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팽팽했다.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발길이 더 많았다. 작가를 아는 지인들도, 우연히 들른 관람객도 모두 진지한 눈빛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압도한 것은 붉은색의 큰 원형작품이었다. 밀짚모자를 엎어 놓은 듯한 이 작품은 미술보다 과학에 가까워보였다. 전시된 15개 작품 모두 미술과는 먼 게놈지도나 DNA구조를 시각화 한 듯 생소했다.“전주가 고향인데 13년 만에 전시를 열게 됐다”는 작가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그는 회화작가였지만 “평면 그림만으로는 말하고 싶은 바를 해소하지 못했다”면서 “2001년 고무를 작품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점점 ‘입체’작품에 중심을 두게 됐다”고 말했다. 스티로폼은 그중에서도 표현하고 싶은 느낌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재료라는 작가는 “겹겹이 쌓아올리는 작업이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가장 적합했다”고 말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작품을 보면 ‘색채’에 굉장히 민감한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사각형 스티로폼 작품의 경우 쌓아올린 높낮이가 다른데다 한 작품 안에 열 가지가 넘는 색을 담아내 마치 3D 시뮬레이션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한옥마을을 보다 우연히 들렀다는 한 관람객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색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느낌이 든다” 고 말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하나 하나 물감으로 찍어낸 작업이라 더 놀랍다. 한번 더 보고 싶어 다시 전시관을 찾았다는 이일순 화가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이 좋다”면서 “미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이야기해주는 것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슬쩍 보면 예술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동에 가까운 작품들. 한없이 세련되고 미래지향적이지만 동시에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회화 이후 13년 동안 남다른 재료들과 ‘노는’ 도병락 작가는 “입체 작업으로 공간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옛 기억을 되살려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1958년 전주에서 태어나 목원대학교 미술과와 동대학원 서양학과를 졸업한 도병락 작가는 1983년부터 2012년까지 총 30회의 단체전을, 1990년부터 올해까지 총 11번을 개인전을 가졌다. 5월 14일부터 19일까지 전주교동아트미술관에서 가진 이번 ‘Memory Existence’전은 한달 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연 전시의 연장전이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책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나는 깊고 어둡고 음습한 지하 작업실에서 그가 파낸 고무와 집요하게 부착해 나간 우드락을 보았다.(…) 도병락이 차갑고 딱딱한 고무판에 꽃을 피워 내는 일이야말로 어둠과 죽음 속에서 희미한 생명을 발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