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 | [문화저널]
판소리 명창
전통의 파수꾼 자리지킨 불운한 고수
명고수 이정업 2
최동현 군산대 교수, 판소리 연구가(2003-09-15 09:42:48)
조선성악연구회에 출입을 하게 된 이정업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 여덟이었다. 이정업은 당시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북을 주로 배웠는데, 이동백 등이 이정업의 솜씨를 보고‘그 사람 싹수있으니 잘 길러 주라’고 하면서 매우 아껴 주었다고 한다. 이때 이정업은 당시 최고의 명고수였던 한성준에게 북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원박 위주의 단순한 가락으로 소리를 잘 뒷받침하는 북가락의 양식이 서로 비슷한 데가 있어서, 영향 관계의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북가락의 채보를 통한 세밀한 비교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정업이 본격적인 고수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이정업에게 도움을 준 사람으로는 명창 김연수를 들어야 할 것이다. 예총 전라북도 지부장인 배기봉은, 이정업을 고수로 대성시킨 사람은 김연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김연수는 임방울과 함께 우리나라 판소리를 대표하는 대명창이었는데, 김연수는 이정업을 고수로 삼아 공연을 다녔고, 그 과정에서 이정업 또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정업과 김연수는 동갑으로 인간적으로도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정업의 고수로서의 성공이 전적으로 김연수의 덕택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정업의 탁월한 능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후원을 했다고 하더라도 명고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업이 명고수로 이름을 날리면서 활동한 시기는 생애의 마지막 십여 년이었다. 그 십여년동안에 이정업은 김연수 정광수 김소희 박초월 박동진 등 대가들의 북을 도맡아 치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이정업을 한성준 이후의 최고의 고수로 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박동진은 이정업에 대해,‘우리세대의 고수로는 이정업만한 고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정업은 대부분의 명고수가 판소리에 대한 쟁쟁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리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장단에 관한 한 장고에서 북까지, 그리고 판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민요·풍류·가곡·가사·시조에 이르기까지 달통한 그야말로 장단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실력은 어려서부터 보고 들으며 자란 집안의 음악적 전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정업은 24세 때부터 중앙방송국 전속 국악합주단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이정업은 방송국에 국악인을 소개하고 출연시키는 일을 오랫동안 맡아 하면서 국악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판소리가 쇠락의 운명에 처해 소리꾼들이 생계마저 크게 위협을 받고 있던 시기에, 이러한 이정업의 노력은 적지 않은 소리꾼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정업의 북 솜씨는 널리 인정을 받게 되어 마침내 1970년에는 서울신문 문화대상 기악부문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고수부문의 무형문화재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1974년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기도 전에 이정업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정업이 생존하여 활동하던 시기는 민족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련기였으며, 전통예술의 입장에서 보면 서구 문화의 무차별적인 유입으로 인하여 쇠락의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정업의 생애는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와 함께 한 일생이었다.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정부에서 무형문화재 제도를 만들어 제도적인 보호책을 강구하자, 그 덕택으로 전통의 파수꾼으로서의 자존심이나마 유지할 수 있게 된 후배들에 비하면, 이정업은 그런 최소한의 혜택마저도 받아보지 못한 참으로 불운한 고수였다. 이렇게 보면 이정업은 아마도 최후의 자생적인 고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녹음으로 북가락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고수들만을 대상으로 하면, 이정업은 제2세대에 속한다. 판소리가 불려지기 위해서는 고수의 북장단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북가락의 역사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작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실제「조선 창극사」에 보면, 판소리사의 초기 무렵에 고수로 활동하다가 명창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의 이름들이 다수 등장한다. 주덕기·송광록·이날치 등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근세에 들어서도 고수를 하다가 소리꾼으로 전환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송만갑의 수행고수를 하다가 명창이 된 김정문·장판계·박기홍의 수행고수를 하다가 명창이 된 박지홍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소리와 상관없이 고수로만 행세하여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박판석·신갑두·신찬문·오성삼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이름만 전해질 분 그 구체적인 가락은 확인할 길이 없다. 북가락의 확인이 가능한 고수는 일제시대 이후에 활동하면서 녹음을 남긴 사람들부터이다.
일제시대에 고수로 활동하면서 북가락의 녹음을 남긴 사람들은 한성준·정원섭·이홍원 등인데, 이들을 북가락의 녹음을 남긴 제1세대 고수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제1세대 고수들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타계하거나, 활동을 그만둔 것으로 생각된다.
해방 후로부터 1970년대 초까지 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제2세대 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바, 김세준·강태홍·김재선·이정업·한일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정업은 고수로서의 활동은 늦게 시작하였으니, 연배나 그 활동의 내용으로 보아 제2세대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며, 한일섭 또한 연배는 이들보다 훨씬 늦지만 그 활동으로 보아 역시 제2세대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북가락을 이끌어온 사람들은 김병환·김득수·김동준 등 세사람으로 이들을 제3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그 뛰어난 기량으로 1970년대 중반 이후 화려한 트로이카 시대를 이룩하였으며, 모두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1989년과 1990년에 모두 타계함으로써 그들의 시대를 마감하였다.
제2세대 고수들은 판소리에는 별다른 소양을 갖추지 못하였으나, 기악에서 나름대로의 세계를 개척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정업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해금에 아주 뛰어났으며, 강태홍은 가야금에, 한일섭은 아쟁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은 무형 문화재 제도의 혜택마저 받지 못한 자생적 예인들의 마지막 세대이기도 했다.
제2세대 고수들 중에서는 이정업과 한일섭의 기량이 제일 뛰어 났었다고 한다. 한일섭은 특히 그 화려한 가락으로 임방울의 오랜 수행 고수를 하면서 이름을 날린 반면에, 이정업은 임방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김연수의 수행고수로, 주로 정확한 한배와 소리꾼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가락으로 유명하였다. 이정업은 그 기량과 북가락의 특징에 있어서 제2세대 고수의 한 유형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