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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삶에 충실한 작가만이 감동을 줄 수 있죠
농민화가 박홍규
이세영 편집팀장(2013-07-03 22:32:50)

내 땅 한 뙤기로 농사를 지은 지 30년은 족히 됐으니 천생 농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세월만큼 이 나라 농민운동이 걸어온 역사가 그의 삶에 더해진다. 화가의 삶은 그 후다. 그림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도구일뿐이다. 농민화가 박홍규와의 이야기는 그래서 화가가 아닌 농민에서 시작한다.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를 ‘전국 유일한 진정한 농민화가’라고 불러요. 농사도 짓고 그림도 그리고 농민운동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다면서요. 나 원 쪽팔려서, ‘진정’이라는 말이라도 빼던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 세 가지를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긴해요.” 그가 이야기하는 농사, 운동, 그림을 따라가봤다.

농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
그가 농부가 되었던 건 85년 추운 겨울이었다. 기독교 농민회를 찾아가 귀농을 준비한지 1년여 만이었다. 말만 농민이요, 농민운동이었지 언감생심 내 땅을 꿈꿀 수는 없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농민운동에 같이 뜻을 둔 아내와 같이 할 수도 없는 빈털터리 삶이었다.“돈도 없지, 농사지을 조건도 안되지, 갓 결혼한 안식구와 한동안 떨어져 지냈어요. 안식구는 서천에서 나는 부여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죠.”농민 운동을 하면서 그의 운은 좋았다. 87년 여름,그의 말을 빌자면 “돼지 떠내려가고, 부여 서천 공주 논산 길이 다 끊어질 정도로” 비가 왔다. 농민들의 상황은 처참했으나 농민운동을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신이 났다. 동네마다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농민들을 만날 수 있었고 농민 삼천여명을 모았다. 비로 끊긴길을 오토바이로 몇 달 동안 미친 듯 돌아다니며 동네마다 농민회를 조직했다. “민주화의 열망이 열매를 맺은 6.29민주화선언이 있은 지 얼마 안 돼 비가 왔어요. 날씨마저 도와주는 것 같잖아요. 그야말로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건져 농민회를 만들었죠. 수세투쟁도 농민회를 만드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어요. 해남, 나주로부터 시작한 수세 거부투쟁은 그해 겨울 부여까지 확산됐고 농민회가 면단위로 만들어지는 기회를 제공했죠.” 그렇게 모인 힘은 89년 부여군 농민회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개 지회 100여명의 회원을 시작으로 부여군 농민회가 꾸려지고 그는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농민운동의 역사에 한 줄을 그은 그림도 이때 그의 손에서 그려졌다. 경운기를 앞세우고 함성을지르며 대열을 이룬 농민들의 그림, 농민회 창립을 알리는 포스터다. 그림이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날짜 잡아놓고 포스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써먹을 사진이 없었다. 회원들과 술 마시다 누군가 “네가 본래 그림 그리던 놈이니 그런 거라도 만들어야지” 했다. 그날 밤 집에 들어가 새벽까지 그림을 그렸다. 아내의 표현대로라면 “빨래마냥 큰 판화 몇 장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대자로 퍼 자고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아마도 그림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그림은 안 그렸지만 농민운동을 하며 가졌던 느낌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이 그림은 몇 년동안 ‘대박’을 쳤다. 농민회 관련 행사에는 이 그림이 전부 쓰였고, 농민회 사무실마다 한장씩 다 걸렸다. 20년동안 사무실에 걸린 색 바랜 이 그림을 농민들은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농민회의 시작을 알리는 ‘애착이 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기 싫어 내 팽개친 화구들이 다시 그의 앞에 섰다. 그림이 그가 하는 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통합진보당을 지지하고 농민운동도 오랫동안 해왔지, 그림도 이상한 것들 그리지, 만화로 매일 정부를 까니, 나 같은 놈은 완전히 종북작가”라고 할 정도로 그는 현실참여적인 작가 색을 유지해왔다. 책 몇권 묶어도 될 만한 분량의 만화는 여전히 신문에 연재되고 있고 운동의 현장에서 필요한 그림들은 거개가 그의 작품이다. “사회변혁의 돌풍에서 세상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기층민중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죠.이런 세계관을 견지하는 것이 제 그림에 나타나는 사실주의적 성향입니다. 변혁하고 실천하는 세계관에서 나오는 방식이 사실주의인 거죠.” 그림으로 농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는 그의 철학은 현장에서 대중과 함께 펼쳐내는 과정 속에서 필요한 미학적 세계관, 사실주의를 확립했다.

