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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 특집 [창간기념특집]
스스로 자립하라 하신다면… 기꺼이 해야겠죠?
청년기획자를 주목하다
임주아 기자(2013-11-05 15:07:01)

‘청년’과 ‘기획’의 사전적 의미에 사람을 더하면 ‘일을 꾀하여 계획하는 20대 정도 남녀’가 된다. 여기에 통상적인 설명이 좀더 필요하다. 우리가 말하는 청년기획자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인력을 구성해 행사나 프로젝트에 대한 계획서와 제안서를 작성하고 예산을 집행하며 결과물을 내는 2~30대라 말할 수 있다. 기획자 앞에 ‘청년’을 붙이는 까닭은 신체적 나이를 뜻하기도 하지만 기성세대의 기획과는 다르다는 함의도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청년’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 새로운 만듦새를 추구하는 계층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주류의 문법을 거스르며 홀로 또 같이 살아가는 청년들, 모든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남다른 성과를 올리고 있는 청년기획자의 일은 어떻게 진행될까. 과연 그 결과물은 무엇이 다르고,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을까. 또한 그들은 얼마나 치열하게 살며 어떤 희망을 품고 있을까.

좋아서 하는 기획, 소중한 첫 시도
청년기획자들의 아이디어 하나가 기획으로 발전하고 축제가 되는 일. 그 문화가 사례가 되고 전례가 되어 문화적 토대를 만든다. 문화콘텐츠 생산자이자 문화시장의 중추가 되어야할 청년기획자. 지역문화계에서 그들의 역할과 비중이 커지고 있다. 올해 8월, 어느 기획단이 보여준 한 축제가 화제가 됐다. 전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문화기획자가 모여 기획한 ‘더 페스타 케이브’였다. 공연장소로 한번도 사용된 적 없는 곳일뿐더러 터널이자 굴인 이 특수한 공간을 공연장으로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스케이드보드팀, 비보이팀이 배틀을 펼치고 한벽굴 안에선 인디밴드, 래퍼, DJ 등 공연이 펼쳐졌다. 축제 공동기획자 정문성은 “전주하면 늘 한옥마을만 떠올리는 사람들과 또 그 속에 묻히는 각각의 문화가 안타까웠고, 잊혀져가는 한벽굴이란 문화재에서 공연을 열면 여러모로 의미 있고 새롭겠다 생각했다. 무료 공연을 당연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료행사를 공공장소에서 할 수 없는 전주시의 입장으로 행사는 반토막이 났다. 스스로 노는 것으로 만족했던 공연자들과 관람객이 행사비를 나눠내려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비용은 고스란히 기획단의 몫으로 남았다.
청년기획자 박세상은 새로운 기획시도의 쓴맛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청년기획자가 겪어야할 지난한 과정과도 같다. 대학가를 새롭게 바꿔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던 대학 3학년 때였다. 공연을 만들면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오기 일쑤, 경찰서에 끌려가는 상황이 반복됐다. 안되겠다 싶어 상가 사장님들과 안면을 트기 시작했다. 이후 고민의 폭은 개인에서 차츰 지역중심으로 나아갔다. 대전 궁동 로데오거리의 상권활성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고, 쿠폰프로젝트, 버스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엉금엉금 2년을 기어갔다. 이후 회사를 설립해 사회적기업으로 인증 받았지만 자립은 쉽지 않았다. 고향 전주로 돌아와 한옥마을 향교길 한편에 둥지를 틀었다. 1년 동안 돈 버는 일은 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만 만났다. 그들의 어려움과 부족한 부분이 한눈에 보였다. 한옥마을에 한복을 입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도 그때였다. 그 생각은 지난해 9월 치른 한복데이 기획으로 이어졌다. 당시엔 공모사업이 있어 예산을 받고 시작했지만, 올해는 기획 순서를 뒤집어 예산 대신 사람 먼저 모았다. 천명이었다. 한옥마을 일대는 한복입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한옥마을에 한복 입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기획의도도 자연스레 심어주게 됐다. 내가 불편하다고 촌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오히려 기회로 만드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청년기획자 박세상. 대학가 문화를 바꾼 것도, 지금도 한옥마을에서 이 일을 하는 것도 그 맥락이이라 말한다. 오히려 문제점이 많으면 훨씬 기회가 많을 수 있다는 것, 과정을 통과해낸 그의 조언이다.
한 공연기획자는 “공모사업에 기획서를 내면 열에 아홉은 떨어졌다. 관에 실망해 독립적으로 프로젝트를 열었지만 그것 또한 내 의도에 맞게 굴러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성장통이 처음 아이디어를 더 촘촘하고 커다랗게 재조직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힘들지만 이러한 첫 시도들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기록되고 기억된다.
한벽굴 축제가, 한옥마을만 있는 줄 알았던 전주를 다시 보게하는 매개가 되고, 거꾸로, 한복데이가 있어 한번 더 한옥마을을 방문하고 싶은 이들이 많아지는 그 날은 머지않아 보인다. 이처럼 청년기획자의 최초의 아이디어, 첫 시도, 첫 모임은 모든 도시가 추구하는, 다시 찾고 싶어지는 정착하고 싶은 지역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지역문화를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고, 하나의 선례를 만들어가는 것, 청년기획자의 시행착오와 결과물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중요하다.

