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3.8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뒤돌아보는 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송경원 영화평론가(2013-07-30 17:43:01)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발언으로 일본 내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일본 내 우경화 분위기에 휩쓸려 평화 헌법 9조(전쟁 포기, 국가 교전권 불인정 등을 규정하며 타국의 침략에 이용될 수 있는 군대를 가지지 않기로 한 법)의 개헌 발언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한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였다.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나온 발언이라 더욱 민감했다. (선거는 결국 아베의 자민당과 연립 여당인 공명당이 압승했다.)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하야오 감독은 “보수 우익은 전쟁 전의 일본이 나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저지른 잘못은 인정해야 한다”며 생각있는 보수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내 극우 세력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매국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개발자를 소재로 한 신작 <바람 불다> 홍보를 위해 이 같은 무리수를 두었다고 비난했다. 나는 그들에게 권하고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들을 차근차근 다시 보라고. 그의 작품은 언제나 기억과 반성, 조화와 균형에 관한 이야기였다.


잃어버린 이름과 기억
그 중에서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진짜 이름과 기억에 관한 영화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10번째로 펼치는 이 정겹고 흥미로운 소동끝에는 나의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있을 어린 시절 실개천 내음이 묻어있다. 열 살의 평범한 소녀 치히로는 식구들과 이사 가던 중 길을 잘못 들어 이상한 터널을 지나게 된다. 그 곳에서 엄마와 아빠는 신들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하고 마는데, 그렇게 돼지가 된 가족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소녀의 모험은 시작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익숙한 이야기는 ‘미친 자들의 동화’라는 앨리스 못지않은 우화와 복잡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것은 ‘강에 대한(혹은 강으로 상징되는 자연, 자아에 대한) 잃어버린 기억’이다. 이 작품은 소녀가 가족을 되돌려 받는 내용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 잊어버린 강의 이름을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야기 초반 현실의 치히로(千尋)가 터널 속 세계에서 이름의 조각을 잃고 센(千)이 되는 것은 이 작품이 잃어버린 이름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종횡으로 읽어나갈 수 있는 중층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 구조에 반해 스튜디오 지브리가 추구하는 주제는 언제나 단순 명료하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이어져 온 자연으로의 소통과 조화에 관한 메시지야말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핵심이며, 이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소녀가 만났던 강, 물에 빠진 소녀 치히로를 구해주었던 강은 소녀가 다시 기억해주는 순간 비로소 ‘하쿠’라는 이름의 백룡으로, 잊고 있던 강이라는 본 모습을 찾는다.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여우처럼 기억과 이름을 통해 드디어 서로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만남. 그리고 이를 통한 잃어버린 순수의 회복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반복해온 고답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 단순하고 간결한 메시지에 거장의 연출력과 애니메이션 특유의 표현력이 더해지는 순간, 관객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뒤흔들며 감히 실사영화는 상상하지 못할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백미는 센이 하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이름을 회복하는 순간이라기보다는 센이 일하게 되는 온천장에서 벌어지는 정신없고 떠들썩한 소동에 있다. 온천장을 가득 메운 일본의 애니미즘과 결합한 다양한 모습의 신(神)들은 미야자키 월드가 꾸준히 선보였던 개성 있는 캐릭터들과 겹쳐지며 실로 생기 넘치는 화면을 자아낸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이미 나왔던 숯검댕이가 온천장의 보일러실에서 다시 나오는가 하면, <바람 계곡의나우시카>나 <원령공주>에서 언뜻 보였던 귀신과 정령의 이미지도 온천장 곳곳에서 반복된다. 여러 작품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익숙한 변주와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주무르는 감독의 유연한 연출이야말로 이 작품을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자 핵심이다. 거기에 더해 애니메이션 고유의 표현력은 실사영화가 흉내 내지 못할 아름다움으로 관객에게 이미지 그 자체의 쾌감을 전달한다. 허기를 달래지 못하는 가오나시의 물컹거리는 기괴한 움직임이나 악취가 나는 오물신의 녹아내리는 이미지가 그러하다. 오물신이 센의 도움을 받아 고철과 쓰레기를 뽑아낸 후 정화되어 강의 신으로 탈바꿈 하는 장면들은 물이 가진 일렁이는 이미지의 원초적인 쾌감을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옮겨놓는다. 표현 영역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움직임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을 전달함과 동시에 물과 자연이라는 주제의 직관적 접속을 가능케 한다.

기억을 끄집어 내는 아날로그적 움직임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참 낡았다. 3D 애니메이션을 넘어 실사 3D영화가 판을 치는 지금의 눈높이에서 보면 한 장 한 장 그려온 수공업 방식의 셀 애니메이션의 색감은 어딘가 고리타분한 느낌을 자아낸다. 물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역시 초기 원화 공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디지털을 활용하고 있지만 아날로그의 질감을 바탕으로 디지털을 일종의 도구에 가깝게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표현된 향수어린 색감과 아날로그적인 움직임이야말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놓고 관객 마음 속 깊이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고리이자 안식처다. 여기에는 번들번들한 질감의 CG나 3D 애니메이션이 표현할 수 없는 소박함과 두루뭉술한 감성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이야기는 무척 익숙하고 낡았기에 그 빈 행간의 표현을 관객의 기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이미지들로 채워갈 수 있었고, 결국에는 잊혀진 기억들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다. 센(千)이 잃어버린 이름과 강의 기억을 찾고 다시 치히로(千尋)로 돌아가는 것처럼 관객은 따뜻한 이야기와 흥겨운 소란 끝에 잃어버린 물의 기억, 자연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정신없이 오늘을 살아가느라 쉽게 잊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비로소 서로의 진짜 모습을 만날 자격을 얻는다. 아직 자신의 허물을 인정을 용기를 내지 못했을뿐, 어쩌면 운명의 누군가는 이미 당신 옆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