버릴 수 없어 빚만 늘리는 농사꾼의 삶
87년 대선 패배는 그의 삶을 한 차례 뒤헝클었다. 대선이 패배로 끝난 날 아침, 몇 달간의 강행군과 대선 패배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는지 허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전주로 와서 허리 수술을 하고 이년 여 요양하면서 완주 고산에 정착했다. 전농 전북도연맹 일을 하며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다섯 동의 하우스에 상추, 딸기, 호박, 감자 등을 심었다. 5년간의 농사는 빚만 늘렸다.“농사짓는 사람이 신용불량에 걸리니 영농자금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IMF까지 겹치자 도저히 헤어날 길이 안보이는 거예요. 1억이 넘는 빚을 지고 결국 야반도주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그때 이서면에서 동지들 열 댓이 소주를 사 들고 찾아오지 않았으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홍규야, 이서 와서 살자, 집이랑 땅이랑 다 얻어놨응게. 그리고 마, 몇 달 생활비도 주고 보일러 기름도 넣어놨으니까 가자” 야반도주를 면하고 이서면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었다. “진짜로 새 집에는 겨울 날 쌀과 기름이 있더라고요. 너무 고마워 눈물이 핑 돌았죠. 그렇게 동지들과 함께 하우스를 새 단장하고다시 농사를 시작했어요.”그래도 빚은 해마다 늘었다. 호박 농사 몇 번 지어서 제 값을 받은적이 있지만 그것도 몇 달 쓰면 ‘땡’이라고 했다. 언감생심 빚 갚을 생각을 못했다. 농민들의 어려운 삶은 뒤죽박죽된 국가의 농정에 큰 책임이 있다고 했다. 84년 개방농정을 시작한 이래 농민은 계속 줄고있고, 정부의 정책도 전문농과 부농정책으로 전환되며 중소농이 다사라지게 됐다고 했다.“1천만 농민이 300만도 안되는 상황이 됐잖아요. 부농으로 오르는사람도 있었지만 개방농정 30년만에 농민들의 계층분화가 심화돼서빈소농 아니면 대농으로 나뉘었죠. 농민의 계층분화는 농민회의 어려움으로 이어졌고요. 지금도 강소농정책을 한다고 하지만 말이 그렇지, 동부팜같은 경우를 보면 말도 안되는 정책을 펴는 것이죠. 이명박 정부에서 기업이 농업을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동부팜에FTA 자금 87억 전부를 지원했잖아요. 대규모 기업농이 생기면 중소농들은 다 죽게 생겼어요.” 농민인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여전히 부정하다.

