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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 | [문화저널]
1994동학농민혁명백주년/우리 역사를 바로찾자 역사적 사실 규명에 대한 백가쟁명 기대
최보식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2003-09-15 09:28:18)
역사적 사건에도 힘의 서열이 있게 마련이다. 아예 초장부터 맥없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발생 때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얼마가지 못해 스러져버리는 뒷심 없는 사건이 있고, 그런가하면 세월이 흐를수록 힘이 자꾸 보태지는 사건도 간혹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후자 쪽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족보를 보자. 동학농민혁명은 난적의 무리들에 의해 저질러진 민요(民擾)로 출발하고 있다. 그 다음의 정식명칭은 동학난, 갑오년 무렵 동학에 흘린 무리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는 뜻이 담긴 셈이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역사교과서에는 그렇게 쭉 씌여왔다. 그러다가 어연 세상이 바뀐 것인지 역사관이 변덕스러운 것인지, 동학농민혁명은 전제정권의 학정에 맞서 민초(民草)들이 조직적으로 우뚝 일어선 역사상 유례 없는 거사가 되고, 근대의 여명을 알린 분수령 적인 사건으로 환생한다. 동학농민혁명으로 되살리기까지에는 서로 의도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몇몇 정치인과 천도교관계자, 많은 강단학자, 향토사학자, 무직의 연구가들이 함께 노력을 했던 게 틀림없다. 어느 쪽의 공이 더 큰 것인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려운 시기에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연구의 단추를 열었던 중견사학자들의 용기는 평가할만한 것이었다. 그 못지 않게 최근 들어 숫자가 불어나고 잇는 젊은 사학자 집단이 열정과 의무감이 혼합된 자세로 동학농민혁명의 연구지평을 넓혀 가는 작업도 참 볼만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으로 힘센 사건이 됐다. 여기서 1백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세월의 무게까지 얹혔으니 이 땅에서 동학농민혁명의 힘은 더욱 부풀어질 것 같다. 동학농민혁명이 뒤늦게 제값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보상을 받는 것인지 알 순 없어도 어쨌든 다행스런 일이다. 이번 1백주년 잔치는 동학농민혁명의 복권된 힘을 보여주는 첫 자리가 될 게 분명하다. 혹 아직까지「동학난」이라고만 알고 있는 일부 국민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을 널리 홍보하게 될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다. 그럼에도 기자는 기분 좋게 백주년을 맞아 오해살만한 속마음을 털어놓아야겠다. 지금껏 동학혁명에 대한 이뤄놓은 성과가 양적으로 아무리 많아진다 하더라도, 질적으로는 빈곤한 지경에 계속 머물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그 이유를 동학혁명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연구경향이 너무 단선적으로 흘러왔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떠넘겨본다. 학계의 연구자들은 서로간에 연구의 외양만 달랐지, 거의 하나의 흐름을 타고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일한 결론은 민중의 위대성 혹은 승리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데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는 늘 고정된 장소에서 바라보았다. 초창기에는 진압자의 편에 서서, 후반기에는 혁명거사자의 편에서 렌즈를 들이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렌즈는 흡사 망원용 같은 것이어서, 세밀한 부분은 보지 못하고 윤곽만 훑는데 적합했다. 거대한 용량의 동학농민혁명을 한가지 용도의 그릇으로만 만들면서 1백년을 보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동학혁명에 관한 현장사료는 일본 쪽이 훨씬 많은 걸로 안다. 하지만 일본 쪽 사료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아직 못 봤다. 마찬가지로 중국쪽 사료를 찾아보려는 국내학자도 없을 것 같다. 또 하나 동학농민혁명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가려면 당시 동학에 가담하지 않았거나 반대편에 섰던 농민 혹은 양반들의 입장도 포괄하고 변호할 수 있는 소수파도 등장할 때도 됐는데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1백년을 맞으면서, 민중의 승리라는 역사적 교훈의 전파보다는 좀더 사실 자체에 대해 백가쟁명이 벌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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