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 | [문화저널]
여성과 문화
인간으로서의 여성선언
『델마와 루이스』
여성문학모임(2003-09-15 09:47:40)
평범한 가정주부인 델마(Thelma)-지나 데이비스扮-와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애인과 동거를 하고 있는 루이스(Louise)- 수잔 세런든 扮-는 권태로운 일상생활(무관심한 부부관계, 기약 없는 동거생활)에서 벗어나 주말여행을 떠난다. 목적지인 오두막에 가는 도중 잠시 들른 바(Bar)에서 갑작스러운 해방감에 들뜬 델마는 낯선 남자와 술을 마시며 춤을 춘다. 루이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즐기던 델마는 강간의 위험에 처하고, 이를 목격한 루이스는 강간범을 살해하게 된다. 그러나 강간에 대한 정당방위로서의 살인은 델마의 들뜬 행위로 인해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바로 법, 즉 현대 신 가부장제 사회의 법률임을 이미 체험한 루이스의 주장으로 두 여인은 현장을 떠난다. 즐거운 낚시여행이 아닌 도피행을 벌이는 델마와 루이스. 그녀들은 서로 의지해 가며 멕시코로의 도피를 꿈꾼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새생활을 시작할 돈마저 사기를 당하게 되고,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슈퍼마켓 강도와 교통경찰 위협 등 그녀들의 죄목(?)은 점점 무거워지고, 결국 경찰의 추적망에 걸려 낭떠러지에 직면하다. 이제 그녀들은 선택을 하여야 한다. 경찰에 투항하여 남성옹호의 편벽한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이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평범한 두 여인의 자아와 세계와의 통합과정을 광대한 미국서부풍경과 조화시켜 뛰어난 영상미로 승화시키고 있다. 델마와 루이스는 현대 여성들을 '규정'하는 모든 특성을 골고루 보여주는 입체적 인물들이다. 먼저 델마는 4년 간 연애 끝에 결혼한 남편과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순종형의 여성상이다. 감상적이고, 충동적이며, 의존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천진난만한 백치미 -- 델마의 이러한 백치미가 영화를 가볍게 만드는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인물형의 창조는 주제를 심화시키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를 가진 델마. 반면 루이스는 텍사스에서 성폭행을 당한 과거를 가진 여성으로 법과 사회 모두가 성폭력의 희생자인 여성에게 얼마나 냉혹한가를 체험한 이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독립적인 여성상이다. 변두리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지미라는 동거인이 있고, 영화의 짐꾸리는 장면에서 잘 보여지듯이 조직적이고 침착하며 이성적이다. 이와 같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여인은 사건이 가속화되고 여러 난관에 봉착하면서, 자신들의 다른 모습들을 확인하게 된다. 보는 이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멍청한 금발 여자'인 델마는 강간의 위협과 사기, 강도 행위 등의 시련을 거치면서 루이스의 현실, 즉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법마저도 여성에게는 불평등하다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루이스는 미국 서부지역을 통과하는 도피행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통한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깨닫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감독 리들리 스코트의 뛰어난 영상미가 돋보이고 있다. 영화 전편을 통하여 배경이 되는 서부의 자연은 주인공 두 여인이 자아를 형성해 감에 EK라 거대한 바위, 나무들 모두 하나 하나 의미적 존재로서 빛을 발하고 있다. 결국 자살을 택하는 델마와 루이스. 그녀들은 더 이상 20세기 신 가부장사회의 아내, 애인(가사노동자이며, 성적대상, 또는 가계의 보조자)이 아니다. 그녀들은 이제 자연의 일부로서의 여성이며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들은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비극적 종말에 기인하는 착찹함이 그 첫 느낌이 될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절벽을 넘어 하늘로 '날아가 버린' 두 여인의 과감한 행위를 통한 통쾌감에서 유래한 카타르시스적인 후련함일 것이다. 전자는 여성의 현실은 '아직도' 어쩔 수 없다는 패배감을 유발시키고, 후자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 것에 대해 자칫 여성문제를 보는 시각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혹평을 들을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통합시켜 극복하려 한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이며, 관객의 감동을 극대화시키는 요인이라 여겨진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두 여인의 자살이 과연 생에 대한 체념인가, 아니면 현실에 대한 도전인가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극의 기본이 되는 사건은 영화 『립스틱』이나 『피고인』등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유형의 강간사건으로 그 결과도 앞의 두 영화와 마찬가지가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델마와 루이스도 그것을 알기에 남성들의 법에 의해 심판 받기를 거부하고 도피를 감행한다. 두 여인이 되돌아 갈 곳은 이미 없다. 델마와 루이스의 차와 끊임없이 마주치며 성적희롱을 일삼는 유류 수송차량은 그러한 현실을 상징해 주고 있다. 두 여인의 여정이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 전반을 통해 마주치는 트럭 운전사는 델마와 루이스의 권총 앞에서도 모욕적인 성희롱에 대해 사과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욕설을 한다. 이러한 운전사의 행위는 두 여인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아니 델마와 루이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인류의 반인 여성이 겪어야만 하는 비윤리적인 성적희롱이 범람하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대변하고 있다. 경찰에 투항하여 죄를 인정하고 목숨을 건지는 행위는 일종의 타협이다. 즉 불합리한 법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속에 편승하여 남성의 종속된 존재로서의 여성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반면 자살을 외형적 의미는 포기와 체념으로 여겨지기도 하나, 부조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인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죽음으로 지켜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계속되는 비극으로의 추락이다. 그러나 두 여인은 그 비극을 토대로 자아를 회복하고 인간선언을 함으로서 더해지는 비극에 모순되게 행복한 여정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여인은 자유를 상징하는 녹색 오픈카를 타고 절벽을 뛰어넘어 하늘높이 날아오른다. 짧게 처리된 화면이 오히려 비감보다는 환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델마와 루이스』는 예술적 영상미와 뛰어난 각본(64회 아카데미와 49회 골든글로브의 각본상 수상),그리고 두 여주인공의 신선한 연기력이 더해진 감동적인 영화이다. 또한 제도적 편견을 극복하고 비극적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한 '행복한' 영화로서 완전한 인간으로 서려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