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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 | 연재 [이십대의 편지]
거북이 달린다
김선희 전북대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2013-09-02 17:39:30)

새삼스레 다시 충격을 받았다. 친구와 영화관에 갔다가 생긴 일이다. 그 날은 사람에 치이면서 다닐 정도로 많은 인파가 있었다. 화장실도 역시 그랬다. 긴 줄을 기다리고 기다려 들어갔다. 평소처럼 하고 나왔는데 친구는 나를 기다리다가 짜증이 났다. “하여튼 누가 느리다고 안 할까봐 엄청 느리네. 빨리 좀 해”. 별 것도 아닌 친구의 한마디가 그렇게 아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느리다. 말도 느리고, 걸음도 느리고, 밥 먹는 것도 느리고…. 빠르다고 하는 것이 거의 없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디지털 기계들을 습득하는 것도 늦다. 그래서 살면서 ‘빨리-’ ‘답답해’ 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듣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시덥지 않은 이유를 대며 웃어넘기곤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게으르거나 무능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세상이 내가 따라가기에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성질이 느린 것도 있지만 너무 빠른 세상에 지쳐버렸다. 내 기준에서는 스마트함은 귀찮음 그 자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얼리어답터’로 ‘리노베이션’ 이끌어가는 진취적인 이십대는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평범한 20대 보다는 조금 천천히 돌아서 갈 뿐, 절대로 느리다는 핑계로 정체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각종 디지털기계의 본질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내부의 아날로그 감성이다. 디지털한 인간이 되지 못할 바에는 아날로그한 인간이 되기로 했다. 말하자면 차별화. 우연히도 작년부터 시작한 한지공예와 전통자수는 차별화의 완성이랄까. 거기에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기까지. 나는 운명적으로 아날로그 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느리다’는 나를 설명하는 딱 맞춤형 용어이다. 게다가 시대분위기도 나를 돕고 있다. 얼마 전부터 ‘슬로우’와 ‘힐링’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슬로우하게 살았고, 그 덕분에 힐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말이 느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듣는 것을 좋아한다. 말을 하기 위해서는 들어야 한다. 나는 언젠가 말을 잘 할 것이다. 걸음이 느려 도착은 늦어도 넘어지지는 않는다. 천천히 오는 것은 주변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고 결국 그 관심은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세상은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것이니까. 밥을 천천히 먹어 체하지도 않는다. 느리다고 구박 당하기는 하지만 구박하지는 않는다. 게으르다고 무능력하다는 오해와 편견은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 또한 결코 무조건 느리다고 늦는 것은 아니다. 때론 빠를 때도 있다.
느려서 좋은 점이 빨라서 좋은 점보다 많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모두가 빨리 가려고 속력을 내는데 나까지 끼어들어 복잡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멈추지만 않으면 되지! “빨리 와”, “빨리 해”, “빨리 가”. ‘빨리빨리 문화’에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는 뚝심만 있다면 느려도 상관없다. 세상에 있는 가치관의 수는 세상에 사는 인간의 수와 같다고 했다. 나의 가치관은 내 본성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성립할 수 없다. 거북이는 거북이의 길을 가는 것이고 토끼는 토끼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지 굳이 붙여 경쟁시키는 것은 토끼와 거북이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다. 토끼처럼 쉴 때도 있고 거북이처럼 끊임없이 걸을 수도 있다. 거북이가 느리다고 한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길을 열심히 가련다. 질기게 끊임없이. 느려도 한탄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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