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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 | 인터뷰 [300호 특집]
지역과 문화에 대한 애정, 손 내밀어 함께 가자
윤덕향 문화저널 제2대 발행인
이세영 편집팀장(2013-07-30 17:38:48)

300호 특집을 만들면서 문화저널의 초창기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제2대 발행인 윤덕향 원장을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있던 그는 지금 호남문화재 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지역의 문화적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에서 윤원장은 써온 역사보다 써갈 내일에 대한 희망과 당부를 아끼지않았다.

문화는 우리 삶에 가치있는 것
고창 고인돌유적이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전이었다. 문화저널 초대 발행인이었던 진호씨와 만난 자리에서 “고창 고인돌유적이 중요한데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고창고분이 이렇게 돼서는 안된다”고 툴툴(?)거렸다. 젊은 날의 객기로 날린 말이었지는데, 그 덕분이었는지 고창 고인돌유적이 문화재로 지정되고 문화저널과 연도 맺었다. 첫 인연은 89년 연중기획 ‘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연재로 시작됐다.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었던 당시, 그의 글은 전북 곳곳에 산재한 백제의 유산들을 다시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즈음 문화저널은 ‘백제기행’을 시작했을 때였는데, 윤 원장은 아예 백제문화를큰 주제로 지정 강사가 되어 백제 유적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기행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대중과 함께 기행을 가는 것은 정확히 세어본 건 아니지만 전국적으로도 몇째 안 갈 겁니다. 특히 주제를 정해 놓고 백제 또는 그와 관련된 전라도 땅을 밟는 것은 전라도에서는 처음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후로도 윤 원장은 오랫동안 백제기행의 고정 해설사(?)로 전국을 누볐다. ‘기행’을 관광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때였으니 잘 알려지지 않은 백제기행에 참가자를 모으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빈 좌석을 채우는 몫은 윤 원장에게도 할당돼(?) 아내와 아이들까지 총동원령을 내리기도 했다. 윤 원장은 백제기행단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잘해서가 아니라 강사비가 없어서 함께 다닌 것”이라고 웃지만 백제기행과 함께 만든 추억은 요즘도 새록새록 하다. 재미도 없는데 왜 가냐던 딸아이도, 주말 근무를 끝내고 헐레벌떡 순창에서 달려 오던 단골도, 늦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일찌감치 버스 자리를 채우던 사람들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윤 원장은 “백제 기행은 우리 지역의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며 “문화라는 것이 우리 삶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적어도 몇 사람에게는 알려냈던 것, 이것이 문화저널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91년 윤 원장은 문화저널 제2대 발행인에 취임했다. 정치사회 상황이 여전히 암울했던 시절, 지역 문화운동의 힘이 필요했다. 문화저널은 당시 지역문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 당시 기억하는 문화적 사건이 있었다. 전라감영탑 건립에 관한 논란이었다. “결국 누구누구가 공로가 있다는 것을 적는 선정비를 세우자는 것이었어요. 선정비라는 것이 많은데 선정비는 악정을 했던 사람들이 세우는 것이 대부분이었잖아요. 전라감영탑 건립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윤 원장 특유의 툴툴거림과 역사에 대한 원칙적인 관점은 92년 7월호 ‘우리에겐 이미 너무 많은 선정비가 있다’는 주제의 글에 그대로 담겼다. 이 글에서 윤 원장은 “탑을 건립하는 측에서 내세우는 명분의 하나로 도민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삼고 어쩌고 하는 것이 있을 것에 틀림없다. 도대체가 도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는 것을 누가 결정하였는가?”라고 적고 있다. 문화저널안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 사회가 진보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을 담아낸다고는 하지만 문화저널이 제대로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문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문화계 결산을 하기도 했는데 날카로운 비평이냐 아니냐에 대해 논란이많았던 것 같아요. 지역사회에서 얽혀 생활하는데 있는 그대로 비평을 하는 게 좋은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안면을 봐줄 것이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겠죠?” 그래도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어 숱한 난관을 뚫고 문화저널은 쉬지 않고 발간됐다. “빠진 사람들이 서운해 하겠네요”라며 불러주는 이름들이 귀에 익다. 일일이 거론하기에 적지 않은 그들은 문화저널에 대한 사랑, 지역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끈끈한 동지애로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온 동지들이다. “생각해보면 한 일이 별로 없네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무거운 짐을 좀 거들었다고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문화저널 초창기를 건너오면서 어려움이 없었을 리없다. “걱정이야 뻔했죠, 돈이 없다는 것. 재정이 늘 어려우니 이번호만 내고 그만 낼까, 합본호를 내볼까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어요. 그래도 제 기억에는 힘들게나마 빠지지 않고 매달 저널을 냈던 것 같군요.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 고민으로 편집위원 중심의 체제였던 문화저널은 후원회원을 구성하게 된다. 대중화에 대한 고민도 깊어갔다. 글이 너무 어렵다, 제호가 타당하냐, 대중에 영합하는 것아니냐는 자성과 비판이 내부에서부터 제기됐다. “어떻게 대중화하고 일반화해서 책을 쉽게 접하게 할 수 있고 회원을 늘릴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죠. 그렇지만 ‘옐로페이퍼’가 되지 않기위해 수준을 지키면서 대중화하는 방안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때 초창기 식구들이 안았던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문화저널이 새겨해야 할 고민으로 안겨있다.

손 내밀어 같이 가는 길 찾길
윤 원장은 지역문화와 문화저널이 가야할 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박물관, 공연장 등 문화적 향수를 채울 수 있는 지역의 문화적 토양은 90년대보다 좋아졌다. 그 과정에서 문화저널의 역할도 분명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궁금하다. “20여년의 세월동안 배출된 예술대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이들로 전시장과 공연장이 가득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람들을 공연장과 전시장으로 불러오는 계기를 만들어야합니다. 문화저널이 시민의 문화의식을 높이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화저널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겠죠.” 윤 원장은 문화저널이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한 것은 뼈아프지만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대중에 영합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자랑스럽다고 했다. 역시 문화저널의 저력은 지역의 수준 있는 문화를 알리고 있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지역 사람들이 참여하는 문화저널이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을 위로 끌어올리면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가치를 알리고, 문화의 가치를 알리려는 노력을 부단히 해야 합니다.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게 전북을 살리는 길이고 문화저널이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처럼 전북 문화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오십만 회원이 함께 하는 문화저널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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