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 | [문화칼럼]
다시 쌀의 수난, 상상하기 두려운 텅빈마을
이병훈 시인(2003-09-09 09:25:41)
쌀 지천꾸러기가 됐다. 농사.'천하지대본'인 농사가 한번도 귀빈대접을 받지 못했으면서 지금 참으로 귀찮은 문제로 오늘의 우리가 헛간에 밀려 버렸다. 나는 최근에 「잔재」란 시를 썼다.
갈무리가 끝난 들에
짚단들이 흙을 딛고 서 있다
쓸쓸하다
그것은 한해 농사를 마친 사람들의
잔재다
이어 무서리가 내리고
눈보라치는 겨울
짚단들은 겨울을 뒤짚어 쓰고 서 있다
언 흙 언 물을 딛고 서 있다
한해 농사를 시작할 사람들의 잔재다
(시 「잔재」전문)
농사는 한때 절대 생활수단이었다가 지금은 기초 생활수단이다. 끝까지 기초 생활수단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일이다. 쌀은 절대 능력이었다. 목숨이었고 신앙이었다. 쌀이 없으면 아무리 살아 남으려 해도 살아남을 수 없었고 쌀이 없으면 귀신을 감동시킬 수가 없었다.
수난은 많았다. 우리의 수난의 역사는 민족이나 영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생산하는 쌀 그 능력이었다. 쌀은 우리가 갈고 지켜온 가장 비싼 민족의 산물인 것은 스스로 뿐 아니라 밖에서 먼저 탐냈던 것으로 보아 충분하게 인정이 된다.
쌀은 오래 전부터 우리의 목숨을 살려온 절대 양식이었고 고등 식품이었다.
93년 한해가 저물어 갈 무렵 쌀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수난이 닥쳤다. 이번은 빼앗아가려는 자들로부터 받는 수난이 아니라 밀고 들어와 퍼먹일려는 자들로부터 받는 수난이다. '농자 천하지 대본'의 깃발은 이미 풀이 죽어 그 거센 바람에도 아예 나부끼지를 않는다. 농자는 천덕꾸러기로 갑자기 전락했는데도 묘안이 없다는 미봉책만 '신문'에 '텔레비젼'에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결정적으로 심도있고 실질적으로 살려내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잔재」란 시를 쓰면서 들에 남아 있는 짚단들 그렇게 한해 겨울을 넘긴 농사꾼 그리고 들에 봄이 온들 봄같을까 생각해 보면서 비통해했다.
농사, 비단 한해 두해의 일인가 10년 20년의 일인가 백년 이 백년의 일이던가 한 세기 두세기만의 일이던가 백제 고려조 조선조만의 일이던가 역사이래 사람으로 직립한 이래 우리 민족은 오로지 갈아왔던 쌀, 쌀을 두고 흥정거리가 되는 것일까 곰곰 생각하고 대처해야 할 때라고 본다. 쌀은 이 짧은 글에다 담기에는 너무나 큰, 너무나 많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의 원동력으로 우리 앞에 내려와 있다.
우리들의 문화의 기본은 도시문화가 아니라 농사문화였고 기본 생산수단이다 문화의 발원은 농사였다. 우리의 모든 문화의 양상은 농사의 행동 또는 자연의 변화무쌍한 어울림과 상존 경작 속에 그 원동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설날에서 대보름의 명절 24절후, 삼월삼진의 제비맞이, 오월단오 칠월칠석, 추석, 이 모두의 풍속, 노래, 즐거움. 나누어 먹는 음식 모두가 농사를 위한 것이고 자연에서 얻은 것을 고사로 연장시켜 신앙으로 승화시킨 문화다. 마을굿, 당산제, 들놀이, 풍장, 육자배기 같은 민요 또는 농사의 노래, 이야기들, 이모든 것이 농사문화 그 자체다.
단적으로 말한다. 쌀 수입을 개방하면 닥쳐오는 쌀의 수난의 광풍 그것은 쌀에만 한할까 하는 것이다. 뒤미처 농토가 황폐화 될 것은 뻔한 일이고 필요 없게 되는 개울이 극도로 피폐 오염돼 막힐 것이고 지금 드문드문 남은 마을이 영영 빈집들로 남아 고향을 잃게될 게 뻔하다. 빈 마을 상상하기도 두렵지 않는가.
따라서 설날이네 대보름 칠석이네 추석이 남아있을리 없다. 굿이 놀이와 푸접과 정이 없는 땅 그런 땅을 무엇으로 상상해야 할지 암담하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만화로 가끔 등장하는 별나라의 삭막한 산하 그보다 더 처참하고 볼품 없이 벌어져 있게 될 것이다.
마당이 없는 마을의 달은 그때도 휘엉청 밝게 떠있을지 여름 내내 이글이글 내려쪼이며 농사를 짓는 해는 어디 가서 풍장소리와 어울려 살 것인지 해뜨는 달뜨는 동산을 바라볼 눈이 없는 세상 무슨 맛대라기로 살 것인지 암담하다, 암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