못된 선배들과 고민했던 ‘그림’하는 이유
이렇게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는 삶을 만들어 낸 것은 오래 전이었다. 78학번의 대학은 사복경찰들과 학도호국단이 경찰력이 되었던시대였다. 유신체제의 지속은 문화예술계통을 폐쇄적으로 만드는 한편 군부독제에 협조하게 했다. 마치 일제 강점기 친일부역자와 같았다. “정부에 협력하던가, 한 건 저지르고 감옥에 가던가 하는 상황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홍대 미대는 더했어요. 사실주의적 색채를 띠면 바로 잡혀가는 상황이었으니 모더니즘아트, 모노크롬 아트, 팝아트 등 서구 사조들이 주류를 이뤘죠. ‘대학미전’을 만들어서 여기서 상을 받아야만 출세하는 상황이었습니다.”그렇다보니 대학 내 풍토도 새로운 사조에 대한 자기고민, 사회와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러나 두 장의 ‘삐라’가 그를 고민하는 청년으로 만들었다. 대학 축제 때, 건물 꼭대기에서 누군가 유인물을 뿌렸다. 아무도 모르게 유인물 한 장을 손에 넣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몰래 자리를 떴다. 서양학과 선배가 쓴 유인물에는 “미대 학우들이여,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 군사독재가 이렇게 시퍼렇고 외래사조에 물들어서 정신까지 썩어 가느냐, 이 무풍주의 미술의 방향을 과감히 깨자”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자취방에 와서 유인물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공감이갔다. 같은 해 종로2가 YMCA에서도 전단이 뿌려졌다. ‘동일방직 똥물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전단을 보면서 울었다. 그리고 분노했다.“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그림을 그리면 ‘사람’을 그리게 되더군요. 아마도 저 새끼들이 보면 냄새가 나는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을 하던 ‘못된 선배들’이 제 그림을 보고 절 끌어들였죠. 선배들과 김민기의 노래를 몰래 듣고, 김지하의 황토를 읽으며 공부를 했죠.” 사회성 짙은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대학미전도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깽이 군상들이 절규하는 음습한 그림으로 대학미전 출품을 하려는 그를 담당교수가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게 싫어졌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게 좋았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 80년 광주에서 올라온 사람들로부터 광주민주화항쟁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을 알아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막막함과 절망감에 입대했다. 관심사병으로 찍혔지만 그곳에서 진로에 대해 운명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반봉건, 반일 민중운동인 암태도 소작쟁의를 소설화한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는 그를 화가가 아닌 농민의 삶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됐다. “마지막 휴가 때 <암태도>를 몰래 들고 갔어요. 몇 번을 읽으면서 내 삶을 정했죠. 빨리 졸업하고 농사나 지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시골로 내려가서 농민운동을 해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생겼죠.” 그렇게 농민의 삶을, 농민운동의 길을 걸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 그림
그래도 화가의 길을 아주 포기하지는 못했다. 복학 후 민중미술과 문화운동을 통해 그림을 고민했던 그로써는 그림은‘두고 보는’ 예술적 가치보다 ‘현실을 움직이는’ 선전선동의 한 방편이었다. 그가 민화와 판화, 만화를 공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복학 후 공부한 민중미술은 문화에 대한 안목도 키우고 기능적으로도 다양한것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배운 게 붓질이었으니 현장에서필요한 그림들을 직접 그려내는 일은 어떠한 그림보다 절실한 내용을 담았을지 모른다. “예술이라는 건 현장에서 대중들의 요구를 받아 안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내 열의와 열망, 생각이 담겨있는 가장 실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만화나 걸개그림 등 현장에서 필요로 했던 그림들은 어떤 형태로든 대중들에게 전달이 되었지만 내 개인적인 예술적 욕구들, 욕심들을 채워줄 무엇이 필요하더군요.”현장에서 농민들과 생활하고 농사짓다보니 그림 그릴 상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하지만 그 상들은 농민으로써의 고단한 삶 속에서 고정시키기도 전에 없어지거나 바뀌거나 했다. 그림들을 꼭 그려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99년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11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 11년 동안 그의 그림은 수묵양식의, 많이 밝아진 농촌의 일상들을 표현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농사를 지으며 망한 시기’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예술의 고갱이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투철해졌다. “80년대 민중미술에 힘 쏟던 사람들이 변신하거나 새로운 주의를 받아들이는 상황이지만, 저는 미학적 개념에서 사실주의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가장 구체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무기로써 사실주의 기법이 옳다고 생각합니다.”여전히 그가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할 것들은 많다. 변하는 농촌의풍광들, 농민들 그리고 그들의 처지, 세상을 뜨는 것들에 대한, 변해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을 하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농민들의사계도 화폭에 담아보고, 이웃과 동지들의 삶과 내면적 고뇌도 담아야 하고 동학농민혁명을 시작으로 변해온 농민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려보고 싶다. “그리고 싶은 욕심이야 많죠. 영상 기록물처럼 그려놔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잘 안되는 게 문제죠. 그래도 내년 동학 120주년에 맞춰서 동학에 관련된 전시회는 한번 열려고 해요. 지역순회전도 하고 전시회를 기회로 진보, 시민, 문화예술 진영이 함께 연대하고 진열을 갖출 수 있는 길을 열고 싶어요.” 외세간섭, 민중파탄,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했던 120년 전과 오늘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회로 현정부의 정책에 맞서는 거대한 진영을 만드는 일에 그는 한동안 매진할 계획이다.

변절하지 않는 당당한 삶
“이 길로 들어선 게 참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된 듯도 하고. 운동을 안했으면 이상한 놈이 되었거나 이상한 그림 그리며 ‘사짜’ 냄새나는 인간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림 그리는 것보다 농사짓고 농민들과 현장에서 있는 것이 더 좋아요. 사람 만나고조직하는 일을 가장 잘하기도 하고요.”하지만 아이들도 농부가 아닌 화가 아빠를 간절히원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어린 아들은 생활력 빵점인 아빠가 그림만 그리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생각했다. 이름만으로도 한 수 접어주는 대학을 나왔으니 그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쉬운 길을 찾지도,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문화예술이라는 게 마음을 감동시키고 울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죠. 작품들은 그 삶에서 뽑아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예술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중요하죠. 치열하게, 올곧게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일관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작품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회의 큰 무기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의 일관된 삶을 적어도아들은 인정해준다. 남을 위해 애쓰는 아빠의 모습에 신뢰를 보내주고 있으니 그는 잘못 산 인생은 아니라고 했다.대화는 유쾌했지만 가슴 한쪽이 먹먹할 수밖에 없는 사회성 짙은 소설 한 편을 읽는 듯했다. 여전히 가진 것은 없지만 ‘건강한 빈대, 당당한 빈대’를 부르짖는 그는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어 가진 것이 많은 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망한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놓고 변절한다면 모든 생애는 재평가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일관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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