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전라도 땅, 그러나 그와 만난 것은 몇 번의 약속을 미루고 미룬 후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강정의 상황은 정확한 약속을 매번 방해했다. 급기야 두어 달 전부터는 전화통화도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평화활동가, 제주해군기지 불법공사 시민감시단 이종화씨는 연락두절의 사정부터 털어 놨다. “지난달 21일 두 달여 만에 출소했다”고 했다. 어렵게 만난 그에게서 쉽지 않은 인생의 굴곡을 거친 그러나, 확고한 신념으로 세상을 사는 한 ‘생명’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운동의 시작점이자 결혼식을 올렸던 추억이 담겨있는 전동성당의 그늘에 앉아 그와의 대화는 시작됐다.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겁니다. 제발 재판부도 각성하길 바랍니다. 이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 세계 인류사적 관점에서 같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번 재판의 최후 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묵비권을 행사했던 수사과정과는 달리 할 말을 다하고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검찰 쪽에서 형이 낮다며 항소를 했고, 그도 항소로 맞받아 쳤으니 다시 재판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별것 아니라는 투다. “지금 걸려 있는 재판이 다섯 건 정도 되고요, 500~600만 원 정도의 벌금에 묶여 있어요. 강정에서 활동하는 시민감시단 사람들은 대부분 그 정도 해요.”
그의 주소지는 ‘강정마을 마을회관’이다. 제주도민으로서 제주도에 벌어지는 참극을 막으려는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그들은 “제주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생명이다. 강정의 한 귀퉁이에도 그의 밭을 둘 정도로 농사를 짓기를 좋아한다. 학생 때부터 농민운동을 했고 실상사 귀농전문학교에서 귀농도 준비했다. 2000년에는 미친 놈 소리 들으면서 진안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기도 했다. 시기가 빠르기도 했고 농사에 서툴렀던 탓도 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농사를 접어야만 했다. 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배운 ‘생명의 소중함’은 시민사회단체 생활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민족문제연구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으로 활동했다. 실상사 귀농전문학교에서도 “동강 지키러 가야한다”며 수업을 작파하기도 했다. 무엇을 하던 ‘생명’을 지키는 현장에 달려갔다. 전주시내버스 파업으로 어려웠던 버스노동자들도 그가 지켜야할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그가 강정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유치장에서 보낸 강정의 첫날
2010년 평통사를 주축으로 전주시내버스 문제 해결을 위해 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그 곳에 그도 함께 했다. 천막농성을 하며 낮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일을 돕고, 밤에는 주유소에서 돈을 벌어 생활을 꾸려갔다. 그런 노력 덕이었는지 전주시내 버스 파업은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해결의 기미가 보였다. 자신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생업 복귀를 선언했다. 농한기, “제주도 감귤 밭에 일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가까운 사람들에게 농반진반 이야기를 했다. “얼마 후 친구로부터 ‘제주도로 일하러 온다는데 강정에 한번 오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순간, 문제가 있구나 생각하고 그 다음날 제주도로 내려갔죠.” 그와 인연이 있었던 평통사, 생명평화결사, 개척자들이라는 단체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때는 계속되는 싸움으로 강정마을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었던 때였다. 그리고 그 길로 제주에 눌러 앉았다.
강정에서의 활동은 녹록치 않았다. 첫날부터 연행이었다. 건설현장 앞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장에서였다.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며 오히려 그는 강정마을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강정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그를 취조하던 수사관이었다. 수사관들에게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강정문제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들었다. 수사관들의 생각도 들었다.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자고 강정마을로 왔다.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간의 아픔, 싸워온 과정을 들으니 눈물이 났다.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했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강정이었다.
“대선에서 우리가 이기면 탄압국면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절망에 빠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강정상황은 장기적으로 가야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문정현 신부님이 중심을 잡고 조금씩 추슬러 내고 있습니다. 이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던 아니던 우리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교수와 싸워도 지지 않는 무학의 마을회장 어르신과, 흐트러짐 없는 마을 사람들, 이름없이 들어와 있는 활동가들, 삼대 종단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붙들어주고 있습니다. 지켜야할 생명에 대한 싸움이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는 30%정도 공사가 진행됐다고 한다. 방파제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바지선이 바닥을 헤집고 있다. 해군기지가 아니더라도 접안시설이 있는 항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해군기지만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의 최후 결전지로 삼았던 제주도에 다시 전쟁의 씨를 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해군기지가 지어지면서 발생하는 환경적인 문제가 제대로 알려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설혹 지금 지어지는 항구가 완성된다고 할지라도 군사기지가 안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몇 년 걸려 완성될 텐데 그 사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불의에 항거해온 역사를 지닌 제주의 힘을 믿고 평화의 섬 제주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믿는다고 했다.
