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 | [문화저널]
새로찾는 전북미술사
조선시대 전통적인 화풍에서 새로운 화풍 수용까지
이상좌의 가솔들
이철량 전북대 미술교육과 교수(2003-09-15 09:32:43)
만약에 이상좌가 전주와 어떤 경로로 든지간에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내세우면, 지금까지 그의 가솔들로 알려져 왔던 이숭효(李崇孝), 그리고 동생 이흥효(李興孝) 형제와 이승효의 아들인 이정(李楨)을 언급하여야 할 것이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이배련(李陪連)편에 보면 허균(許均)이 쓴 이정애사(李楨哀辭)를 통해 이정의 아버지로 이숭효, 그리고 할아버지로 이배련을 들고 그림에 뛰어나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한국서화인명사서」이상좌 편을 보면 그의 아들로서 흉효 또한 그림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흥효는 숭효의 동생으로 역시 그림에 능하여 벼슬은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그리고 형인 숭효가 일찍 세상을 뜨자 형의 아들인 조카 정(楨)을 맡아 양육하면서 그림공부를 시켰고 함께 화원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이렇든 여러 정황으로 보면 숭효. 흥효는 형제간이며 이정 또한 숭효의 아들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들 가계중 이상좌와 이배련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현재로선 이상좌와 이배련이 이름이 다른 동일인물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인물인지 확인 할 수 없다. 이렇게 이상좌나 이배련의 출생이나 행적에 대해 확인할 길이 없는 현재로선 다만 이들이 전주인으로 나와있는 점에 작은 기대를 가져볼 뿐이다.
"이숭효 (李崇孝, ?) 생존년은 확실하지 않으나 상좌(上座)혹은 배련(陪連)의 아들로서 이정의 아버지이다. 아들 정(楨)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나자 삼촌인 흥효가 데려다 그림공부를 시켰다.
숭효의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여기 보이는 어부도(漁夫圖)는 비슷한 어부도의 다른 그림과 함께 그가 조선조 중기에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절파(浙派:중국 명나라때 절강성 지방에서 대진(戴進)과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했던 그림양식)풍의 그림을 도입하고 소화시키고 있는 점을 보여준다. 어부가 낚시를 끝내고 귀가하는 장면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긴 하지만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잡은 언덕과 대칭을 이루는 암벽 사이에 꽉차게 배치한 인물의 모습은 조선 전기의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古事官需圖) 이후 많이 나타나고 있는 인물중심의 풍경화이다. 그 중에도 이 그림 특히 언덕과 암벽 그리고 어깨에 매고 있는 낚싯대가 삼각형 구도를 이루며 공간을 매우 극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점이 특별나다. 유머스럽게도 덮개가 잘려나간 챙이 넓은 모자와 바람에 날리고 있는 머리카락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의 안면묘사가 섬세하며 반면에 옷자락은 강건한 필치의 선묘중심으로 처리해 얼굴을 강조해내고 있다. 특히 다소 딱딱해 보이는 강한 선으로 표현된 언덕의 윤곽과 옷자락의 주름, 그리고 암벽이 음영으로 처리된 모습에서 구도와 함께 이숭효가 중기의 새로운 화풍에 밀접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든 그가 정확한 인물묘사와 함께 시대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뛰어난 화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고 다만 전하는 유작이 많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 "이흥효(李興孝, 1537-1593) : 앞서 기록한대로 이상좌의 아들이며 숭효의 동생이다. 형이 일찍 세상을 뜨자 어린 조카 정을 데려다 길러 화가로 대성시켰다. 그는 명종의 초상을 그려 군직(軍職)의 벼슬을 재수 받았다. 그리고 화원(花園)에 들어가 활동하며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그의 그림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유작으로 보면 특히 산수에 뛰어났다. 조선초기의 전통적 화풍을 소화하며 중기에 새롭게 형성된 절파계 화풍을 융합하는 절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몇 개의 화첩 중에 들어있는 「설경산수도」는 우측 상단에 흥효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어 그의 작품임을 확실히 알리고 있다. 이 그림은 그가 전통적인 조선조 초기의 화풍을 충실히 소화해내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화면 중앙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주산(主山)을 배치하고 근경과 중경을 대각선으로 배치한 전형적인 초기 화풍이다. 경루 삭풍에 동자를 거느리고 있는 선비가 나귀를 타고 멀리 보이는 성루를 찾아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고 있는 장면으로 소재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산머리에 수직으로 길쭉길쭉하게 찍은 태점(胎占)과 산봉우리에 짧은 선으로 성글성글하게 긁어내고 있는 준법(峻法)은 조선초기 후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적인 독특한 방식의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다소 선이 늘어지고 헝클어진 모습이 힘이 없어 보이나 셜겨의 효과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가 말년에 병을 얻어 홍양(洪陽)에서 요양을 하며 그렸다는 「산수도」는 또 다른 화풍인 조선조 중기에 유행했던 절파풍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에 1593년 여름에 병중에서 제작했다고 쓰여 있는데 말년 병상에서 그린 그림답지 않게 힘이 있고 짜임새도 완벽하게 구사돼 있다.
근경과 중경, 원경을 왼편에서 일직선으로 배치한 일종의 편파구도를 사용하여 오른편의 시원한 공간을 살린 점과 근경 언덕 위에 서있는 나뭇가지를 그리는 수법(게발톱 모양이라 하여 해저묘법이라 함)에서 전통적 양식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중심부에 솟아있는 산과 근경의 언덕 등이 마치 음영을 나타내는 면처럼 처리된 점과 나무를 그리는 선과 다리, 인물 등이 진하고 굵은 강건한 산으로 나타내고 있는 점이 조선조 중기에 드러난 새로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흥효는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을 충실히 소화하고 있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새로운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정(李楨, 1578-1607): 이정은 일찍 부모를 여의자 숙부에게서 길러지고 그림공부를 하여 가법을 충실히 익혔다. 성격은 매우 호방하여 술을 좋아했으며 10세에 이미 그림에 대성하였다. 13세때는 장안사 벽에 산수 등을 그렸다고 전해지며 그의 뛰어나 활동에 비해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이정은 숙부가 전통적 양식과 새로운 화법을 소화하여 이루어내 가법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흥효의 「산수도」에서 보이듯이 전반적인 구도양식은 초기 전통적 화풍을 따르면서도 산이나 나무 기타 경물 등을 그리는 수법은 중기의 새로운 표현방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정은 더욱 젊고 대담하게 새로운 표현양식을 개척하고 있다.
그의 작품「산수도」는 12면의 화첩 중에 들어있는 두 번째 그림인데 화첩에 들어있는 그림들이 전반적으로 화풍상의 새로운 변화를 짙게 들어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그림은 특히 강조되어 있다. 오른편 하단에 언덕과 낚시하는 인물 등이 전경을 이루고 있으며, 저편에 멀리 원경의 낮은 산들이 보인다. 이러한 구도형식은 특히 남종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형식이다. 뿐만 아니라 파필(몽당붓이나 털을 일그려뜨려 거칠게 표현한 것)로 속도감 있게 그려나간 언덕과 나무, 그리고 간략화된 피마준(풀어진 마대와 흡사한 선의 표현으로 특히 남종화가들이 많이 사용함)법의 사용은 17세기 초반에 새로운 기운을 예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말하자면 18세기 화단에서 크게 성공하게된 남종화풍을 이미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에 걸맞는 능란한 필치와 표현 그리고 새로운 화풍의 수용 등에서 그가 조선조에서 대표적인 천재화가 임을 증명하고 있다. 너무 일찍 요절한 게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