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3.10 | 연재 [서평]
만화방에 핀 사랑꽃
『아버지의 일기장』 박일호 일기, 박재동 엮음/ 돌베개
김규남 전북언어문화연구소장(2013-10-10 10:07:12)

시사만화로 시대를 풍미한 박재동 화백이, 선친 고 박일호 선생의 일기(1971년부터 1989년까지)를 발췌 『아버지의 일기장』을엮었다. 일기는 개인의 내밀한 고백과 성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일반적으로 공개되기 어려운 기록물이다. 자식에게 부모는 일종의 성역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책으로 엮는다는 것은 일종의 도발이다.
이러한 도발이 가능한 것은 박재동이라는 만화계의 큰 나무가있기까지의 세세한 내력이 일기 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과 일제강점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가 주도의 조국 근대화 과정이 가족 단위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현장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기는 특정시기의 시대적 상황과 기록자가 처한 삶의 구체적 여건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조우하여 체험하게 되는 사안에 대해 기록자의 주관적 선택에 따라 기록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일기는 그 시대를 살아온 개인의 역사인 동시에 거시적 관점의 역사 서술을 보완하고구체화하는 미시사 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주로 1970년대, 8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가족의 사랑과 성장에 대한 기록이 중심을 이룬다. 특히 한국 시사만화의 대부 박재동 화백의 성장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박재동 화백의 회고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일기를 근간으로 기억의 공백을 채우고 그 장면들에 시대적, 사회적, 개인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30여 년의 시간을 되돌려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는 가족사의 재구성이기도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박재동 화백의세세한 가정사를 들여다보게 되며,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자신과가족이 겪어온 시대와 삶을 회고하고 국가, 가족 그리고 삶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의 일기』 저자 박일호 선생은 1929년 경남 울산 범서읍 서사리에서 출생, 한국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하고도 서류 분실로 말미암아 두 차례 군 복무를 했다. 제대 후 울산 양사초등학교 교사로 복직되어 1951년 23세에 두 살 층하의 신봉선 여사와 혼인,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나 교직 생활중 발병한 폐결핵이 간경화로 진행되면서 교직을 떠난다. 저자는 십 여 년 동안 지속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비로소 1971년 4월 5일 식목일을 즈음하여 ‘마음속에 나무를 심듯’ 한 자한 자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주인공은 단연 신봉선 여사이다.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신봉선 여사는 연탄배달, 풀빵, 빙수, 오뎅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그는‘삶은 산모퉁이를 지날 때면 꽃이 지고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불어오는 겨울 찬바람에 부딪쳐 견디지 못해 알몸뚱이를 비비는 나무와 흡사하다’고 회고한다. 남편의 한시적 삶이 언제 끝날지 몰라 애간장을 녹이면서도 국화빵, 붕어빵, 오뎅 장사, 연탄 배달을 멈출 수 없었고, 만화방 단속 날에는 남편을 대신하여 유치장에서 밤을 새워야 했으며, 비 오는 날에는 세숫대야, 바께쓰, 다라이를 받쳐놓고 새는 빗물을 받으며날을 새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자녀들이 올곧게 자라는모습을 보며 희망의 꿈을 다졌고 ‘주부는 가정의 등불, 주부의얼굴이 어두우면 온 가정이 어둡다’는 소박한 신념을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문예당 사랑꽃’을 송이송이 피워낸다.
‘문예당’은 일기 저자 박일호 선생이 전셋집 주인에서 인수한 만화방에 붙인 이름이다. ‘문예당’은 한국 시사만화의 대부박재동 화백을 키운 텃밭이었다. 어린 박재동이 만화방에서만화를 보며 자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편견 때문에 빌려간 만화책이 찢기기도 하고 불량만화 단속 때마다 어머니가 유치장에 감호되는 수난을 보며자란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박재동에게, 초등학교 당시 한 선생님으로부터 ‘불량식품 먹지 말자는 주제로 오뎅 먹으면서 국물 뚝뚝 흘리는’ 포스터를 그리라는 주문을 받고 겪어야 했던, 그러고 얻어먹은, 그래서 당연히 맛이 없어야했을, 그 자장면이 맛있게 느껴졌던, 어린 박재동의 갈등과 분열, 아버지와 그 눈물겨운 사연을 나누며 제도와 국가가 가하는 폭력성 앞에서 작아지기만 했던 자신과 아버지의 모습은어린 박재동에게 결코 잊힐 수 없는 각인된 슬픔이었다. 그 속에서 당당히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드디어 한국 시사만화계의 대부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종국에는 만화의 사회적, 예술적 가치를 새롭게 수립하여 아버지와 자신의 삶의가치를 재정립한 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시대적 편견을 극복한 각본 없는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책은, 박일호 선생 내외께는 고단한 삶을 온전히보상받게 해준 세 자녀(재동, 수동, 명이)의 선물이며, ‘문예당’의 ‘사랑꽃’ 외손자 도형, 큰손자 서현, 작은손자 도일 그리고손녀 솔나리에게는, 살아온 날들의 날실과 씨실을 촘촘히 엮어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부모, 조부모의 삶과 정신의 유산이다. 이 책은 그래서 독자에게는, 지금부터라도 일기를 써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들을 기록하여, 사랑하는자녀들과 가족의 사랑, 정신의 교감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다. 나아가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면서 겪어야만했던, 사회 부조리와 권력의 횡포 그로부터의 다양한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고 건강하게 성장해 가는 가족 구성원들의 삶의기록은 사회와 가족 그리고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역사교과서이며 인생 지침서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기도 한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기록된 일기는 한국 현대 미시사 자료로서의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전북대 SSK개인기록연구팀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대하일기를모아 한국 근대화 과정의 지역적 차이에서 나타나는 동시대적비동시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자료 역시 학술적연구를 통해 현국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현대 미시사 자료로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