창의성 막는 공공지원사업
젊은 세대 유출, 더딘 세대교체뿐…

문화시설이나 기관에서 실무 역할을 하는 청년들이 꽤 있는 것과는 달리 이처럼 독립적으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청년기획자는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한 청년 공연기획자는 “20~30대가 기획자로 움직이고 책임자 직함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서울의 환경이 부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의 현실은 어떠한가. 기획자로 발돋움하려 어떤 기획을 준비했다가 물질적·이해관계에 부딪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끝없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문화시장의 폭이 없거나 좁은 지역에선 이를 만들고 보호해줄 공공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설상가상, 많은 청년기획자들은 이런 공공 지원사업이 오히려 생각과 창의성을 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원을 받는 순간 행정실무자와 갑을관계가 형성되고, 사업서류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다보면 원래의 기획은 사라지고 보여지기 위한 결과물만 열심히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기획자 이거성(23)은 “창의적 산물 이전의 과정에 대한 보상이 없고 그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창의성의 가치를 계량화 시킨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연하지 못한 공공지원사업은 젊은 세대의 수도권 유출과 열악한 지역경제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미술학도들의 씨앗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떼려는 신진작가들이 자립 환경을 찾고 방향을 설정하기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특히 순수미술학과가 폐과되고 축소되는 도내 미술대학의 실정에선 더욱 그렇다. 이러한 현실에 도내 4개 미술학과 대학 출신 재학생과 동문이 모여 만든 비영리미술단체 ‘C-art’가 반갑다. 2011년 전북도립미술관 대학졸업전 전시를 계기로 뭉친 그들은 전주대 미술학과 출신인 작가 김지현의 주도로 ‘C-art’란 비영리미술단체를 결성했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미술큐레이터와 중견작가 선배를 초빙해 워크숍을 연 ‘REBOOTING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지난 10월 단체전을 치르며 신진작가의 가능성과 미술단체로서의 긍정적 행보를 동시에 보여줬다. 작가 장지은은 “(워크숍에서) 같은 길을 걸어온 미술계 선배들에게 조언을 얻고 우리 이야기할 수 있어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작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고, 우리 모두 햇수가 지날수록 작품이 성숙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작가 김종명은 “C-art는 낙오되지 않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안내하는 동반자 역할을 해 준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서로 응원하고 네트워크를 이어가는 연결고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길빈 작가는 “선후배 작가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다.
사람이 모이려 하는 궁극의 이유가 있다면 서로 간의 대화와 소통에 대해 부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수직이 아니라 수평구조일 때 서로 편안함과 재미를 느끼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C-art도 이러한 갈증에서 생겨나 서로 간 유대를 쌓고 지금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힘을 같이 모으는 것이다. 이같은 네트워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들 스스로 뭉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프로그램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필요하다. 작가 김지현은 “기획자 교육이나 큐레이터 지원 등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창작자를 위한 지자체의 유연한 지원사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눈여겨 봐야할 사람들은 그들의 고민을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지역 미술계 기성작가들일 것이다. 순수 미술학과가 폐과되고 축소되는 도내 미술대학의 실정에서 스스로 나아가려 고군분투하고 있는 미술계 후배들을 위한 경험이나 노하우를 전할 수 있는 네트워크 형성도 필요해보인다.

공공지원제도, 인식과 안목 키워라
청년기획자, 모이고 묻고 답하라

여러 분야에 아울러 있는 청년기획자들이 이러한 현실과 고민을 해결해줄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많은 청년기획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공공기관의 의식 개선과 유연한 지원사업의 필요성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의 활동과 작업을 규격화된 상품으로 여기는 천편일률적인 태도와 안일한 포즈를 삼가고 그들의 시행착오와 과정을 인정하는, 그 속의 가치를 더 눈여겨보는 넓은 인식과 안목이 필요하다. 공공지원제도는 현실에 맞게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세대 간 종속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로서의 교류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떠오른다. 청년기획자들끼리의 네트워크와 상부상조도 필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모색이 대두되는 시점이다.
그레이(Graye)란 예명으로 활동하는 군산 출신 비트뮤직프로듀서 문이랑(23)은 자신의 지역을 기반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모든 분야의 창작자와 기획자들의 모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들이 독립적으로 수입을 내고 함께 모여 시너지를 낼 수 있을 만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그는 “어떤 단체에 속해 있던 창작자들이 생계문제로 흩어지거나 반대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단체나 업체의 스폰을 받고 난 뒤 생기는 문제들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고 그 후 새로운 단체가 생가는 상황의 반복을 계속 겪어 왔다”며 “이제는 독립적이지만 서로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단체들의 큰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관심사가 비슷한 창작자와 기획자끼리의 모임이 하나둘씩 생겨나 그 줄기가 단단해진다면 당장 해답은 아니어도,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함께 성장해나가고 때론 새로운 답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딴짓을 허하라
지역의 밴드들과 기획자들이 만든 ‘메이드인전주(made in jeonju)’는 웬만한 전주시민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연중 공연 브랜드가 됐다. 밴드음악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지역에서, 서울의 뮤지션과 지역의 밴드가 어울려 노는 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한 배경엔 이를 이끌었던 정상현 대표와 같은 청년기획자와 뮤지션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기획과 노력, 희생과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전주를 대표할 문화 하나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한 사람의 기획자에게 모든 짐을 지워줄 것인가. 환경은 만들어주지 않고 스스로 자립하라 말할 수 있을까. 지역문화 십년을 책임지는 청년기획자들이 좀더 뛰어놀 수 있는 문화적 지형이 필요하다. 더불어 그들의 이러한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어떤 꽃을 피워내는지 묵묵히 지켜보아야 한다.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더라도, 그것이 실패한 경험으로 남아도 그들의 ‘딴짓’을 유연하게 지켜봐줄 수 있는 지역문화계의 현명한 시선과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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