강정에서 발견하는 시대의 자화상
강정에서 그가 찾아 낸 것은 단순히 해군기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반도의 끝자락, 제주에서 봤다. 생명에 대한 존경심, 경외감 그리고 말 못하는 것들에 대한 존중 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서로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죽이거나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같이 가야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강정의 문제는 이 사회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적 재앙은 내 이웃에 대한 경외심, 소중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곳곳에서 발생하는 생명에 대한 공격,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입니다.” 그의 인식은 제주를 넘어, 생명을 품고 있는 지구에까지 닿아 있었다. “제주가 지구의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의 출발인 눈동자가 맑아야 되잖아요. 맑은 지구의 눈을 지키는 일, 그래서 제주 강정문제는 중요합니다. 이곳을 지키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정을 바라보는 인식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싸워야할 사람들보다 같은 길을 가야만 할 사람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친다. 자녀들 학원 안 보내는 의원, 기초생활비만으로 활동하는 의원이 있었다면 현재의 상황을 피했을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그와 함께 현장 활동했던 의원들이라도 말이다. “과거를 반성하면 같이 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싸웁니다. 그게 한나라당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길을 가야 할 동지로써 민주당은 기득권이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굶은 한이 있더라도 정도를 가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지금의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당, 대오 각성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민주당을 향한 그의 통렬한 비판은 스러지는 생명을 보호하려는 어미의 마음처럼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가족조차 돌볼 수 없었던 부채의식
밖에서의 가슴 아픈 상황만큼이나 집안의 사정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평범하게 살면서 시민사회단체에 회비를 내는 것만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이 현장 저 현장을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는 안다. 철이 없다거나, 삶의 중심도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 아내와 이혼을 한 후의 일이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현장의 밤에 그는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그 고통에 그는 다시 꺼이꺼이 눈물을 흘린다. “그건 내가 비워내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인 탓이겠죠. 아빠가 됐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아들의 말이나 평범하게 살 수 없느냐는 아내의 말이 가슴에 비수로 박힙니다. 가정을 지키지 못했으니 비난을 들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죠. 해준 것 없이 고생만 시킨 아내는 평생 업고 다녀도 모자랄 겁니다. 아이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보듬어 주지 못했던 것도 가슴 아프죠. 갈라져 버린 가족이지만 여전히 아이들과 아내를 사랑합니다.”
안팎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그의 부족함을 가화만사성이라는 다섯 글자에 담아 비난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한참 만에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른 그가 이어내는 말들에 그리 될 수밖에 없었던 한 가닥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가 전북대 상대를 입학한 것은 79년의 일이다. 졸업만 하면 양손에 떡을 쥐고 취직할 곳만 고르면 되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학교생활은 공부보다 더 중한 것들이 있었다. 엄혹한 시절을 살았던 의기 넘치는 학생이 그였다. 그리고 80년 5월 18일 새벽, 전북대 정문 앞 하숙집에서 장갑차 소리를 들었다. 공수부대가 캐터필러 소리와 함께 정문을 장악했다. 광주의 참혹한 소식을 접했지만 그곳으로 끝내 가지 못하고 어설프게 피해 다녔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학번이었으나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한 이세종 열사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 때의 부채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겠죠. 나만 비겁하게 살아 있다는 자괴감이랄까. 그러다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접하게 됐어요. 그분들이 싸웠기 때문에 그나마 옥에서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시민활동가라고 할 수 있는 것조차도 그들의 덕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치열하게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지금의 삶은 선배들이 피 흘린 목숨 값이 아닌가요?” 치열한 삶의 밑바닥에는 살아남은 그의 슬픔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다시는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를 현장에 메어두고 있다. 오늘도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이자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백배를 올린다. “여기까지 온 것은 이웃의 힘이니 이들의 마음을 잇는 일을 계속해 갈 생각”을 실천 중이다. 전국 각지의 현장 소식을 전하는 그의 페이스북에는 그런 흔적들이 빼곡하다. 그러므로 그의 현장 활동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같이 활동하던 동료들이 갈 곳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농사지으며 같이 살 수 있는 공간, 인드라망 완성될 때까지. “서로를 위해주는 세상을 위해 나머지 삶을 살아가야겠죠. 우리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알고 서로를 위하는 삶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