한껏 올라갈 법도 하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개방을 막겠다던 정부의 의지는 쌀개방이후 농촌과 농민을 살리는 대책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는 척한다. 그동안 역대 정권이 한 말대로라면 이제 더 이상 농촌을 장 살게 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 법도 하건만 또다시 농촌과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신문마다 각종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잇다. 다시 돌아보기도 싫은 일이지만 앞으로 정부의 의지가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서 쌀개방을 전후한 시기의 형편을 간단히 살펴볼 일이다.
쌀개방 개방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직전 무렵 우리나라 대통령께서는 미국에 가서 각국 정상들과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셨다. 국내 언론들에 의하면 당시 각국 정상들의 회담에서 우리 대통령께서는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셨다고 한다. 귀국하신 다음 말씀이 국제화와 개방화, 세계화였다. 그런 한편 쌀문제는 전혀 논의 된 바가 없다고 한다. 쌀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회담을 마친 다음 귀국일성(歸國一聲)도 의심쩍지 않을 수 없지만 솔직한 것이 장점의 하나이며 대도무문의 자세로 살아오신 대통령의 말이니 그런가 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저 각종 정상회담을 주도하신 대통령이니 우리 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쌀문제를 거론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셨더라면 좋았었겠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이도 집권 여당의 대표 말씀마따나 참새가 어찌 대붕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있겠는가?
쌀 시장 개방이 정해지고 난 다음 개방 조건을 두고 협상이 벌어질 때 대통령께서 미국 대통령인 클린턴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유리해졌다는 보도도 있다. 참으로 세계적인 지도자를 둔 우리 민족의 흥복이 아닐 수 없다. 밤낮 없이 지상낙원을 외쳐대는 북한이나 어느 미개발국가의 독재자들처럼 국민을 속일 리 없는 정직한 대통령이니 전화 한통화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특혜에 가까운 양보를 얻어냈다니 이런 지도자가 세상천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생각할수록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영악스럽기 그지없다는 미국의 국회의원들이 전화 한 통화를 받고 우리나라에 특혜에 가까운 개방조건을 허용한 대통령을 얼마나 다그칠까 하는 것이다. 우리 대통령이 계시니 그것도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닐 성싶다.
어쨌든 시장이 개방되었고 다른 분야에서의 양보가 전혀 없이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쌀 문제가 타결되었다고 한다. 쌀시장 개방에 대통령직을 걸겠다는 공약은 대국민 사과문, 그리고 개각과 집권여장의 당직개편, 청와대 비서진의 개편이라는 정해진 수순으로 가름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쌀시장 개방이라는 현실을 수습하는 것이 중요하지 과거사를 따지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논리로 농민단체를 비롯한 쌀시장 개방 반대론자들의 입을 막으려 든다. 당연히 예견되는 일이지만 농민이나 농촌을 살리는 근본적이 대책보다는 농민과 농촌 주민들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한 각종 당근을 이곳 저곳에서 다투어 내놓고 있다. 말대로라면 우리 농촌과 농민은 단군임금이 개국한 이래 최대의 특혜와 번영을 누리게 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한숨 속에 긴긴 동지밤을 잠못들어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 위대한 지도자와 유례 없는 농천, 농민위주의 정책이 펼쳐지려는 판에 도대체 이 무슨 한숨이란 말인가?
쌀시장 개방문제만 나오면 공자가 주문왕 울먹이듯 으레 일본이 뒤따른다. 마치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니면 다른 나라들이 일본보다 우리나를 특히 귀여워하거나 우리 지도자가 일본의 지도자보다 위대하여, 또는 우리의 협상단이 일본의 협상단보다 특별히 우수하여 보다 좋은 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교하여 말하려 한다. 그 같은 비교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일본과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돌아볼 일이다. 경제력의 비교가 아니다. UR 협상에 의하여 쌀시장 개방이 예견된 것은 7년전이다. 그동안 쌀시장 개방을 반대한 점은 같지만 일본의 경우 개방에 대비하여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고 대책을 연구하였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지난 5공, 6공은 정통성이 결여된 쿠테타적 정권이라서 그렇다 치고 문민정부를 자처하는 현 정부에서는 지난 10개월 동안 무엇을 했는가? 더구나 쌀시장 개방문제는 이제는 빌 공(空)자 공약이 되어 버렸지만 대통령직을 건다는 것이었음에도 어떤 대책을 세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당국이 홍보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외국정상들과의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대통령께서 쌀문제를 논의조차 하지 않으셨다니 어떻게 쌀시장 개방을 막으려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쌀시장 개방과 관련하여 대통령께서 제시하신 방안중 외국에서 수입되는 쌀을 모두 국가, 또는 농협과 같은 기관에서 사들여 가공식품으로 만듦으로써 농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 있었다. 참으로 기발하고 참신하기 이를 데 없는 정책제시인 것처럼 보인다.
문제의 본질이 외국산 쌀이 우리네 밥상 위에 밥으로 되어 올라오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보다 쌀이 문제이니 차라리 밥을 먹지말고 밀가루로 만든 빵이나 칼국수를 먹는 것으로 국민들의 식생활을 바꾸는 운동을 벌이는 방안도 모색될 법하다. 근검절약의 전형으로 칼국수를 드신다는 것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청와대에서 내 고장 쌀사주기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쌀농사에서 얻어지는 농가 소득이 외국산 쌀의 수입으로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농민들도 안다. 보다 심각한 걱정은 칼국수를 만드는 밀가루의 재료인 밀농사가 이 땅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것처럼 벼농사도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쌀을 수출하는 미국이나 외국에 보다 더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중 하나인 것이다.
양담배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이런저런 대책이란 것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다음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은 또다시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쌀시장 개방을 전후하여 신토불이를 목청껏 외쳐되는 지금 청와대 칼국수는 우리 땅에서 재배한 밀로 만들어졌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