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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 | 칼럼·시평 [문화칼럼]
세상에게 말 걸기
이승진 원광대 교수(2013-12-09 17:06:04)

올해 5월 전주영화제에서 그 영화를 볼 기회가 처음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매진. 극장 상영을 기다렸다. 메가박스에 걸린다기에 송천동 메가박스를 찾으려했는데, 극장은 석연찮은 이유를 대며 며칠 만에 영화를 내렸다. 그리고 추석 연휴기간, TV에서 유료로 내려 받을 수 있었다. 추석 연휴에는 가족들과 함께 방송국 자체 추석특선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다운 받으려니 이 영화가 목록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내 게으름을 탓하며 아쉬워하다, 마침 서울 학회 가는 길에 하루 먼저 올라가 광화문의 한 소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그날이 바로 종영일이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미 짐작을 하겠지만 “이 영화”는 바로 <천안함 프로젝트>다. 영화를 보고 어두컴컴해진 광화문 길을 내려오면서 “의심이라는 것은 소통의 출발점”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쉽게 떠나지를 않았다. 결국 이 다큐 필름이 원했던 것은 관객과의 소통이었다. 자신들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보여주면서, 서로 다른 생각들이 말의 광장에서 만나서 어우러지고, 걸러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알려져 있는 것은 그것이 알려져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참된 인식은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다. 헤겔을 존경하기에, 죽어서도 베를린 그의 무덤 반대편에 자신의 묘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 브레히트는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라는 시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만 나와 있다/ 과연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정말 혼자서 해냈을까?/ 시이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했다는 소식에/ 울었다. 운 사람이 그 하나 밖에 없었을까?/ […]/ 참 많은 이야기들/ 그 만큼 많은 의문들.”
이와 같은 의문이 브레히트에게는 창작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 브레히트는 『율리우스 시저 씨의 사업』이란 미완성 소설에서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영웅 시저와는 다른 시저를 그려낼 수 있었다. 소설 속 시저는 사치가 극심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진다. 그렇기에 그가 가장 자주 만나야했던 사람들은 정치인도, 군인도 아닌 ‘빚쟁이와 집달리’였다. 시저는 또한 총독으로 있었던 스페인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적군 사살자수를 허위로 부풀리는 것은 물론, 장비 노획을 과시하기 위해 고물상으로부터 장비까지 사들이고 노예장사도 마다하지 않는 파렴치한이다. 브레히트는 로마와 시저에 관한 자료들에 의존해 완전히 새로운 시저상을 만들어내었으며, 한국에서도 번역된 교양 베스트셀러 『교양-사람이 알아야할 모든 것』의 저자 슈바니츠는 로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추천도서로 몸젠의 『로마사』와 함께 브레히트의 『시저 소설』을 추천하고 있다. 슈바니츠는 하나의 견해 보다는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접하는 것이 보다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대상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 <오 수정>은 수정과 재훈이라는 여자와 남자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면서도 서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키스를 나누다 떨어트린 것이 남자는 포크라고, 여자는 티스푼이라고 기억하고 있으며, 심지어 첫 섹스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도 남자는 여자의 생리를, 여자는 남자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각자의 머리에 입력시켜 놓고 있다. 홍상수는 이처럼 대조적인 기억들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인식이나 기억이 매우 주관적이며, 인식 당시의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다시 말해 인식이나 기억은 그 주체의 필터링을 거친 취사선택이며, 재구성작업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모든 예술은 ‘말 걸기’이다. <천안함 프로젝트>도 『율리우스 시저 씨의 사업』도 그리고 <오 수정>도 하나가 아닌 다양한 인식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대상에 대해 “너의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라고 말을 걸고 있다. 수용자들(독자나 관람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술로부터 무엇인가를 거저 얻으려하지 말고, 대상에게 말을 걸고, 다른 수용자들과의 소통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예술은 예술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들이 발 딛고 있는 세상에 대해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 이 점은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해가 저문다.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술추렴을 해야 했던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다. 이제 얼마 안 남은 새해 갑오년에는 다른 의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다름과 틀림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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